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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스랑 Nov 04. 2021

나는 뜻밖에 배웠다

“귤차와 생강차, 함께 만들 분 계실까요?”

8년 전 11월 이맘때쯤이었다. 새로 이사 온 마을에서 동네 사람들과 친해질 겸 우리 집에 초대하는 글을 마을 카페에 올렸다. 복잡한 요리는 하지도 못하지만 마을에는 커뮤니티 공간이 없었다. 아이들 공부 책상 몇 개를 쭉 이어 붙이고 귤과 생강을 썰어 설탕만 넣으면 되는 건강차 만들기가 딱 좋았다. 이웃과 그렇게 친목 도모 활동을 시작했다. 이 작은 모임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크리스마스에는 아이들과 캐럴을 부르며 선물 교환하기를 했다. 동네 아이들은 새해가 되자 세뱃돈 천 원에 단체 세배를 하러 다녔다. 방학이니 미니 버스를 대절해 박물관 견학도 갔다.  

살다 보면 의도치 않은 일이 일어난다. 우리 마을도 마찬가지였다. 아이 친구 만들어 주려다 어른들이 친해지니 어른 학습동아리가 생겼다. 가족 댄스 스포츠, 가족 생태학교에서 엄마들 우쿨렐레 모임, 에너지 모임, 책 읽어주는 모임 등 가지 수가 늘었다. 우리끼리 재밌게 동네 모임을 여러 가지 했을 뿐이었는데, 갑자기 평생학습 마을공동체 프로젝트라는 보조금 사업이 우리 마을로 뚝 떨어졌다. 학습 코디네이터가 필요하다고 해서 딱 1년만 하면 되는 줄 알고 봉사 차원에서 내가 맡았다. 1년이 지나자 연차사업이라 몇 년 더 학습 마을을 운영할 수 있다고 해서 다시 2년, 3년... 연장되었다.

프로젝트를 관리하면서 출석을 체크하고 사진만 찍고 갈 수는 없었다. 너무 정이 없어 보였다. 하는 수 없이 마을 사람들과 어울리려고 모든 활동을 함께 했다. 강사 양성과정을 운영하니 우쿨렐레 자격증, 독서논술 자격증이 따라왔다. 작은 학습모임부터 마을축제와 음악회, 성과공유회 같은 큰 행사를 치르다 보니 학습마을 운영 노하우가 자연적으로 생길 수밖에 없었다. 프로젝트 담당 학습 코디네이터가 흔히 말하는 “이럴 줄 알았으면 시작도 안 했을 걸”이라고 말하는 심정을 나도 안다. 스트레스가 많았다. 노래방 세대라 스트레스 푸는 데는 노래가 최고 일 것 같았다. 월요일 밤이 되면 서울로 노래를 배우러 갔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몸이 아프나 한 번도 빠지지 않고 그렇게 4년을 배웠더니 이탈리아 가곡과 아리아 몇 곡은 외워서 부를 수 있게 되었다. 학습마을 4년 차가 지나 5년 차에 접어들 때 나는 내 마을을 다른 코디네이터에게 일임하고 다른 마을로 갔다. 새 입주 아파트에서 마을공동체 활동을 운영하는 마을활동가가 되었다. 이번에는 소정의 활동비가 아닌 제대로 급여를 받는 마을활동가가 되었다. 회사 직원이 되어 새로운 사람들과 친해지려고 온갖 프로그램을 짰다. 마을에는 디자인과 미술을 좋아하는 이가 많았다. 사진만 찍고 사무실로 사라질 수는 없어 학습하는 자리를 지켰더니 수채화 미술, 프랑스 자수, 캘리그래피, 풍선아트, 핸드드립을 배울 수밖에 없었다. 학교를 졸업한 후 20년 동안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활동이었다. 집에 돌아와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새벽까지 눈이 빠지도록 수를 놓았다. 먹물을 찍어 수십 장씩 손글씨를 연습했다. 

어느 날 마을 사람들이 커피를 배우고 싶다고 했다. 자격증 과정으로 핸드드립 1기를 운영하고 2기를 운영하려 했더니 수강생이 모자랐다. 머릿수를 채워야 개설이 되니 어쩔 수 없이 내 돈 내고 수업에 참여했다. 내게 있어 커피는 쓰기만 한 물이었다. 돈까지 주고 마시는 게 이상할 뿐이었다. 그런 내가 핸드드립 자격증 시험에 통과해야 하니 별 뾰족한 수가 없었다. 매일 밤 집에 돌아와 새벽까지 연습을 거듭 반복했다. 회사 직원과 마을 사람에게 커피를 나눠주다 나까지 홀짝홀짝 마셨다. 술만 중독되는 게 아니다. 카페인도 한 모금이 두 모금되고 한 잔이 두 잔 된다. 홀짝홀짝 쓴 커피를 마시며 작은 마을의 학습 코디네이터 일을 계속했다. 

지독하게 쓰기만 했던 커피가 아침을 깨우는 단물이 될 무렵 글을 쓰기 시작했다.  온갖 민원을 처리하며 학습 코디네이터로 8년 이상 고생하고 나니 책 한 권이 저절로 써졌다. 나다운 삶을 위한 평생학습 마을공동체, 학습 코디네이터로서 마을에서 뜻밖에 배웠던 일은 이 책에 깨알같이 담겨있다. 이제 막 학습 코디네이터 일을 시작한 누군가에게 마을 프로젝트는 쓰기만 한 커피 물 같을 수 있다. 그런 힘든 일도 노하우가 생겨 신나게 일하는 시기가 온다는 걸 말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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