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댁에서 추석 명절 보내기
명절이라 서울로 떠날 채비를 했다. 친정 엄마가 보내주신 흑임자, 찹쌀가루, 참기름 한 병을 가방에 담았다. 크고 못생겨서 좋아하실지 잘 모르지만 맛이라도 보면 좋을 꿀고구마도 챙겼다. 엄마가 여러 번 전화를 걸어 어머니께 갖다 드리라고 신신당부한 시골표 먹을거리다.
“별거 아녀도 너희 시어머니한테는 좋은 거야. 마음이 선하고 남 챙겨주느라 돈은 못 모았겠지만 그래도 진짜 배기니까 꼭 챙겨드려라.”
남편은 아이가 좋아하는 지하철을 타고 한강으로 향했다. 여의도 한강에서 편의점표 라면을 먹을 거란다. 달걀도 꼭 넣어서. 한강에서 라면 먹을 날만을 기다리며 정이는 여러 번이나 집에서 라면 먹는 걸 참았다. 오늘 그 참은 보람을 한껏 느낄 시간이다.
딸과 나는 시댁으로 향했다. 안 가겠다는 걸 간신히 꼬드겼다. 용돈이라도 생길지 모르니 가자고 했다.
“네가 안 가면 할머니께서 다음 주에 내려오실 거야. 아빠랑 정이, 엄마 통영 갈 때 너만 집에 있으면 안 되잖아. 미성년자 혼자 집에 있을 순 없어.”
자기 혼자 룰루랄라 집에서 해방감에 맘껏 놀려했나 보다. 이번에 서울 안 가면 다음 주 할머니께서 내려오신다는 말에 아이는 조건부로 마음을 바꿨다. 당일치기로 다녀오고 엄마가 가면 가겠다고. 헐. 이번 명절에 꼭 1인 1책 쓰기 원고 작업을 마무리하려 했더니만 힘들겠다. 백신을 안 맞았다고 핑계까지 대며 못 간다고 했는데 말이다.
자식이라는 게 이런 명절에도 찾지 않으면 얼마나 섭섭하고 쓸쓸할까 싶다. 어차피 형님네 가족은 이번 추석에도 오지 않을 텐데. 수년 째 우리 가족만 만나는 명절이다. 당일치기라도 다녀오는 게 좋겠다 싶고 기왕이면 조금이라도 일찍 가서 뭐라도 하는 게 낫다 싶다. 한식조리를 배웠더니 도와드릴 용기가 난다.
몇 번을 서울에 갔어도 정이랑 다닐 때는 교통편이며 아파트 위치며 내가 동선을 확인한 적이 없다. 멍을 때려도 아이만 따라가면 다 해결이 되었으니까. 아이가 내비게이션이었다. 그러다 나 혼자 시댁을 찾아가는 길이면 단지 지하에서 몇 번을 헤맸었다. 작은 임대아파트라 단지에 아파트 동도 딱 하나뿐인데 출입구가 세 군데로 갈라져 독립되어 있다는 걸 몰랐던 탓이다. 이번에는 딸과 간다.
“너 할머니 서울 집 찾을 수 있겠어?”
“그걸 몰라?”
딸만 믿고 따라나섰는데 역시 딸도 헷갈리나 보다. 할머니 집에 몇 번밖에 오지 않았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나처럼 동생만 의지했을 거다. 지하에서 또 헤맬까 봐 이번에는 지상으로 갔다. 정확한 위치를 모르니 엉뚱한 곳에서 뱅뱅 돌기만 했다. 단지를 돌다 보니 베란다에 태양광을 설치한 집이 꽤 많다. 전기세 절약에 도움을 주기 위한 서울시 프로젝트였나 보다. 전화를 드릴까 하다 시댁도 못 찾는 한심한 며느리가 되고 싶지 않아 그만두고 단지에서 만난 사람에게 물었다. 그도 자기 사는 곳만 아는지 속 시원하게 대답을 못해준다.
