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다 한 작은 마을 이야기

by 조이스랑

사례. 못다 한 작은 마을 이야기


시례. 임파워먼트

마을활동가 임파워먼트는 실질적인 현장 개선

자, 마을활동가는 사람을 많이 만난다. 마을활동가가 마을에서 만나는 사람 간식, 누가 내야 할까? 마을이? 아니면 보조금으로? 아니면 활동가가? 공식적으로 식대나 간식비나 그런 거 없다. 공용공간도 없는 마을이라 개인 집에서 만난다면? 한두 번이면 괜찮은데 한 달 수십 건이면? 우리 집? 아니면 마을 카페? 깔끔하게 더치 페이? 솔직히 난 더치페이가 잘 안 되었다. 하지만 늘어나는 아이들 간식 쟁여놓기 힘든 것처럼 1년 해보고 나니 부담이었다. 그래서 회사에서 일할 때 1년 차 초기에 나는 업무추진비를 요청했다. 보통 부장이나 과장만 쓸 수 있는 업무추진비였는데, 사원이 요구하는 업무추진비라니! 그러나 내가 만나는 사람이 한 두 명이 아니라 매월 몇십 명인데 그걸 다 개인적으로 처리할 수는 없다는 걸 이전의 경험으로 충분히 알고 있었다. 여러 번의 요청 끝에 회사는 내 의견을 받아들여 마을활동가가 쓸 수 있는 업무추진비를 마련해 주었다. 내 개인카드를 먼저 쓰고 나중에 근거를 달아 요청하는 형식으로 최대 월 10만 원이었다. 마을강사, 마을 주민, 외부 네트워크로 만나는 사람... 나는 최대한 업무 추진비를 활용했다. 간식비가 없는 주민 모임에도 간식을 사들고 갈 수 있었고, 경로당에서 봉사하는 분에게 식사라도 같이 하자고 말할 수 있었다. 봉사 때문에 힘들어하거나 우울해하는 주민에게 차 한 잔 하자며 만나 담소할 시간도 살 수 있었다. 나 때문에 마을공동체 때문에 일이 늘어나 짜증이 올라온 관리소 직원이나 임대사업소 직원에게 커피도 쏠 수 있었다. 직원이 동원되어 마을 텃밭 모종을 인원별로 잘라야 하는 사전 작업이 있을 때! 나 혼자 수백 개의 모종, 30개의 포트에 담긴 여러 종류의 모종을 두 개 세 개 단위로 잘라서 준비할 수는 없었다. 텃밭 특강 때마다 직원이 함께 나와서 잘라주는 수고를 여러 번 해야 했다.

초기 내 업무추진비는 주로 마을 카페에서 열리는 특강 때 사용되었다. 봉사활동을 할 때, 마을 카페 수입을 올려줘야 할 때! 주민강사를 처음 만날 때, 경로당 어르신을 만날 때! 그래도 어떤 사람은 회사가 공동체를 지원하니 모든 간식은 다 대는 줄 아는 사람도 있었다. 이런 건 다 먹어줘야 한다면서 싸들고 가는 사람도 있었다. 업무추진비가 충분했냐고? 아니었다. 그러나 마음의 부담은 줄었다. 필요할 때 쓰는 카드, 요긴하다.

1년 차 때 공식적인 교통비를 지원받지 못했다. 1년이 지난 후 교통비를 지원해달라고 요청했다. 출장이 그렇게 많은데 다 내 사비로 처리하니 형평성에 어긋난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을 사람이랑 같이 다녀오면 밥까지 사야 하고 소액도 쌓이니 아쉬운 게 많았다. 마을공동체 활동을 하는데 관리소장은 외부로 나가면 무조건 출장비와 교통비를 지원받는다. 그런데 나는? 임대사업소에 마을활동가 출장비는 없었다. 사원이니까. 관리소장보다 내가 외부로 나가 네트워크 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데! 관리소 직원이 아니라 교통비 지원 안되고, 해줘도 5천 원이라고 했다. 화성이 워낙 넓고 대중교통으로 다니다가는 하루가 다 가는데... 교통편이 바로 안 이어지면 택시를 타야 하는 일이 많았다.

