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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하유지향 Aug 16. 2024

사모님의 세계

딩동~ 초인종이 울린다. 현관문 앞이다.

‘이 시간에 올 사람이 없는데’ 하며 월패드 화면 통화버튼을 눌렀다. 누구세요? 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지 대답이 없다. 화면 안에는 작업복 차림의 남자가 서 있다. 며칠 전 A/S를 신청해 놓은 게 떠올라 문을 열었더니 이십대로 보이는 앳된 모습의 청년이 서 있었다. 잘못 찾아온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하는 사이 동호수를 확인하고는 바닥 마루를 손보러 왔다고 했다.


손 볼 곳을 알려주자 젊은이는 한동안 흠집 난 마룻바닥을 오려내느라 허리를 바짝 엎드리듯 숙이고 작업에 열중했다. 작업은 30분가량 이어졌는데 바닥을 긁어내는 소리가 잔잔한 음악을 틀어놓은 듯 바닥으로부터 울리며 집안을 채우고 있었다. 새로 입주한 아파트인 데다 우리는 세입자 입장이어서 계약조건에 하자보수에 대한 의무를 성실히 이행해 줄 것을 집주인으로부터 요청받은 상황이었다. 찍히고 패인 바닥을 긁어내고 채우는 작업이 이어지는 동안 간간이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청년은 자신의 일에 집중하면서도 내가 던진 질문에 눈을 맞추어 친절하게 대답해 주었다.


요즘 보기 드문 젊은이의 모습에 흐뭇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고 있을 때였다. '사모님~' 하고 부르는 소리가 지나가는 바람소리처럼 스쳤다. 주변을 휘 둘러보았다. 방금 전까지 마루 바닥에 찰싹 붙어있던 청년과 나 단 두 사람뿐, 다른 생명체라곤 파리 한 마리조차 보이지 않았다.

사모님~ 하고 부른 사람은 방금 전까지 바닥에 바짝 엎드려 패인 마룻바닥을 긁어내던 그 청년이 분명했다. 왜냐하면 나는 사모님을 부른 적이 없었으므로. 그러므로 대답을 할 사람은 오직 나 하나뿐이었다. 대답을 하긴 해야겠는데 입 밖으로 나와야 할 목소리가 목구멍 안으로 슬금슬금 기어들어갔다. 겨우 모기소리만 하게 ‘네에’ 하며 나온 대답은 드라이아이스처럼 금세 사라졌다. 귀까지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런데 생각을 더듬어보니 몇 년 전부터 생수를 배달해 주시는 분에게 나는 이미 사모님으로 불리고 있었다. 생수를 주문하려고 주기적으로 전화를 할 때마다 ;"네~ 사모님" 이란 호칭이 따라왔다. 영 어색하고 부담스러웠지만 그렇다고 딱히 어떤 호칭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 것도 아니어서 용건만 간단히 말하고 급히 통화를 끝냈었다.


지금 나는 사모님이라는 호칭 앞에서 어울리지 않는 옷을 걸친 듯 어색함에 어쩔 줄 몰라하고 있었다. 그 사이 청년은 내 앞으로 확인서를 내밀었다. 신청한 a/s를 완료했다는 확인을 받기 위해 사인해야 할 곳을 손으로 짚어주었다. 수고했다는 인사를 건네고 청년이 문밖으로 나가기 무섭게 핸드폰을 꺼내 사모님을 검색했다.

'사모님은 명사로 윗사람의 부인을 높여 이르거나 스승의 부인 또는 남의 부인을 높여 이르는 말로 영어로는 마담(madam), 유어레이디(your lady) , 미시즈(Mrs~ )라고 한다. 프랑스어로는... '

검색한 대로라면 나는 누구누구의 부인이 맞지 않는가. 그런데 왜 사모님~하고 부르는 말에 그토록 진저리 쳤을까.

