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 영화 중에 전고운 감독의 소공녀가 있다. 취향을 위해 집을 버린 주인공 '미소'의 이야기. 처음 이 영화를 보고 자신의 취향유지를 위해 과감히 집을 포기한 미소와 집이 있음에도 전혀 행복해 보이지 않는 각각의 친구들의 모습을 곱씹고 또 곱씹었다.
지금 당장 편히 발 뻗고 누울 집이 없는데 불쌍하기는커녕 좋아하는 술과 담배를 즐기며 사는 미소가 너무 부러웠다.
그리고 나는 아직 모든 것의 우선순위에 놓을 만큼 사랑하는 취향을 찾지 못했다.
어릴 땐 아이돌 덕질에 미쳤었다. 그러다 배우, 가수, 모델 등등 뭔가 하나에 꽂히면 하루종일 그 사람들 자료를 찾아다니며 질릴 때까지 찬양했다. 끝을 보고 남은 건 그들의 가장 예쁠 때의 얼굴로 내가 만든 움짤들뿐. 아직 내가 만든 누군가의 움짤이 텀블러 사이트 어딘가에서 좋아요를 받고 있을 것이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내 덕질대상은 더 포괄적으로 변해갔다. 홍대에서 밴드들의 공연을 보는데 미쳐 매주 금요일 퇴근 후 홍대로 출근해 토요일 아침에 첫차를 타고 집에 갔다. 어느 한 밴드를 좋아한 것도 아니고 그냥 공연을 보는 게 좋았다. 술 한 방울 안 마신 채 밤새도록 밴드의 노래를 들으며 춤을 췄다.
뮤지컬과 연극 보는데 빠져서 3년을 대학로 지박령으로 산 건 내 덕질인생 최고의 업적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나는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일본에 거주 중이고! 연극을 보러 다닐 때도 물론 일본에서 살고 있었으며! 직장생활 중이었고! 그럼에도 매달 주말을 껴서 두세 번씩 비행기를 타고! 한국에 가서 극을 보고 일본으로 돌아왔다! 물론 다음날 출근을 했다!
아직 난 문득 떠오르는 그때의 기억으로 하루를 날 때도 있다. 얼마나 온 영혼을 바쳤는지 그때로 다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도 없다. 이 모든 게 어릴 때였으니 가능했지. 지금은 그 정도 열정으로 뭔갈 미친 듯이 사랑할 자신이 없다. 난 불탔고 몸에 화상처럼 그때의 기억들이 남았다.
이제 나는 뭘 해야 할까.
내가 요즘 그리운 건 뭔가에 미쳐 날뛰던 그 순간이다. 후회 없이 달려들었고 돈과 시간을 쏟으며 열광했다. 성취감과 감동을 느끼며 울고 웃었다. 심장이 뛰는 게 뭔지, 살아있는 게 뭔지 알 수 있었다. 참 행복했다.
그때만큼의 행복을 내가 다시 느낄 수 없을까 봐 무서워질 때가 있다. 그때만큼은 아니더라도 일상을 살다 쉴 수 있는 구간을 만들고 싶은데 영 새로운 대상이 나타나주질 않는다. 이제 인생을 걸어도 되겠다 싶을 만큼 광적으로 덕질을 하는 대상이 아니라도 소공녀의 미소처럼, 담배나 술 한잔의 여유처럼. 나를 나로서 느끼게 해주는 걸 찾기 위해 소소하게 분투 중이다. 조급하진 않다. 지금 나는 다른 걸로도 조급함을 느낄 일이 많기에 여러 가지 깔짝여보다가 나는 이게 좋아요! 하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은 카테고리를 정하고 싶다.
인생은 취향을 찾아가는 여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