몇 번의 요청 끝에 회사가 수용했지만 역시 까다로운 절차가 남아있었다. 월 5만 원 내에서 쓰라는데, 일단 내 교통카드를 이용해서 쓰고 나중에 근거를 달아 청구하라고 했다. 나는 너무 바빠서.... 교통비 근거를 달아 청구할 짬이 나지 않았다. 시스템은 마련했는데 그냥, 내 돈 쓰고 말았다. 다만 시간이 늦어 택시를 타야 할 때는 청구를 했다. 어차피 근거를 달고 출장을 나가는 거니까.

부장이 말했다. 다른 사원은 요청하지 않는데, 왜 그렇게 마을활동가는 요청하는 게 많냐고! 내 별명은 야생마였다. 마을공동체만 바라보며 쭉 앞으로만 달리는 야생마. 필요하면 꼭 요청해서 만들어내니, 사실 첫 입사를 위한 미팅에서도 연봉을 인상했다. 그때 마을활동가 연봉은 이 정도면 된다고 제안한 곳이 광역단위의 중간조직 실무자였다는 걸 알고, 얼마나 실망하고 허탈했는 줄 모른다. 딱 그 수준이었다. 아무나 하는 마을활동가 급여 수준. 회사에서는 정말 이 만큼만 받아도 되는 거냐며 미안해 한 수준이었다.

"원하는 실적은 제가 다 마을활동 초기에 만들어 낼 수 있는데요! 확실한 실적이 필요한 것 아닌가요?"

연봉을 인상하는 데 성공했지만, 아쉬움이 많았다. 회사 연봉 인상이 매해 실적에 따라 올라가는 줄 아니었는데 아니었다. 연봉 인상률이 너무 낮았다. 한국 회사 현실을 몰라서 벌어진 내 실수였다.

대학을 막 졸업하고 외국계 회사에서 일할 때였다. IMF로 일부 직원은 재계약을 하지 못하고 퇴사를 해야 했지만 나는 아니었다. 홍보 실적을 만들어 내는 데 성공해서 다른 회사 상사보다 높게 연봉을 인상을 하는 데 성공한 적이 있었다. 상사의 연봉은 깎였지만 나는 올랐다. 그래서 실적만 잘 내면 매년 회사 연봉을 쉽게 인상시킬 줄 알았던 것이었다. 한국의 비정규직 연봉 시스템을 잘 몰라서 일 수 있고, 마을 일은 열심히 하나 요청하는 일이 많은 까다로운 직원이기 때문일 수도 있다. 마을 사람들과는 너무 잘 지냈지만, 까다로운 내 상사에겐 정말 특이한 직원이었을 것이다. 회사 직원이라면 당연히 눈치를 볼 텐데 전혀 그런 건 없고, 하고 싶은 일은 기어이 다 하려고 아등바등하며 마을공동체로 달려가는 야생마가 맞았다.

유급 마을활동가 사례는 나 밖에 없으니 내 후임자까지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먼저 일했던 사람이 고생해서 닦아 놓은 길을 후임자가 쉽게 누릴 수 있기를 바랐다. 내가 만들어놓은 합리적인 사례를 최대한 활용하기를. 1년 차가 지난 후 마을공동체 물품구입비, 업무추진비, 교통비, 교육비! 를 만들어 내는 데 성공했다. 교육비는 1년 한도에서 열 개까지 교육을 받을 수 있었고 회사에서 정규직원이 받는 교육 혜택을 받았다. 나는 열 가지 교육을 다 받고, 초과 교육까지 받아 급여에서 삭감되기도 했다. 이런 처우가 특별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일반 회사에서는 물어볼 것도 없는 당연한 운영비이고 중간지원조직이더라도 어쩌다 공무원이 된 마을활동가도 다 받는 처우 아닌가. 중간조직기관에서는 가장 밑바닥에서 일하는 마을활동가에게 하다 못해 최소한의 처우라도 생각해주었으면 좋겠다. 회의비 없는 회의에 의무 참석하라거나 의무교육, 포럼, 행사 참여하라고 하는데, 사명감이 언제까지나 무한대로 폭포수처럼 생기지는 않는다.


