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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스랑 Oct 22. 2023

아가, 어서 기운내야쟤

중환자실에서 의식이 든 현자는 시간을 알 수 없다.  정신이 오락가락한다. 얼마나 오래 여기에 누워 있었던  것일까. ‘나는 밥심으로 사는 사람인데, 병원 밥이 너무  맛이 없어.’ 현자의 생각은 꼬리를 물었다.  힘만 있으면 기어서라도 가겠는데, 화장실에 왔다 갔다 하는 것도 할 수 없다.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앉지도  못한다. 돼아지였다, 나는. 골병들어버렸다, 나는. 브레이크를 잡은 것 같은데 힘이 모자랐던 것일까. 나는 언제까지 이렇게 누워 잠만 퍼질러 자야 할까. 건조장에 키운 풋고추에 된장을 푹 찍어 먹고 싶다. 묵은지에 물고기 넣어 지져 먹던 맛도 그립다. 어머니가 만들어야  제맛이었는데.


이백사십 평 텃밭에 풀이 나면 정갈하게  호미질하던 어머니가 오늘따라 더 생각난다. 날마다 지극정성으로 세끼 따뜻한 밥을 지었던 어머니였다. 돌아가시던 그해 봄날에도 냉이를 캐어 된장국을 끓여주었던 어머니였다. 어디선가 어머니 말소리가 나는 것 같다.  

“아가, 니가 고생헌다. 어서 기운내야쟤.” 

몸이 아파 방바닥 아랫묵에 누워 있으면 피문어를 고아 미음을 쒀 내 입에 손수 떠 넣어주었다.  

“아가, 우리 며늘애기, 고생혀서 어쩌.” 

어머니는 나를 아가, 며늘애기라고 불렀다. 가난에  물려 나는 종가집 큰며느리로는 결혼을 안 하겠다 했지 만, 지금의 남편댁은 착하고 논 열여섯 마지기에 단형제이며, 어머니만 한 분이라고 중매가 들어왔다. 24세 음 력 1월 10일 시집왔을 때 어머니는 예전 살던 이야기를  하며, ‘나는 양반집 하음 봉씨 딸’이라고 했다. 

“나는 하음 봉가 칠남매 중 맏딸이다. 친정아버지는 모시조합에 다녀서 그런대로 괜찮게 먹고 살았재. 부유한 살림은 아녀도 의복은 깨끗이 입고 끼니도 시집오기보다 더 잘 먹었으니께. 열세 살 때부터 옷을 직접 해 입 었는데 열일곱 살 때는 친정아버지께 망근(어른이 된 남 자가 머리에 쓰는 갓의 일종)을 해드렸더니 참 잘 맹글었다고 칭찬하셨어. 솜씨가 있었으니께 그때부터 베틀을 짰어. 아버지는 생각이 트인 사람이었쟤. 여자도 배 워야 한대서 어려서 집안에서 한글을 배웠고, 서당에 가서 한자도 배웠다니께. 처녀 때 '충렬전', '숙영낭자전',  토기전'을 베껴서 시집을 올 때 책으로 맹글어 가지고  왔는디, 한글을 업신여긴 시아버지가 벽에 벽지로 발라 버렸어. 그라고도 남은 게 그 아까운 걸 다 불태워 버렸쟤. 고된 시집살이도 시집살이지만 지금도 그 일만 생각하면 속에서 불이 나. 원망스럽재. 그게 있으면 지금이 라도 가끔씩 읽을 텐데 말여. 인물도 좋고 대대로 훈장 하는 집안이라고 시집왔더니 집안 형편이 너무 궁했어.  벼 타작 후에 떨어진 낟알을 주워 디딜방아에 찧은 다음  밥을 지었는데 흙이랑 섞여서 색깔이 흙빛을 띠었으니 께. 그걸 밥이라고 먹을만치 어려웠어.


  1949년에 정읍이라는 시골로 이사를 왔쟤. 증조할아버지께서 들판으로 가야 화를 덜 입는다고 해 이사왔는 디 이듬해에 6.25가 터졌어. 전쟁 끝나고 그전에 살던  곳, 고창에 가보니께 거긴 산이 험한 데라 인민군이 들 이닥쳤더라고. 동네 사람이 반은 죽었더라니께. 다 친척 들인데 말여. 우리가 이사 온 여긴 널은 평야잖어. 숨을  곳 없어 그랬는지 터가 좋은 곳이라 그랬는지 이 동네까지는 인민군이 한 번도 들어오지 않았고만. 다행히 전쟁 동안 죽은 사람이 없었어. 여기로 이사 오기 전에는 5년  동안 친척집에서 엄청나게 고생을 많이 했재. 나중엔 변산에서 나무를 했는데 고개가 너무 험했으니께. 내 고생은 남편이 일찍 죽어서 시작됐어. 초상집에 갔다 오더니 뜨거운 여름날 뭘 잘못 먹어서 그랐는지 마을 사람 셋이  똑같이 앓더니 다 똑같이 일주일만에 죽었어. 그땐 여자 보다 남자가 일찍 죽으면, 집안에 사람이 잘못 들어왔다고 생각하던 때니께, 남편 잡아 먹은 년이라고 시집 살이가 너무 고됐지. 참말 이상도 허지. 그렇게 훈장 선상으로 다른 집 자식들을 다 가르쳤으면서도 왜 당신 손주 들은 안 가르쳤냔 말여. 지독히도 일만 시키고, 아비  없이 자란 버릇 없는 자식이란 소리 안 듣게 헌다고 그렇게 어린애를 회초리로 날마다 피가 나도록 때렸다니께.”  


