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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하유지향 Sep 22. 2024

게으른 농부

때마침 봄비가 주룩주룩 내리기 시작했다.

우리 부부는 환호성을 질러댔다. 얼마간은 목마름에 비실거리던 나무에 팔뚝만 한 호스를 이리저리 끌고 다니며 물을 줘야 하는 수고로움도 덜 수 있게 되었다. 비 오는 날은 농부들에게 금 같은 휴식시간이다. 비는 그칠 줄 모르고 여름 장마처럼 내렸다. 눈 코 뜰 새 없이 바쁜 농번기에 하늘이 준 달콤한 보너스를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손에서 하루도 놓지 않았던 호미며 곡괭이를 슬그머니 내려놓았다.

 

이제부터는 간간히 그들의 동태를 살피며 혹시 있을지 모르는 무차별 게릴라 반격에 대비만 하면 되겠지 싶었다. 며칠 동안은 하루 종일 쉴 틈 없이 이어져온 노동의 고단함을 풀어 줄 낮잠을 즐기리라.

길게 이어지던 비가 그치고 나자 메말랐던 땅은 물기를 촉촉이 머금고 있었다. 어린 나무의 뿌리를 적셔주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여름 문턱에 들어선 늦봄볕이 따갑게 내리쬐고 있었다.


커다란 챙 모자를 얼굴이 반쯤 가리도록 푹 눌러쓰고 끈으로 질끈 동여맸다. 팔 토시에 장화까지 작업 복장을 단단히 갖추고 어린것들을 살피러 나갔다. 멀찌기서 바라보이는 차밭은 싱그러운 초록물결로 넘실댔다. 콧노래가 저절로 나왔다. 남의 영토를 무단으로 점령한 침입자의 최후가 이런 것이리라. 나도 모르게 콧노래가 나왔다.


마음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흥얼거리던 콧노래가 ‘악’ 하는 외마디 비명으로 바뀐 건 한순간이었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차나무 밭에 풀을 심은 건지 풀밭에 차나무를 심은 건지 도통 분간이 가지 않았다. 멀리서 보았던 싱그러운 초록물결은 차나무를 에워싼 푸른 군사들의 무리였던 것이다.


지금까지 해 온 게 얼만데…. 하루아침에 게으른 농부가 된 것 같아 허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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