너무 늦었어도 필요한 임파워먼트

동탄의 다른 마을활동가가 이제 그만 활동을 접을 것이라는 예측이 되었다. 혜성같이 나타나 엄청난 에너지로 일하면서 실적을 많이 만들어낸 멋진 활동가였는데 지쳤다는 게 한눈에 보였다. 그 활동가의 심정을 나도 알았다. 안타까웠다. 마을지원센터는 파악하지 못하는지 아니면 알아도 어쩔 수 없는지 그냥 시간만 흘러갔다.

아, 저러다 그만둘 텐데... 안타까웠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었지만 내가 동기부여받았던 개인 경험을 활용했다.

나는 이 두 마을활동가를 내가 일하는 마을로 불렀다. 강사로 초빙했다. 마을공동체 수업도 열고 강사비도 받을 수 있도록! 그가 관심 있는 취미를 엮어 마을공동체 기초교육과 특강을 한 번에 할 수 있도록 특강을 구조화했다. 소액이더라도 자기 마을에서는 돈을 벌 수 없지만, 다른 마을에서는 가능하니까. 다행히 주민들이 좋아하는 인기 강좌와 마을공동체 특강을 엮어 두 시간짜리 수업으로 만들었다. 활동가의 마을활동 사례만 수업을 열면 인기가 없을 테니, 활동가 취미와 기초교육을 엮는 방식으로 진행했다. 그렇게 강사로 왔던 동탄의 다른 마을활동가가 내게 말했다. 3년 동안 일했는데, 돈 벌고 일한 건 내가 제공한 마을 강의가 처음이었다고! 집에서 딸이 말하더란다. "엄마, 이젠 엄마도 이런 강의 하면서 돈 벌면 안 돼?"

나도 일할 능력이 없어서 마을에 있었던 게 아니었다. 돈을 받고 제대로 경력을 쌓으려면 적어도 어디로 가야 하는지 충분히 알고 있었다. 다만 의도적으로 내 마을 밖으로 일자리를 찾아 떠날 수 없었다. 프로젝트 책임감이 너무 많았고 개인 사정으로 마을 밖으로 나갈 수도 없었다. 한창 일할 시기에 육아 때문에 울면서 직장을 그만두었는데, 마을활동 때문에 돈은커녕 육아도 제대로 못하는 상황이었으니 얼마나 답답했겠는가. 동탄의 두 마을활동가, 그들이 마을에서 보여준 활동을 보면, 직장에서 일했다면 얼마나 성과가 있었을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힘에 부치도록 일을 하던 3년 차 때인가 였다. 가끔 경기도의 다른 지자체에서 내 마을의 활동 사례를 특강으로 해 달라는 요청이 오면 기분이 좋았다. 내가 왜 인건비도 없이 이런 일을 해야 하나 마음이 힘들 때, 갑자기 하루 일당 70만 원짜리 강사 일자리가 들어왔다. 내 경력 통틀어 최고 수준이었다. 경기도의 한 지자체에서 늦게 사업을 시작했던 터라 연말이 되니, 비용이 남아서 집행 가능한 강사비였다. 마치 내 힘든 마음을 이해한다고 시기적절하게 약속이나 한 것처럼 연달아 실무자 대상의 강의로 40만 원 강사 일자리가 또 들어왔다. 마을에서는 한 푼도 안 주는데.... 마음이 풀렸다. 강사비도 좋았지만 그런 자리는 소명감으로 시작한 활동이라 마을활동가로서 내가 얼마나 가치 있는 존재인지 보람을 갖도록 그 효용성을 올려주었다. 내가 매일 살아가는 우리 마을이 절대 줄 수 없는 뿌듯함이었다. 왜냐하면 현장에서 일하는 활동가의 경험이 담긴 노하우여서, 이제 막 일을 시작할 실무자들에게 가장 현실적인 이야기로 들렸기 때문이었다. 앞서 강의를 했던 내용들이 뜬 구름 잡는 것처럼 마음에 다가오지 않았는데, "아, 이렇게 일하면 되는구나." 한눈에 파악할 수 있어서였다. 내 강의를 들은 그분들이 막 그런 이야기를 현장에서 쏟아낼 때 속된 말로 정말 째지는 기분이었다. 날아갈 것 같았다.

