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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스랑 Oct 22. 2023

물이 성한 마을

엄마가 항상 나의 보호자였고 여전히 그 신분은 달라지지 않은 것 같은데, 엄마가 아프자 내가 엄마의 보호자 가 되었다. 안내 데스크에서 엄마 이름이 불렸다.  

“김현자 씨 보호자분? 수성 마을, 1943년생 김현자 씨가 환자분, 맞나요?”  

“네. 수성 마을, 김현자, 맞습니다.”  

“담당 의사 회진할 때 잠깐 같이 환자분 볼 수 있고요.  결과는 그때 들으면 됩니다.” 

“한 명만 된다면, 저 말고 김현자 씨 큰 아들 박영환 씨가 들어갈 거예요.” 

 보호자 신분으로 엄마를 생각한다. 현자, 진지하게 엄마 이름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지혜로운 사람. 이렇게 좋은 이름을 왜 한 번도 부르지 않았을까. 누군가 계속 ‘현자야’ 했다면 엄마는, “나는 현자니까.” 하면서 어질고 총명하게 행동했을지 모른다. 사람은 이름 따라간 다고 하지 않던가.


내 인생의 트라우마를 가져온 엄마의 언어들, 자식들에게 쏟아낸 말은 대부분 좋지 않은 말이었다. 엄마의 그 부정적 언어를 피해 간 사람은 할머니가 유일했다.  동네 골목마다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싸우고 욕을 하며  흉보는 이야기가 난무해도 우리 집에서는 그 소리가 나지 않았다. 나는 그게 참 신기했다. 할머니 성함은 봉선 녀였다. 이름만 선녀가 아니라 성품도 이야기 속 선녀다웠다. 어린 마음에도 할머니 성품을 닮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많았다. 할머니는 한밤중에도 시조와 옛이야기뿐 아니라 할머니 살았던 지나간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고창에서 태어나 시집도 고창 동네 사람과 했쟤. 근디 우리 보고 들판으로 가야 산다는 것이여. 그리서 이 평으로 이사를 왔어잉. 니 할아버지는 서당에서 글공부를 가르쳤고만. 난리통을 다 겪고 예전에 살았던 고창에  가보니께 시상에 마을 사람 절반이 죽고 없더랑께. 친척들도 많이 산에 끌려가 같이 죽었다는디. 어떻게 그렇게 알고, 이사를 갔냐고 우리더러 참 잘혔다고 그려. 니 아빠 열두 살 먹었을 때 할아버지가 죽어서 작은 할아버지 사는 영원면 앵성리 수성부락, 지금 이 동네로  이사 왔어잉. 시집살이가 어쩌깨나 힘들었는지 애기를  낳자마자 그 춥디춘 날 방에서 바로 나와 군불도 내가 땠다니께.” 


내가 살았던 마을은 앵성리 수성(水盛), 마을의 삼면이  물로 둘러싸인 물인 성한 마을이다. 끝없이 펼쳐지는 곡창지대 정읍과 부안의 경계에 있었다. 집 근처 산이라야  소나무 몇 그루에 듬성듬성 있는 언덕빼기 묘지가 다였다. 6.25 전쟁이 났어도 큰 피해가 없었던 것은 인민군도 국군도 숨을 만한 깊은 산이 없어서라고 했다. 백제  시대부터 있어 온 오래된 마을 앵성리는 풍수적으로 명당이랬다. 진짜 그런지 전국이 태풍 걱정할 때도 이 시골 마을은 난리를 피해갔다. 앵성리에는 큰 과수원이 많았다. 봄이면 꾀꼬리들이 찾아와 노래를 불렀다는데, 그건 모르겠고 과수원길 신작로를 따라 혼자 하교를 할 때  날마다 노래를 부른 건 나였다. 친구들이 있을 때면 풋풋하고 신맛 나는 아오리 사과부터 빨간 후지 사과까지, 과일 서리를 했다. 가을철 한밤중에 엄마와  사과를 사러 가면 못난이 사과, 떨어진 사과를 우수라고  덤으로 받았다. 앵성리에는 밀양 박 씨 정려문, 백정기 의사 기념터도 있지만 그게 어떤 의미인지 별생각 없이 자랐다. 읍내에  갈 때마다 지나쳐가는 이평면 전봉준 생가 역시 마찬가 지였다.  


