틴더에서 만난 남편_7

멱살 잡힌 퇴사

by Tree and Earth

버스종점 아파트에서 좋았던 점 한 가지는 동네 뒷산으로 올라가면 관악산으로 바로 이어지는 점이었다. 못 잡아도 한 100번은 관악산 국기봉에 올랐던 것 같다. 서울시내 빽빽한 아파트 숲을 내려다보며 저거 하나 가지려면 10억을 줘야 한다는 거지? 얘기하다가 내려오곤 했다.


베짱이가 개미로 탈바꿈한 지 7개월이 넘었다. 나는 나대로 늘 9시가 되면 서재로 출근했다. 코로나 때 시작한 재택이 3년 차에 접어들었다. 새로 바뀐 팀에서 나는 인간 시지프스가 된 기분이었다. 아침마다 무거운 돌을 지고 골고다의 언덕을 올라서 퇴근을 하고 다음날 같은 일을 반복하고. 이제 베짱이도 정상 궤도에 올라섰으니 빨리 목돈을 굴려서 파이어족에 합류하고 싶었다. 평균적으로 여자 정규직 은퇴 나이가 48이라는데 남들도 다 나처럼 너무 힘들어서 내려놓나 싶기도 하면서 빨리 목표한 금액을 채우고 자유롭게 살아야지 하는 꿈을 꾸고 있었다. 그 목표가 너무 뚜렷한 나머지 한번 직진하면 다른 것들은 보이지 않는 나 때문에 내 생일날 사고가 터졌다.


그날도 하루 종일 돌을 올리다 퇴근시간에 닥쳐서 화장도 수정 못하고 후다닥 겉옷만 챙겨서 나올 수 있었다. 정신없이 일을 마무리하고 버스를 타고 약속장소 식당으로 가는 사이에 시지프스의 피로감이 진하게 남아있었고 내 생일밥을 먹는데도 몰입할 수가 없었다. 갑자기 베짱이가 요즘 너 너무 지쳐 있는 것 같다며 여수 여행을 가는 게 어떤지 제안했다. 가서 맛있는 해산물도 먹고 푹 쉬다 오자는 남편이 너무 철딱서니 없게 느껴졌다. 빨리 모아서 목돈 굴려서 은퇴해야 하는 일생일대의 목표 앞에서 계획에도 없는 여행 지출이라니.


심드렁하다 못해 못마땅해하는 내 반응에 남편도 화가 나기 시작했다. 내 기분을 설명하지 못해 나는 그냥 입을 다물어 버리고 우리는 그렇게 코스요리를 끝까지 먹지도 못하고 밖으로 나와버렸다. 식당 앞 골목길에서 정말 오랜만에 화가 난 남편이 목소리를 높였고 나는 그런 그가 무서워져서 오늘은 집으로 오지 말고 시댁으로 가라고 했다.


돌이켜보면 그때 정말 이혼할 뻔했다. 결국 시누이의 중재, 하룻밤을 보낸 후 각성한 나의 반성모드에 남편은 화가 풀리긴 했지만 정말 진지하게 내 퇴사를 권유했다. 봉인해제된 내 입은 남편에게 회사에서 있었던 모든 일을 얘기하기에 남편은 우리 회사의 조직도를 그릴줄 안다. 그런 그가 이 판은 해결책이 없다며 날마다 그렇게 머리 싸매고 스트레스를 받다가는 파이어 자금 모으기 전에 뇌수술을 받을 일이 생길 거라며 다 내려놓고 그만 은퇴하라고, 자기가 먹여 살리겠다며 우리 수입과 지출내역을 정리해서 보여준다. 충분히 가능하니 이만 편히 살아도 된다고 한다.

"알겠어. 그럼 올해 말. 아니 내년 초 성과급 받을 때까지만 다닐게. 나한테 시간을 좀 줘."


하지만 그로부터 일주일 후 남편은 퇴근해서 현관문을 열다가 아직도 근무 중으로 낑낑대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우당탕탕 프로젝트를 이끄는 와중에 블레임을 받고 화가 나서 눈물이 터지기 직전의 나를.

그날로 남편은 못 기다리겠다고. 너 잘못될 것 같다고. 뇌수술받기 전에 그만 내려놓자고. 스트레스가 사람을 죽인다고 나를 설득한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에 퇴사원을 제출했다. 내 나이 49세. 멱살 잡힌 퇴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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