그래서 나도 동탄의 지친 마을활동가에게 "당신이 한 일은 정말 놀라워요. 대단했어요." 뿌듯함을 느낄 기회를 주고 싶었다. 다행이었다. 내가 그런 자리를 만들어 줄 수 있어서! 하지만 이미 떠난 마음을 계속 붙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들이 마을에서 봉사하며 겪었던 일 중 일부는 마을활동가로서 봉사의 역치를 넘어섰다는 걸 나도 알았다. 합리적이지 않았다. 예측대로 두 명의 활동가는 마을공동체 활동을 그만두었다. 한 명은 집으로, 다른 한 명은 마을 경험을 살려 더 나은 조직으로 이동했다.


지친 봉사자와 마을강사에게 임파워먼트

활동가는 아니지만 마을에서 지치기 쉬운 또 다른 사람은 봉사자이다. 특히 리더가 아닌데 갑자기 리더 수준으로 봉사하는 일반 봉사자이다. 마을공동체가 뭔가 궁금해서 아이가 잠깐 어린이집이나 학교에 간 사이 나왔는데, 기대보다 너무 좋았다. 그래서 친해졌고 위원회도 했는데.... 이제 봉사 일거리가 막 생긴다. 몇 개월 만에 일반 봉사자 역치 수준으로 활동을 요구받는다. 초창기라 마을공동체 위원회 소집이 많았다. 한 달에 두 번을 넘어설 때 나는 막 가슴이 두근거렸다. 직장인이, 육아 때문에 마을에 있는 엄마가 저러다가는 다 그만둔다고 할 텐데.... 이미 겪은 일이라 걱정이었다. 이 마을의 특징이 젊은 세대였기 때문이다.

작은 마을이더라도 세대수가 충분하고 오래된 마을이면 손 큰 사람이 얼마든지 있다. 일명 얼굴마담도 있고 봉사 자처하며 입담 과시하는 어르신도 있다. 마을 일이라면 열심을 내는 전형적인 봉사형이 있다. 천 세대 중에 그런 사람 몇 명 없는 마을은 솔직히 드물다. 젊은 세대부터 어르신까지 골고루 있는 마을일 때 말이다. 하지만, 이 마을은 전형적인 젊은 세대가 특징이라 아이가 어렸다. 그런데 남편이 마을 회의한다고 나가서 저녁 늦게까지 안 오면, 남은 엄마 혼자 독박 육아다. 낮에도 혼자 육아였는데 밤에도? 좋아할 리 없다. 마을을 만길 이유가 없다. 그런데 저녁밥도 안 준다면? 컴플레인을 들을수록 남편은 갈등하기 마련이다.

반대로 남편이 회사에서 막 돌아와 쉬고 싶은데 아내가 공동체 활동하면서 늦게까지 나가서 안 돌아온다면? 남편이 공동체 활동을 반길까? 가족의 지지 없이 마을공동체 활동을 계속하기 어렵다. 우리 식구나 챙길 것이지 괜한 쓸데없는 일하라고 오히려 가족 갈등이 되기 쉽다. 협택 마을 젊은 세대와 일하며 활동 초기에 너무 많이 듣고 겪었던 일이다. 그때 잘 판단을 못해서 사람을 잃고 후회를 많이 했다. 아파트에서도 똑같은 실수를 저지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초기부터 빈도 높은 마을 회의를 안 하길 권한다. 그리고 회의가 있다면, 꼭 공금으로 식대를 제공해주길 바란다. 말로만 고맙다고 하지 말고, 제발 아이 엄마에게 식재료 사주면서 회의할 사람 대량 식사 만들게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차라리 마을 회의라는 명분으로 저녁 대용 샌드위치와 음료를 하든지, 아이 돌봄 해주면서 회의를 했으면 좋겠다. 회의 시간에 아이가 좋은 체험이라도 하면 그나마 이야기할 거리라도 있으니까. 불특정 다수를 위한 행사를 치르느라 봉사자로 고생만 하면, 불만이 켜켜이 쌓일 수 있다. 육아를 한창 해야 할 시기라서 그렇다. 나는 마을 활동에 참여하지 않는 엄마에게서 직접 "남편을 마을에 뺏겼다"는 얘기를 들었다. 마을활동에 관심 없는 아빠가 "집에서 아이나 돌보지 쓸데없이 싸돌아다닌다"는 얘기를 듣는다며 이제 마을 공동체 못한다고 말하는 엄마를 만났다. 심지어 다른 데로 이사 가야지 안 되겠다는 사람도 있었다. 혼자 독박 마을 일을 거들다 화가 나 이젠 안 한다고, 확실한 안티가 된 사람도 있었다. 다 초기 1년 차에서 2년 차에 겪은 일이다. 지나치게 봉사 역치를 넘어서면 곤란하다. 마을공동체는 자원봉사센터가 아니다. 마을 구성 세대수가 많고, 인생 경험 풍부한 큰 손 왕언니, 왕형님이 있다면, 그리고 그들이 마을에 나타나 알아서 봉사하고 있다면, 큰 소리도 있다는 거 안다. 하지만 분명 그 마을은 큰 행운을 얻은 것이다.

