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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스랑 Oct 22. 2023

거룡댁의 사투리, 거렁떡!

산소호흡기를 의지해 숨을 쉬던 현자는 회진하는 의사를 따라 큰 아들 영환이 들어오자 반가웠다. 현자는 ‘내  작고 소중한 아이가 어느덧 이렇게 자라 나와 같이 늙어 가고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들아, 나보다 앞서 가면 안 된다이. 그것이 가장 큰 불효여. 이 어미한테는.  내가 부족혀도 절대 부모보다 앞서가면 안 된다이.’ 몸  건강 관리 잘하라고 애달픈 눈빛으로 아들을 바라보자 옆집 그 여자가 떠올랐다.


“거렁떡! 제발 부탁혀. 집이 아들만 보면 우리 아들이  생각나. 못 살겄어. 제발 이사 가줘. 딴 디서 살아.”  

옆집 한수 엄마가 또 찾아와 사정했다.  꿈에도 생각지 않은 일이었다. 첫아들 초등학교 1학년 때였다. 일찍 부모를 여읜 것이 한이 되어 나는 아이들을 한 해라도 빨리 가르치고 싶었다. 큰아들이 만 여섯  살 때 초등학교에 보냈다. 여름방학 때 논에서 농약 할 때, 물 심부름을 시킨 것이 큰 액운이었다. 


옆집 아들 한수가 큰 애보다 한 살 적었다. 같이 놀다  우리 애가 한수를 때렸다고 옆집 애 엄마가 나쁘게 말을  했다. 우리 애만 나쁘다 하니 나도 뭐 그러냐 저러냐고  다투었다. 애들은 애들이라 싸우고는 또 금방 풀어져 놀았다. 다시 어울려 사흘째 되던 날이었다. 주전자에 물을 넣어 큰 애와 의성이, 한수하고 셋이서 우리 논에 물을 가지고 오던 길이었다. 좋고 넓은 길을 두고도 아이 들은 물이 많이 흐르는 도수로 윗길로 갔던 모양이었다. 

 “사람 살려, 사람 살려! 오매, 어찟게요! 아그들이 물에 빠졌어라.”  

의성이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주전자 뚜껑을 건 지려다 우리 아이와 옆집 아들 한수가 물에 빠졌다는 거였다. 떠내려가는 아이들을 물에서 데리고 나왔더니 우리 아이는 살고 옆집 아들은 바로 죽었다. 말로 못 하는 고통이었다. 


큰아들 영환이만 보면 죽은 한수가 생각나니 데리고 이사를 하라는데 어디 가서 어떻게 산단 말인가. 나는 결단을 내리지 못해 생각 끝에 큰아들 영환이와 네 살짜리 둘째 아들 정환을 외가에 맡기었다. 둘째는 그해 겨 울 집으로 데려왔지만, 큰애는 4학년 겨울에야 집으로  왔다. 영특하고 착한 아들이었는데 4년이 지나 다시 만 났을 땐 내 말을 잘 안 들었다. 바깥양반이 도박에 빠져  아주 힘들 때였다. 생각 없이 아이에게 함부로 욕을 했다. 큰아이는 성격이 완전히 삐뚤어 나갔다. 운동회, 졸업식에 가도 아는 체를 안 했고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있었다. 대화가 아예 없었다. 말을 붙이려 해도 부모의 따뜻한 마음을 몰라주었다. 누구에게 말하기 어려운 고통 이 시작되었다. 아들 장래가 염려되었다.  

“거렁떡! 왜 잘 안 와? 같이 놀게 어여 와.”  