이 세상에 둘도 없는 좋은 시어머니였다. 딸이 없어서인지 당신이 낳아서 키운 아들보다 며느리를 더 많이 사랑했다. 손주 넷을 등에 업어 키우고 대학교 공부 할 때까지 밥 빨래 손수 다 해주었다. 아이들은 도시에서 편 하게 공부할 수 있었다. 셋째가 대학교 3학년을 마치고 입대하려고 휴학했을 때 86세였다. 그해 추석에 집으로 돌아와 함께 살다가 96세로 생을 마쳤다. 그 오랜  세월 함께 살면서도 고부간에 큰 소리 내며 다툰 일이  없었다. 내가 며느리로서 일을 잘못해도 왜 그러냐고 이 유를 묻지 않았다. 나쁜 말씀을 평생 단 한 번도 하지 않고 그저 아들 며느리를 위했다. 당신이 너무 힘들게 시집살이를 해서 그런지 사는 모든 날 동안 나에게는 참  바르게 잘했다. 오직 아들 며느리 손자 손녀만 생각하며 한결같이 사랑했다. 양반집 규수답게 바르고 부지런한 어머니였다. 


현자는 시어머니의 따뜻한 정이 생각나 눈물이 났다.  돈만 생각하고 잘못한 것 같아 “어머니, 잘못하였소” 혼 잣말하고 눈물을 훔쳤다.  시아재가 총각 때 한집에 같이 살 때가 생각났다. 자기  몫으로 돈을 모은다고 집안에 돼지막을 짓고 돼지, 오리, 닭을 키웠다. 집안일과 농사일을 잘 거들지 않았다.  바쁜 농번기에 그러는데도 동생이니까 바깥양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겉으로는 아무 말 안 했지만 나는 힘들었다. 돈을 벌더라도 분가해 따로 돈을 벌었으면 정이  나지 않았을 것이다. 한 형제라도 그렇게 다를 수 없었다. 바깥양반은 돈을 전혀 따지지 않는 순하디 순한 사람이었고 시아재는 정반대로 꼽꼽히 계산해 모든 걸 따지며 자기 몫을 챙겼다. 큰 다툼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사이가 좋은 것도 아니었다.  


시아재가 결혼해 다른 마을로 따로 나가 살 때였다. 농사를 지을 때면 우리집에 와서 점심밥을 먹었는데 그때 내가 말도 잘 안 했다. 서글서글한 형수가 되지 못했다.  그럴 때 어머니는 얼마나 서운했을까마는 내가 많이 잘 못한다 했을 법도 한데 나한테 아무런 속상한 말을  안 했다. 시아재는 농사를 접고 읍내로 이사를 갔다. 매년 농사에 들어가는 손익, 인건비를 따졌던 것이다. 평생 농사를 지어도 돈 벌기 어렵고 고생만 하고 자식들 가르칠 앞날이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읍내 시아제 집에  다녀오는 날이면 어머니는 간식으로 줬다며 빵과 우유를 챙겨왔다. 어머니 잡수라고 한 걸 우리 집에 올 때 가지고 와서 나 좋아한다고 갖다주는 거였다.  어머니는 내가 바깥양반과 몸싸움을 하며 다툴 때도  당신 자식한테 잘못한다는 야단치고, 시아제 하고도 다투면 시아제를 야단쳤다. 그렇게 나한테만은 나쁜 내색  한 번 안 했다. 고부간의 갈등이라고는 없었다.  동네 아낙네들이 시어머니 흉을 보며 나쁘게 말하면, 

 “우리 시어머닌 하늘 아래 둘도 없는 분이였고만. 내게 그렇게 잘한 시어머닌 없을 것여. 먹는 것도 당신보다 나를 더 챙기고 내가 잘못혀도 화내고 큰소리칠 때  없었으니께. 한 번도 며느리 나쁜 말 안혔어.” 

자랑스레 말할 수 있는 건 내가 시어머니 정으로만 살았기 때문이다. 

 “어머니 사랑을 많이 받고 내 인생이 평탄하게 살았소. 어머니 감사하오. 어머니 덕택으로 잘 사요. 항상 어 머니 생각하면 살아계실 때 더 잘 챙겨드리지 못한 게  마음 아프오. 어머니 감사하오.” 


현자는 자식들 고생 안 시키고 어머니처럼 집에서 살다 조용히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약기운에 내내  자다가도 잠깐 정신이 반짝 들때면 현자는 자식들에게  전화를 했다. 하루라도 빨리 병원에서 나가고 싶다, 집에서 일 안 하고 누워있겠다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아무리 집에 가고 싶다 성깔을 부려도 큰일 난다며 퇴원 은 안 된다 했다.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일만 하는 현자 성격을 훤히 아는지라 자식들 어느 누구도 그 말을  들어줄 수 없었다. 지금은 뇌출혈이 자연적으로 멈출 때까지 기도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어긋난 버린  쇄골도 부러진 가슴뼈와 허리뼈도 뇌출혈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정신을 차려야재. 정신 줄을 놓아선 안 되는 것이여.  자식들 고생허믄 안 되니께.” 

현자는 마치 시어머니를 보는 듯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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