지치기 전에 임파워먼트를 할 계획을 세우고, 충분히 소통하면서 천천히 마을을 가도 괜찮다. 누군가에게 휘둘리지 말고, 아직 마을이 막 싹이 날 때라면 햇빛과 물, 퇴비를 줘야 한다. 아이가 어리면 아이와 함께 할 수 있는 봉사자만 참여 가능한 특별한 마을활동을 기획하라.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보고, 아, 이건 봉사자만 참여하는 것이구나 알 수 있도록! 또 다른 마을과 네트워크를 하든지, 마을의 활동 중 일부 시간은 소액이라도 자신의 재능을 풀어쓰는 일을 하면서 활동비를 지급하는 시스템을 마련하면 좋다! 아, 봉사를 하다 보니 별 재주도 아닌데 이렇게 강사 하면서 '선생님' 소리 듣는 좋은 날도 오는구나! 마을이 참 좋구나! 공감하도록.

나는 그렇게 마을 엄마가 리본 공예 특강 강사로, 요리 수업 강사로 활동하도록 했고, 일부 주민은 다른 마을에서 강의를 할 수 있도록 네트워크 했다. 활동가가 이런 일까지 해야 한다고 하면 부담스러울 수 있다. 그래서 지원센터의 지원이 필요하다. 활동가의 추천으로 주민 봉사자가 성장해 다른 마을에서 인정받을 수 있는 시스템이 마련되기를 바란다.


차별 없고 차등 없는 마을 주민 강사

주민강사의 수업료는 얼마여야 하는가? 논란이 많을 것이다. 분명 어떤 사람은 탁월한 강사이고 마을 외부에서도 인정받는다. 반대로 강의한 적 없는데, 마을에서 한 번 강의를 해보고 싶은 이제 막 자격증을 따 검증되지 않은 사람도 주민강사가 되고 싶다. 강사료는 어떻게 해야 할까? 답은 없다. 강사와 충분한 면담을 하고 정해야 한다. 나는 작은 마을에서 차별 없이 주민강사 대우를 하고 싶었다. 당신은 1급 강사니까 시간당 최고 수준으로, 당신은 가방끈도 짧고 검증되지 않았으니 최하 수준도 아닌 자원봉사로! 이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모든 강사에게 일단 무료 특강을 마을에서 한 번 정도 해줄 수 있는지 현실적인 가능성을 물었다. 가능하다고 하면, 무료 특강을 먼저 열었다. 하지만 무료 특강이 싫다고 하면, 그 의견도 수용했다. 어떤 경로이든지 일단 마을에서 강의를 하면 시간당 모두에게 동일하게 지급했다. 보조금 지원사업이 아닌, 마을 자체 사업에서는 일괄 적용했다. 시간당 5만 원으로 동일하게 모든 강사에게 적용했다. 공동체성이 없는 평생학습 프로그램이면 모두 유료로, 주민 자부담으로 진행했다. 마을 사람들이 다 안다. 내가 돈을 내고 들을 만한지 아닌지, 참가자 수준에 따라 반응이 다르다. 수준이 너무 높아도 안 되는 수업이 있고 너무 낮아도 어렵다. 어떤 수업은 동일 시간에 주민 맞춤형 수업이 되기도 했다. 능력 많은 강사가 고생이다. 나는 그런 강사를 마을 외부로 소개했다. 다른 마을에서 좋은 강사로 수입을 올릴 수 있도록. 다른 프로젝트에서 충분히 강사료를 받도록. 형평성을 따져가며 조정했다. 강사 수준이 주민 눈높이에 맞지 않으면 어쩔 수 없다. 모집이 안 되면 진행할 수 없다. 원어민 영어회화, 수준은 너무 높은데... 주민이 못 따라갔다. 섭섭하지만 어쩔 수 없이 몇 개월 하다가 모집이 안 되어 진행을 할 수 없었다.