깊은 산은 없지만, 끝없이 펼쳐진 들판 위로는 어디서 시작되어 어디서 끝나는지 알 수 없는 도수로가 있었다.  도수로 좌우로는 대부분 논이었는데, 도수로가 논보다  최소 10미터는 높아 평야 어디서든 도수로를 볼 수 있었다. 동진강으로 이어지는 구개강과 부안으로 향하는 도수로는 마을의 삶과 죽음이었다. 도수로가 있어야 사방의 모든 논에 물을 대어 농사를 지을 수 있으니 생명의  물줄기였다. 그러나 도수로 둑방이 마을길이었으니 도수로에 빠지거나 떨어져 생명을 잃었다. 수성 마을 양수장 수문을 열었을 때 구개로 떨어지는 물은 폭포를 만들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여름이면 도수로에서 헤엄쳐 놀았기에 나는 종종 저 커다란 수문 근처를  헤엄치다 수문으로 빨려가 떨어지면 어떻게 될까, 살 수  있을까, 궁금했다. 우리 집에서 제일 가까운 논은 마을  어귀 도수로 양수장 옆에 있었다. 때문에 뙤약볕이 내리쬐는 여름, 논에서 일손을 돕다가도 무시무시하게 물이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면 무서워 한기가 났다. 시퍼런 물 이 덮칠 것 같았다. 경운기와 콤바인 트랙터가 지나가는  너른 비탈길이었지만 그 길을 걷는 것도 겁이 나 오돌오돌 떨었다.  


면 소재지 초등학교에 가려면 버스가 다니는 신작로를  따라 여러 마을을 돌아 돌아가든지, 도수로를 쭉 따라  직진으로 가면 되었다. 물에 빠져 죽는 사람들이 해마다  있었기 때문에 학교에서는 도수로로 다니지 말라고 했다. 다른 마을 아이들은 도수로와 멀리 떨어져 살았으니  신작로로 다녔지만 수성 마을 애들은 그럴 수 없었다.  어른들이 논에 다녀오라고 심부름을 시킬 때면 도수로 길이 제일 빨랐고, 마을 입구에 있으니 반드시 도수로를  지나야 했기 때문이다. 부안이나 정읍으로 가는 버스를  타려면 어찌 됐든 도수로 건너편으로 가야 했다. 도수로  길은 풀이 많아 뱀도 많았지만 지각할 것 같으면 어쩔  수 없이 어린아이들도 도수로 길을 따라 학교에 갔다.  등굣길은 한눈팔지 않아도 하굣길은 달랐다. 도수로에  넓적하고 얇은 돌을 던져 물수제비를 뜨다가는, 도수로  비탈진 언덕에서 삐삐를 뽑아 씹거나 산딸기를 따 먹었다. 딱히 별 놀이가 없었던 탓에 남자아이들은 뭐가 그렇게 개구졌는지 일부러 둥둥 떠가는 것들을 수로에 던 져 놓고 다시 건지는 내기를 했다. 아무리 그러지 말라  해도 위험천만한 그 놀이를 계속했다. 농번기 때만 되면  도수로는 시퍼런 물이 금방이라도 넘칠 듯 차올라 넘실 거렸고 주전자 뚜껑 건지려다 아이가 빠져 죽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수성 마을에는 구개강 때문에 고가도로처럼 강 위로  난 공중도수로와 나란히 구개 다리가 있었다. 강과 공중 도수로가 교차하는 시작점의 비탈길 사이에는 방공호가  있었고 방공호를 내려오면 바로 마을 길이었다. 그 길을  지나야 구개 다리로 갈 수 있고 마을 길이 교차하는 곳이라 늘 널찍한 평상이 있었다. 한여름에 가장 시원한  곳이었고, 구개 다리를 건너 다른 마을이나 논으로 갈  수 있어 이 평상이 마을 사랑방이었다. 어른들이 가져온  옥수수, 감자, 수박 같은 것을 나눠 먹고 아이들은 방공 호 속에 들어가 총놀이를 하거나 공중도수로와 이어진  비탈길에서 놀았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때는 도수로의 물살이 그다지 세지  않아 공중도수로가 끝나는 하구에 갯벌이 있어 여자아 이들도 수로에 내려가 치맛자락을 올리고 소라, 새우,  바지락, 작은 게, 조개 같은 것을 잡으면서 놀았다. 대여섯살인 나도 여러 차례 제법 이것저것을 잡아와 국을 끓여 먹을 만큼 잘 잡혔다. 그러나 수로 공사 후에는 소라도 조개도 잡을 수 없었다. 물살이 아주 거세져 한 번 빠지면 장정도 헤엄쳐 나오기 힘들게 되었다. 여자애들은 수로 근처에도 얼씬하지 않았다. 남자애들은 여전히 “나  건너가는 거 봐.”하면서 양팔을 좌우로 뻗치고 무게 중심을 잡으며 수로 입구 갈빗대 사닥다리를 건너 다녔다.  마치 구름사닥다리 건너듯 물 위 징검다리 놀이는 남자아이들 뚝심인 듯했다.  