“몇 번 더 돌면 나오겠지.”
“엄마 이쪽이 맞는 것 같아. 여 봐. 여긴 것 같아. 맞지?”
그간 나는 못난 며느리였다. 그 못났다는 말도 내가 스스로 규정한 거다. 집안 살림 못한다는 자격지심을 갖고 있었다.
어머니를 뵙자 깜짝 놀랐다. 지난 6월엔가 뵈었는데 몇 개월 새 반쪽이 되셨다. 키도 확 줄어들어 웬일인가 싶어 어디 아프셨냐고 여쭸더니 허리며 어깨며 관절마다 안 아픈 데가 없어 힘드셨단다. 매미소리가 너무 시끄럽고 귀뚜라미 소리까지 더해 밤잠을 못 주무셨단다.
“아니, 관리소에 민원을 넣으시지 그랬어요?”
“이번 여름처럼 매미가 시끄럽게 운 것도 처음이래. 매미를 잡을 수도 없고 어쩌겠니. 그래서 베란다에 에프킬라라도 뿌렸더니 그나마 낫더라.”
“화초가 많이 죽었네요.”
“그래 화초가 잘 안 되더라. 자꾸 죽어 나가.”
“햇볕이 안 들어서 그런 것 같아요.”
어머니 댁은 1층이고 그늘진 곳이라 태양광이 없다. 있었어도 별 소용이 없었을 거다. 임대라도 자리가 좋았으면 괜찮았을 텐데 아쉽다. 중층 이상이었으면 해가 들고 바람도 불어 더 좋았을 텐데... 앞에 떡 하니 암벽이 가로막고 있어 사철 해가 잘 들어오지 않는다. 또 음식물 쓰레기가 옆이라 베란다를 열면 역한 냄새가 들어올 때도 많다.
어머니는 재개발지역에서 임차인으로 오래 살았다. 빌라를 벗어나 임대아파트에 사는 것이 평생소원이었던 어머니. 그만큼 오래 다녔던 교회를 떠나고 싶어 하지 않으셨다. 임대아파트라도 단지도 더 크고 작은 도서관이나 경로당이라도 있는 새 아파트에 들어가셨으면 좋았으련만. 어머니는 재개발 지역 코앞에 누가 이사 나간 임대아파트에 어찌어찌 들어올 수 있었다. 재개발 지역을 벗어나지 않아 공사가 시작되면 이제 다시 사시사철 공사 소음과 먼지를 감수하셔야 한다. 어머니께 신앙이란 뭘까 싶다. 이런 내 마음을 눈치챈 건지 아니면 밥상 위에 펼쳐진 성경책 때문인지 딸이 입방정이다.
“엄마 교회 안 나간 지 1년 넘었어요. 제가 제일 먼저 안 나가기 시작했고요.”
지난 초여름 뵈었을 때 당부하셨었다.
“예배는 어떻게 드리니? 코로나라 잘 못 나가지? 여기는 온라인 예배가 안 되는 노인들만 자리를 지키는 중이야. 그래도 신앙생활 제대로 하도록 아이들 잘 챙겨라.”
그때 나는 교회에 안 나간다는 말씀을 차마 드릴 수 없었다. 코로나 핑계도 있지만 코로나가 아니었어도 자식 생각에 쓸쓸하실 거다. 자식도 손주도 잘 찾아뵙지 않는데 신앙 걱정까지 더하는 건 아니다 싶다. 자식보다 효자 노릇은 정이가 혼자 다했다. 할머니를 너무 좋아해 집으로 돌아오는 길, 할머니와 헤어질 때면 마치 시집가는 딸처럼 그렇게 전날 밤부터 우는 아이였다. 어머니의 생활에서 신앙공동체라도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그런 어머니께 며느리로서 신앙의 근심을 드리고 싶진 않았다. 한 때 나는 어머니의 신앙생활이 왜 그것밖에 되지 않느냐고 새벽기도도 하지 않는 권사님이 어딨냐고 따지지 않았는가 말이다.