마을에 마을공동체 사업비로 강사비가 잡혀 있을 경우, 주민 부담이 너무 높다 싶은 강의는 강사비를 일부 보조해 수강료를 낮췄다. 주민 50%와 마을 50%, 혹은 주민 20%와 마을 80%. 강의에 따라 수강자에 따라 조정했다. 무조건 무료나 무조건 유료가 아니라 최대한 마을의 지속성을 내다보고 정했다. 항상 확실한 기준이 있었기 때문에 누가 왜 이건 무료이고 왜 유료인가라고 물으면, 대답도 분명하게 할 수 있었다.

고생길을 자처한 마을활동가였다. 손쉽게 실적 내는 방법은 다 알았다. 그런데 태생적으로 나는 그런 성향이 없었다. 공부는 최소로 하면서 인기 교수를 찾아 손쉽게 A를 받으려는 게 아니라 어렵지만 확실하게 가르치는 교수 과목을 들어서 기필코 A+를 받으려는 학생처럼 일했다. 18학점만 들으면 되는데 기어이 23학점 곽 채우는 학생말이다. 그렇게 해서 최대한 좋은 사례, 지속 가능한 마을공동체 활동의 모범 사례를 만들어 내고 싶었다.


행사 후 평가를 통한 실질적 개선

사례. 연차별 마을음악회 성장 과정

1년 차 첫 번째 마을음악회 특징

고생 끝에 열었던 1년 차 마을음악회는 보람이 많았다. 일단 참가자들을 보니 피아니스트가 로망이었던 아빠가 있었다. 그 아빠는 평범한 회사원인데 음대 진학에 실패한 화려한 이력이 있었다. 이 음악회 이후 마을에서 이 아빠는 행사 때마다 멋진 피아노 실력으로 우리를 감동시켰다. 아이가 아빠를 자랑했다. 가끔 아빠가 사정이 있어 연주하지 못할 때는 "이럴 때는 우리 아빠가 있어야 하는데..." 그렇게 말해 웃음을 자아냈다.

이런저런 악기를 다 다루는 아빠도 있었다. 알고 보니 대학교수였다. 음악 대학 교수는 아니었지만, 음악을 좋아하니 음대 교수들을 많이 알고 있었다. 음악을 좋아하는 이 아빠 덕택에 음대교수팀을 활용해 마을에서 고습스러운 '해설 있는 음악회'를 성황리에 열 수 있었다. 해설음악회를 보려는 마을 사람이 많아 큰 교회를 빌려야 할 정도였다. 해설 있는 음악회 도중 마을의 왕초보 수준의 아이가 음대 기악과 교수님과 바이올린 협주할 기회를 만들었다. 모차르트를 주제로 반짝반짝 작은 별을 합주했다. 평범한 옆집 형이 저렇게 멋있다니! 아이들이 감동해 마을에 어린이 바이올린, 플루트, 클라리넷, 첼로 수업이 만들어지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얼마 후 어른들 악기 수업이 생겼고, 3년 후 다 같이 마을 오케스트라로서 협주했다. 1년 차 마을음악회에 나타난 마을 아빠 덕분이었다.

