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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등대 Jun 24. 2022

창조적 사진의 시작

사진작가 다이안 아버스와 사람 다이안 아버스에 대한 생각

내 의심치 않으니, 아, 세계의 존엄성과 아름다움은 이 세계의 극히 미세한 무언가에 숨어 있으리/[...] 내 의심치 않으니 시시한 것, 곤충, 야비한 사람, 노예, 난쟁이, 잡초, 거부당하는 온갖 무가치한 것에도 내 상상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이 존재하리니


- 윌트 휘트먼-



휘트먼의 글귀로 운을 띄우고 싶었다. 19세기 휘트먼의 감상적 휴머니즘 관점은 그 당시 미국의 사진작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 이후 성숙해진 미국 사진작가들 사이에서 실제로 겪은 경험을 아주 솔직하게 모조리 기록하라는 휘트먼 식의 요구는 매력을 잃어갔다.




그중 내게 매력적으로 다가온 사진작가, 다이안 아버스에 대해 사색하는 시간을 가져보았다.

다이안 아버스는 온갖 '이상해 보이는' 사람들을 찍는 데에만 관심을 가졌다. 온몸에 바늘을 꽂는 사람, 개를 끌고 다니는 양성 인간, 문신을 새긴 남자, 칼을 삼키는 색소 결핍증 환자 등을 말이다.


다이안 아버스의 사진을 보면서 느낀 점이 있다.

 사진에 찍힌 사람들이 '불행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수전 손택의 말을 빌려보자면 '대부분의 관람객들은 아버스의 사진에 찍힌 사람, 유전적으로 기형일뿐만 아니라 성적으로 소수자인 그 사람이 불행하리라고 상상할 테지만, 정작 그 사람이 정신적 고통을 받는 것처럼 보이는 사진은 별로 없다'라는 말에 전적으로 동의가 되었다.


아버스가 괴짜에 관심을 보인 이유는 자신의 순진함을 깨버리고, 뭔가 특권을 누린다는 기분을 없애고, 편안히 지낸다는 것에 불만을 터뜨리고 싶은 욕망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아버스는 유복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서 불행을 전혀 느껴보질 못한 것에 마음 아파했다. 그리고 불행에서 완전히 면제되어 있는 기분은 고통스럽다고 말한다.


이상하게 느껴졌다. 왜 이런 동기를 가진 사람의 사진에 찍힌 사람들이 불행해 보이지 않을까.

그건 아마도 아버스가 그 사람들을 불행하게 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온갖 괴짜, 광인, 교외의 부부, 나체주의자 등 모든 사람들을 동일하게 대한 듯하다. 어쩌면 불행에서 면제되어 고통스럽다던

 아버스는 사진을 찍는 사람들과 일정한 거리를 두었던 것 같다. 오로지 관찰자 시점으로 말이다.


아버스의 사진은 마치 여행을 하는 느낌을 준다.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나라를 여행자 시점으로 쓴 일기 같았다.

그런 태도가 피사체인 인물들과 자신을 동일시하지 않게 만들어줬고 모든 사람을 동등하게 바라보는 시각을 만들어 준 것 같다. 그래서인지 아버스의 사진 속에선 인물들의 불행이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아버스는 휘트먼의 휴머니즘 관점을 현실적으로 실천한 사람이라는 생각까지 들게 만든다.

상의한 것들 간의 동질성을 보여주는 휘트먼의 사상은 실행 가능 여부조차 의심스러운 반면 아버스는 적어도 사람만큼은 동일하게 바라본 듯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켠에 의문이 생겼다.

한 명의 사람으로써 아버스에게 사진은 무엇이었을까?

그녀의 자살로 인해 남은 사람들로부터 관음증 환자가 아닌 예술가로서 신격화가 되었다지만 그게 무슨 소용이랴. 이미 자신은 세상을 떠나고 없는데 말이다.


그녀 자신은 살아 평생 행복했을까.

사진을 찍는 행위가 혼란의 탈출구가 되었다면 어땠을까.

아니면 자살하기 직전까지 혼란의 탈출구를 찾아 헤매었던 건 아닐까.

한 사람으로서 바라본 아버스는 내게 측은하게 느껴졌다.


사진작가로서의 아버스와 한 개인으로서 그녀는 내게 많은 질문을 던져줬고 

나는 나의 삶을 통해 그것에 대한 해답을 찾아보려한다.



다이안 아버스 : 장난감 수류탄을 손에 쥐고 있는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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