신앙 이야기가 길어지지 않아 다행이라 하던 차에 딸 아이 먹으라고 점심상에 올라온 김이 참 맛나 보인다.
“딱 얘들이 좋아하는 스타일의 포장 김이네요.” 했더니, 선물 받으신 거란다.
“새벽기도 개근해서 받은 상품이야.”
그렇다. 어머니는 이번에도 새벽기도를 한 번도 안 빠지신 것이다. 그렇게 무릎, 발목, 허리, 어깨, 손가락 마디마디 다 휘어지고 튀어나와 안 아픈 관절이 없다고 하시면서도 그 새벽에 언덕길을 오르락내리락하셨던 것이다. 재개발한다며 다 무너진 허르스름한 동네를 지나, 언덕배기에 자리 잡아 우뚝 솟은 교회를 새벽마다 어떻게 다녔을까.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고통이고 기도였을 것이다.
어머니와 나는 옛날과 입장이 완전히 바뀌었다. 코로나와 함께 괜찮아 보였던 내 신앙은 엇나갔다. 주일성수도 하지 않는 반항아가 되었다. ‘한국 교회만 떠났을 뿐 하나님을 떠난 게 아니에요.’ 나오려는 입을 틀어막았다. 딸아이 앞에서 안 좋은 신앙인의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 그런 계산 같은 건 하지 않았다. 어머니와 신앙 논쟁을 하고 싶지 않아서. 별것도 아닌 내 신앙을 우호적으로 합리화하고 싶지 않아서. 어쩌다 만났는데 근심을 끼치는 불필요한 얘기는 안 하는 게 나은 것 같아서. 저절로 입이 닫혔다.
지금 교회에 가지 않는 것이 딱히 부끄럽지는 않다. 교회에 나가지 않는데도 죄책감 같은 건 없다. 코로나 이전에는 하루만 교회에 빠져도, 아니 오전 예배만 드리고, 오후 예배를 드리지 않으면 어쩌면 그렇게 죄책감이 밀려오는지 마음이 무거웠다. 맘에도 없는 오후 예배를 드려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정성도 없이 예배는 뭐 하러 드리는가 싶어서 힘들었다. 오전 예배가 쏙쏙 귀담아 들어오지 않아도 불편한 마음은 마찬가지였다.
‘왜 나는 감명을 받지 못하나.’ 혼자 그렇게 고민일 수가 없었다. 누구한테 털어놓지도 못하고 얼마나 자주 불편한 마음으로 집에 돌아왔던가. 성도가 이렇게 성령의 감동도 없이 예배를 드리면 되겠나 싶었다. 목사님께서 설교 준비를 충분히 안 해서 그런가. 예배를 위한 중보 기도자가 없어서 그런가. 그런 별 도움도 안 되는 생각을 참 많이도 했다. 이제 교회에 나가지 않으니, 그런 시답잖은 생각에 감정 낭비, 에너지 낭비, 시간 낭비를 하지 않아도 된다. ‘때가 되면 다시 나가겠지. 분명 그런 때가 다시 오겠지. 하나님과 화해하고, 한국 교회를 용서하고. 그땐 그냥 침묵하며 좋은 게 좋은 거지, 직분자가 무조건 최고, 직분자가 옳다면 옳은 거.’ 그러면서 웃는 낯으로만 교회를 다니지는 않을 것 같다. 다시는 안 그런 척 나를 속이고 싶지는 않아서.
아빠랑 한강 소풍을 다녀온 둘째 아이가 늦은 오후 어머니댁에 도착했다. 한강에 가고 싶다고 그렇게 졸랐는데 오늘 소원 풀이를 했으니 소감은 안 들어도 충분하다. 그 얼굴에 다 쓰여 있다. 피곤한 얼굴이지만 화색이다. 편의점마다 열 대 이상 갖추어진 라면 셀프 코너가 있었단다. 그늘에 앉아 선선한 강바람을 맞으며 아빠랑 라면을 먹었으니 그 자체로 좋았을 거다. 유람선은 타지 않았어도 별 상관없이 좋은 추억인 것이다.