그러나 그 일로 마을 사람들과 어울릴 수 없었다. 옆집  한수네가 이사를 갔다. 마을 사람들이 나보고 독하다고  수군거렸다. 나는 옷도 잘 안 사 입었다. 화장품 이름도 모르고 곱게 몸치장 한 번 할 수 없었다. 땅에만 내 마음을 쏟아부었다. 그렇게 늙어버렸다. 누구를 탓할 것인가. 바보같이 산 내 인생을. 내가 바보였다. 그땐 몰랐다. 어린 시절 부모의 다툼이, 부모와 떨어져 지내는 것이  아이에게 얼마나 큰 정서적 어려움을 주는 것인지 몰랐다. 내가 좀 더 배웠다면 아이가 겪은 어려움을 잘 보듬어 키울 수 있었을 텐데……. 한심해 눈가에 눈물이 소리 없이 흐를 뿐. 그땐 아무것도 몰랐다. 누가 뭐라고 해도 근검절약만 하면 되는 줄 알았다. 공부에 한이 맺혀  자식 교육에 모든 인생을 걸었다. 아들딸 똑같이 잘 가르쳐 다 똑같이 잘 살기를 항상 기도하는 마음뿐이었다. 


현자는 배가 부르게 먹어야 어딘가 허기진 마음이 채워졌고, 빨리 먹고 일하러 가야 마음이 편했다. 빨리 빨 리는 평생 습관이 되었다. 거기다 몇 번에 걸친 뇌수술  후에는 뇌가 망가져 식욕조절이 생리적으로 되지 않았 다. 남들이 보기에 왜 저렇게 허겁지겁인가, 먹을 욕심부리는 것만 같았다. 집안에서는 허리와 무릎이 아파 일어서지도 않고 엉덩이를 밀고 다녔다. 냉장고에 반찬 넣는 것을 자꾸 잊어 상하는 음식이 식탁에 놓여 부부 싸움이 일기도 했다. 마음 터놓고 지내는 사람이 없으니  현자의 그런 고충을 아는 마을 사람이 없었다.  


어느 날 경로당 회관에서 점심밥을 먹다 현자는 마음의 상처를 크게 받았다. 마을 회관을 지을 때 돈을 충분 히 냈고 식량도 냈기 때문에 주간보호센터에 가지 않는 날이면 가끔씩 회관밥을 먹으러 갔다. 노인 일자리로 보수를 받고 일하는 마을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현자  생각에 밥이 부족한 것 같아 밥을 하려 했더니, 충분하다고 말렸다. 어쩔 수 없이 적은 밥이라도 막 먹으려는 데 앵성교회 교인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코로나 번질까 무서워서 교회에서는 밥을 못 먹으니 께 예배 마치고, 다들 여기로 왔어. 우리도 밥 줘.”  

그러는 것이었다. 밥이 부족한데도 다들 나눠먹자고  하니, 현자는 밥을 먹지 못하고 그냥 집으로 돌아왔다.  밥공기로 1/4밖에 되지 않았으니 먹으나마나였다. 다음 날 교인들이 현자 흉을 실컷 보았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 말을 굳이 현자에게 전하지 않아도 될 터인데, 교인이 교인들의 말을 전하는 것이었다.  

“거렁떡은 밥 한끼 못 먹어서 죽는 것도 아닌디, 밥양 이 돼지같이 커이.” 

“거어렁 떡이잖여.”  

“먹는 게 꼭 며칠 굶은 거렁뱅이 같어.” 

광주골이랑 나이 많은 권사가 그러는 걸 교인들이 다 같이 맞장구를 쳤다는 것이었다. 만날 점심을 회관에서  먹는 사람들이 어쩌다 몇 번 먹는 것도 현자가 먹으면  왜 그렇게 싫은 것인지, 현자는 한 번 속 시원히 물어나  보고 싶었다.  어떤 날은 회관 창문이 활짝 다 열려 있는데도  

“거렁떡이 꼴찌로 나오니께 창문 다 닫고 나와잉. 우리는 가더라고.”  

하고는 권사들이 우르르 나갔다. 교회는 예수처럼 자 기를 봉사하고 이웃을 제 몸처럼 사랑하는 종교라는데 거렁떡은 교인들이 자기에게 왜 그러는지 알 수가 없었다. 답답했다. 거렁떡이 어쩌다 미운 털이 박힌 것인지  알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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