도수로는 궁금증을 자아내는 곳이었다. 내가 가보지  못한, 저 멀리 까마득하게 보이는 동네까지 쭉 이어져  있었다. 어른들 말로는 익산 이리부터 시작하여 여러 마 을을 거쳐 정읍 앵성리 우리 마을을 지나 부안까지 간단다. 수로는 두 발짝만 내려가도 손이 닿을 만큼 시퍼런 물이 흐르기도 했지만, 어떤 때는 물이 아예 없었 다. 바닥까지 바싹 말라 있으면 아이들은 모두 수로 바닥에 내려가 이것저것 줍고 돌멩이를 던지며 놀았다. 수로는 위부터 아래까지 6미터 정도 되었고 45도로 경사져 있어 그 비스듬한 시멘트 경사를 뛰어 내려갔다가 단 박에 뛰어오르는 게 아이들 놀이었다. 아이들 발이 보드 스케이트장을 울리는 바퀴처럼 한 번에 올라올 수 있으면 환호성이 여기저기서 들렸다. 중간쯤 오르다가 힘에  부치면 뒷걸음치며 내려갈 수밖에 없었는데 그러면 또 “와”하고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졌다. 이번엔 할 수 있나  뛰어오르고 뛰어내리는 게 그렇게 신날 수 없었다. 그 경사진 시멘트에는 여러 군데 빨래를 할 수 있게 널찍한  디딤돌과 길이 30센티미터 정도 되는 두꺼운 놋쇠가 계단처럼 만들어져 있었다. 수로에 내려가거나 올라올 때 밟기도 하고 손잡이처럼 잡을 수 있는데 사람이 빠졌을  때 올라올 수 있게 만든 비상 장치였다. 농번기가 되어 무섭게 물이 넘실대면 어른들은 도수로에 가지 말라고 했다. 딱히 놀 곳이 없으니 마을 입구 쪽  아이들은 아랑곳없이 도수로 근처에 모여 놀았다. 그러 다 구개길로 지나가는 어른들이 큰 소리로 야단하면 동 네 안쪽 언덕배기 묘지로 몰려갔다.  


구개강은 겨울철 놀이터였다. 얼음이 얼면 썰매를 타 러 온 동네 아이들이 모였다. 강 가장자리는 어린아이 나 여자애들이, 강 가운데는 모험심 많은 큰 애들이 썰 매를 탔다. 모두가 쪼그리고 앉아 썰매를 탔지만 한두  명은 대나무를 쪼개어 자유롭게 서서 스키를 탔다.  

“나랑 같이 강 건너편으로 갈 사람?” 용감한 개척자가 되고 싶은 아이가 누군가를 호출한다.  

“너 진짜 건너가려고? 거긴 위험해. 그러다 얼음이 깨 지면 어쩌려고.” 

“강이 꽁꽁 얼었잖아. 난 저편으로 가고 싶단 말야.” 

“이렇게 해가 나면 얼음은 금방 녹는댔어. 특히 가운 데 부분은 살얼음이 될 수도 있다고.” 

“아까 동네 큰 애들이 건너가는 거 봤거든.” 

“얼음 테스트를 해보면 알아. 아까는 괜찮았어도 지금은 아닐 수 있으니까.” 


가장자리에서 놀다가 강 가운데로 가고 싶은 아이들은  언제나 얼음 테스트를 먼저 하였다. 꽁꽁 얼어붙은 날이 라도 해가 뜨면 쉽게 얼음이 녹기 때문이었다. 돌다리 두드리듯 얼음이 견딜 수 있는 무게를 알기 위해 발로  쾅쾅 두드리고, 괜찮겠다 싶으면 무게 중심을 실어 몸통 전체를 움직인다. 한 명이 가보아 괜찮으면 다음 사람이  또 같이 가본다. 그런 식으로 몇 사람 무게까지 얼음이  견딜 수 있는지 살핀다. 다 같이 강 건너편으로 가려다가 뿌지직 얼음이 갈라지는 소리가 나면 얼른 흩어져 돌아 나온다. 모두가 아는 상식이었다. 뭉치면 죽을 수도  있는 구개강의 썰매타기였다. 겨울에 썰매를 타다 얼음 이 깨져 죽는 경우도 있었다. 얼음을 깨고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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