또 다른 참가자가 있다. 1년 차 음악회 때 3개월밖에 안 배운 마을의 두 엄마가 우쿨렐레를 용감하게 연주할 때 우리는 엄청 웃었다. 우쿨렐레 악기가 엄청 쉽다는 걸 알았다. 그리고 곧장 "야, 우리도 저 쉬운 악기 한 번 배워볼까?" 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우쿨렐레 학습동아리는 음악회 최고의 성과였다. 첫 마을 행사 후 만들어진 우쿨렐레 동아리가 마을의 모든 일을 발 벗고 나서 주는 공동체 의식 가득한 동아리로 성장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이 팀을 계기로 마을에는 마을활동가를 공감해주는 TF팀 같은 마을팀이 필요하다는 걸 알았다. 이 엄마들이 없었으면 결코 그렇게 오래 마을공동체를 이끌어 갈 수 없었을 것이다. 우쿨렐레팀은 처음부터 항상 나와 같이 봉사했고, 5년 후 요양원 우수동아리가 되었다. 우쿨렐레 동아리가 완전히 성장하자 나는 보드게임 가족 봉사단을 새롭게 시작할 수 있었다.


2년 차 두 번째 마을음악회 특징

1년 차에는 그렇게 참가자 모집이 어려웠는데, 2년 차는 어렵지 않았다. 한 번 좋은 맛을 본 마을 사람들이 신청을 했기 때문이다. 아이들도 참가하고 어른들도 참가했다. 특징이 있었다면 마을 옆 중고등학교 아이들의 참가가 있었다. 예상되듯 아이들은 봉사 점수 때문에 온 아이들이었다. 우리 마을 아이도 있었지만, 전혀 모르는 아이도 있었다. 자기 순서만 마치고 다들 바로 현장을 떠났다. 심지어 어떤 아이는 세 곡 연주하는데 연주 시간에 스탠드 현수막을 설치하고, 마치 자신이 개인적으로 개최한 음악회 인양 연주를 했다. 아이들의 엄마가 상급학교 진학할 때 자기소개서에 한 줄이라도 넣으려는 게 훤히 보였다. 자리를 끝까지 지켜주는 매너까지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아이들은 모두 공부가 급했는지 바로 자리를 떴다. 같이 온 부모들도 마찬가지였다. 마을의 얌체라고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2년 차 때 성당에서 열린 음악회 행사 준비, 진행, 결과까지 맡은 마을의 아빠는 더 이상 이런 행사는 하고 싶지 않다고, 공동체도 아니라고 활동 중단을 선언했다. 누구만 일하는 꼴을 보고 싶지 않고, 욕하고 싶지도 않다고 했다. 젊은 세대이고 모두 육아하는 처지에 이건 공평하지도 합리적이지도 않다고 했다. 음향 장비는 행사 책임을 맡은 아빠가 지인을 통해 해결했는데, 알고 보니 이런 장비를 가진 연주자를 초청할 때는 대여비는 기본이었다. 그런데 우리 마을에서 지인이라는 이유로 대여비도 없었는데 연주도 안 들어주었다니 황당한 마을이었을 것이다. 다들 제 순서만 하고 가버렸으니까. 나는 행사를 챙긴 아빠가 지인에게 미안해서 호주머니를 털어 거나한 뒤풀이를 했을 거라는 걸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우리 마을 매너가 창피했을 것이다. 1년 차 때 우리 부부처럼 마음고생, 몸 고생 심했을 것이다.