내 머릿속에 저장된 사모님과 현재의 내 모습은 건널 수 없는 강을  사이에 두고 전혀 다른 세계에 살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일까.


나는 사모님을  50인치 TV속 등장인물로 가둬두었다. 흔히 '사모님'이라 불리는 부류는 기사가 운전하는 차에서 내리거나 집안에서는 하늘거리는 드레스 소재의 홈웨어 차림에 굽이 있는 슬리퍼를 신었다. 금박을 두른 잔을 들어 올려 홀짝이듯 한 모금 마시는 장면에서 클로즈업된 손은 반지와 팔찌, 시계로 눈부시게 빛이 났다. 아줌마를 부르는 목소리는 너무도  거침없고 자연스러움이 배어 나온다. 그러니 사모님이란 호칭은 나와는 어울리지 않는 다른 경지라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순수하고 중립적인 언어는 어떻게 내가 이런 기울어지고 찌그러지고 치우친 생각을 갖게 만들었을까.


나는 나도 모르게 중립성을 가지고 태어난 언어에 색깔을 덧입히고 소통창구의 역할을 벗어나 일방향으로 흐르며 의미를 왜곡하거나 심지어 확대해석하는 경우는 또 얼마나 많았을까. 언어의 순수성에 대해 되새김해 보게 된 작은 사건이었다.














사모님은 누구에게 호칭되는가? 사회에서 암묵적으로 통용된다고 믿어지는 적당히 잘 차려입은 나이 지긋한 여자인가. 그렇지 않다고 나는 생각한다. 아줌마가 연배가 높아지면 사모님이 되는 것은 아닐까. 사모님이 더 연배가 높아지면 그때 할머니가 된다고 생각한다. 이 세상 모든 할머니는 할머니이기전에 사모님이었다.

사모님이 나이 지긋해진 여자가 되었다는 의미라면 사모님 안에는 오랜 시간 잘 발효되어야 얻을 수 있는 감칠맛 나는 여유가 들어 있다는 의미를 포함하는 말 일 것이다. 치열하게 살아온 삶을 되돌아보는 여유, 작은 실수 정도는 슬쩍 눈감고 넘어가주는 여유, 엘리베이터를 함께 탄 모르는 이에게 부드러운 표정으로 눈인사를 정도 건넬 줄 아는 여유 등등. 이런 것이 사모님의 세계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렇게 생각하니 어색했던 사모님이란 호칭이 기분 좋아지기 시작했다.      




뉴스에서는 온통 젊은이들이 취업난에 힘들어하면서도 험하고 궂은일은 하지 않으려 한다는 뉴스가 심심찮게 나오고 있던 터였다. 이런 세태에 나와 같은 기성세대들 중에서는 젊은이들이 그저 편하고 쉬운 일만 찾으려 한다며 혀를 끌끌 차기도 했다. 가며 한탄조의 탄식을 안주삼아 술잔을 기울이는 사람도 있다는 소리를 심심찮게 들은 적이 있다. 나도 고정관념에 물들어 있었는지 아무튼 그 청년의 모습이 남다르게 보이긴 했다. 뉴스에서는 온통 젊은이들이 취업난에 힘들어하면서도 험하고 궂은일은 하지 않으려 한다는 뉴스가 심심찮게 나오고 있던 터였다. 이런 세태에 나와 같은 기성세대들 중에서는 젊은이들이 그저 편하고 쉬운 일만 찾으려 한다며 혀를 끌끌 차기도 했다. 가며 한탄조의 탄식을 안주삼아 술잔을 기울이는 사람도 있다는 소리를 심심찮게 들은 적이 있다. 나도 고정관념에 물들어 있었는지 아무튼 그 청년의 모습이 남다르게 보이긴 했다.

청년이 슬쩍 보기에도 어느새 내 나이가 사모님이란 호칭을 고민 없이 써도 될 만큼 늙었다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자 울컥 쓸쓸해져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한편 그 이유가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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