“유람선까지 타지 그랬어?”
“유람선은 너무 비싸.”
“할머니도 가고 싶다. 다음에는 할머니랑 한강 가서 라면 먹자. 계란 꼭 넣어서.”
잘 다녀왔다며 좋은 추억 잘 쌓았다면서 맞장구를 쳐주신다.
“나는 여덟 살이 되기 전에 구경을 참 많이 다녔어. 신식 아버지 손 잡고 그렇게 좋은 데를 많이 봤는데 참 좋았지. 이제 다 지나간 일이지만, ‘우리 집에 금송아지 있어’ 하는 얘기 같지만 아버지랑 그렇게 다녔던 좋은 시절이 있었어.”
어머니의 단골 레퍼토리이다. 어릴 적 잘 살았던 이야기, 친절하고 자상했던 아버지 이야기. 그러다 6.25로 다 끝나버린 좋은 시절. 그렇게 자주 들었는데 내가 철이 들었나, 나이가 들었나, 벌써 늙었나, 아니 죽을 때가 됐나. 똑같은 얘기가 이젠 지겹지도 않다.
“그래서 어머니께서 유아시절에 좋은 일이 많아서 성품이 좋으신가 봐요.”
맘에 없는 말이 아니라 진심이다. 그래도 차마 아이 장애등록했다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모르시는 게 나아. 좋은 이야기도 아니잖아. 묻지 않으셨으니 그냥 넘어가자.’
“전은 부치면서 먹는 게 제일 맛있어.”
아이가 어디서 들었는지 동그랑땡 재료에 밀가루와 달걀 물을 묻히면서 한 말한다.
“그래. 지금이 제일 맛있으니까 먹고 싶으면 먹어봐. 속이 잘 익었나 봐 봐. 조금 뜨거우니까 데이지 않게 조심해서 먹어.”
어머니는 동그랑땡 부치는 거 좀 거들라고 남편을 불렀다. 조금만 걸어도 피곤한 체력 저질의 남편. 한강에 다녀왔으니 별로 하고 싶지 않은 얼굴이다. 조금이라도 쉬고 싶을 거다. 나는 아이를 불렀다.
“정아, 네가 도와주면 되겠다.”
지난번 집에서 동그랑땡을 한 번 아이랑 같이 만든 적이 있다. 혼자 있으면 어차피 핸드폰 밖에 안 하고 자기 생각에 자꾸 빠지니까 그런 시간을 줄이기 위해서 일부러 거들라고 했다. 여태 아이 성향을 파악해 신중하게 말할 만도 한데 나는 아직 멀었다. 밀가루, 달걀물을 잘 묻히지 못한다고 한 소리 하고 말았다.
‘말만 주부 15년 차이지 요리도 못하면서’ 그런 생각이 앞서 요리 자체에 갖고 있는 스트레스 때문인 듯하다. 나도 모르게 뭐라도 만들려고 하면, 대단한 요리가 아닌데도 쉽게 짜증이 올라온다. 문제는 그런 감정을 잘 알아채지 못한다는 점이다.
어쨌든 아이는 얼마 전 엄마와 아웅다웅하며 만들었던 동그랑땡이 도움이 되었나 보다. 이번엔 제법이다. 알아서 밀가루를 잘 털어 달걀물에 퐁당 넣어준다. 퐁당, 퐁당 동그랑땡 넣는 재미에 좀 더 세게 퐁당. 달걀물이 튄다.
“조심조심 달걀물을 묻혀 주세요.”
할머니께서 아이에게 차근차근 말씀하신다. 이런 장면을 사진에 찍어뒀어야 하는데... 사진 찍는 걸 별 관여치 않는 나도 오늘은 마음이 아쉽다. 어머니는 크게 성을 내며 화를 내신 적이 없다. 남편도 마찬가지다. 참 좋은 성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