3년 차 세 번째 마을음악회 특징

신청자가 줄을 이었다. 참가자 모집? 넘쳐났다. 일단 기한 내 신청자는 무조건 받아주었다. 마을 사람을 선착순으로 자르거나 연주 수준으로 거절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신청을 받고 보니 참가자만 70명이 넘었다. 음악회 연주자로 참가인원만 따져보면 1년 차에 10명도 안되었는데 3년 차에 70명이 넘었으니 폭풍 성장이었다. 이번에는 마을 놀이터에서 열었다. 이전 음악회 어려움을 대폭 반영했다. 참가자는 무조건 개인 순으로, 어린이가 팀이어도 순서는 마지막으로, 중고등학생으로 봉사점수를 요청하면, 음악회 이전 봉사활동 사전 교육을 받고, 활동 후에 서명을 해야 봉사시간이 인정되는 것으로 했다. 정교하게 순서를 정하고 미리 공지를 하고 나니, 역시 마을음악회가 끝날 때까지 대단한 매너를 보여주었다. 참가자가 많으니 같이 오는 가족까지 따져보면 300명이 넘었다. 놀이터가 몇 시간 내내 북적 북적댔다. 2년 차 때 삐졌던 마을 아빠가 나타나 이렇게 행사를 진행할 줄 몰랐다고 마음이 풀려 마을 음악회를 칭찬했다. 직접 말하는 그를 보고 우리는 감동했다. 현장에서 한글로 만들어진 리플릿을 보고 다음 행사 때는 자신이 리플릿을 만들겠다고 자청한 디자이너도 있었다. 다음 행사에 멋진 디자인의 리플릿이 선보였음은 물론이다.

음향 장비는 여전히 문제였다. 이번에는 상가 음악학원의 도움을 받았는데, 우리는 10만 원 주고 그에게 장비를 빌릴 수 있었다. 이번에는 그가 엄청난 고생을 했다. 다음부터는 다시는 못한다고 했다. 봉고차에 장비를 싣고 가져와 설치하고 해체하는 비용, 10만 원은 절대 그의 수고에 상응하는 합리적인 비용이 아니었다. 그의 봉사는 이번으로 끝! 그 후 나는 마을 행사 음향 장비는 공식적인 대여비를 산정해, 마음 상처 없이 진행했다. 어떤 때는 그랜드 피아노가 등장하기도 하는.... 모두 경험이 주는 교훈이었다. 모두 평가를 통해 실수를 개선하려는 노력 덕분이었다.


4차, 5차, 6차 음악회는 계속 이어졌다. 어떤 때는 한 여름밤에, 어떤 때는 뒷산 필봉산에서 필(Feel) 제대로 받는 음악회로 열었다. 리코더, 오카리나, 기타, 우쿨렐레 같이 뒷산에 들고 올라갈 수 있는 가벼운 악기 중심의 음악회, 등산 겸 운동하는 사람이 힐링하는 음악회였다. 약간 가파른 뒷산까지 김밥과 음료수를 들고 올라가는 걸 맡은 마을 아빠! 그는 너무 고생했다. 우리는 알았다. 아, 이런 김밥은 미리 나눠주거나 아예 행사 후 마을 아래에서 나눠줘야 한다는 것을! 산 허리 정자에서 다 같이 먹으려고 한 건데 총대 멘 아빠가 너무 고생 많았다. 장비 고생은 없었지만 점심 식사 고생이라니, 참 미안했다.

마을 인근 요양원에서 상가 음악학원과 협업해 기부 음악회도 열었다. 치매 어르신을 모셔놓고 우리 마을 아이들은 신나게 몸을 흔들며 춤을 선보였다. 어르신을 위해 우리는 곡을 선곡해야 했다. 연주하는 피아노 학원 아이들도 있었기 때문에 연주 참가자를 위해 또 곡을 골라야 했다. 그래서 1, 2부로 나눴다. 피아노 학원 아이들이 자기 순서를 하고 자리를 뜰 것이 예측되었기에.... 피아노 학원 아이들의 피아노 연주에 이어 마을에서 성장한 동아리팀이 연주했다. 바이올린 앙상블, 첼로 앙상블, 플루트 앙상블, 선생님들의 합주까지.... 어른들도 아이들도 고급스러운 클래식 연주를 마쳤다. 마을의 핵인싸, 우쿨렐레 팀은 트로트로 신나게 분위기를 바꿨다. 갑자기 뽕짝 무대, 어르신들이 박수를 치고 어떤 이는 나와서 몸을 흔들었다. 몇 년간 한 달 한 번 봉사하며 들려드렸던 레퍼토리의 총집합이었다. 어떤 음악을 좋아하시는지 우리는 다 알고 있었다. 기부금을 내고 진행한 음악회,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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