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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스랑 Oct 22. 2023

인생의 수레바퀴

병원 로비에서 커피 한 잔을 주문하자 만감이 교차했다. 20년 전이었다. 그때도 엄마는 중환자실에 있었다. 수술은 언제쯤 해주냐고 계속 물었지만, 그때도 의사는 뇌출혈이 심해 피가 쏟아지는 상황에서는 잦아드는 걸 기다려야 한다고만 했다. 그때부터였나. 이번 일도 그랬지만 언제나처럼 시골집 일을 뒷바라지하는 건 동생이다. 그 아이를 생각하면 고맙고 미안하고 안쓰럽다. 기운 차려야지, 마음을 다독여도 오가는 사람들을 바라보자니 자연스레 기분이 가라앉는다. ‘언제쯤 엄마를 모시고 퇴원할 수 있을까. 중환자실에서 나올 수 있는 것만 해도 다행이겠지.’ 휠체어에 탄 백발의 어르신을 보자  할머니 생각이 났다.


특별한 병도 없이 아흔여섯세까지 살았던 할머니는  집에서 자연사했다. 객지에서 죽으면 안 된다고, 객사가 늘 걱정이고 두려웠던 할머니는 손주 넷 모두 대학에 입성하자 서울 셋방을 떠났다. 당신이 바라던 대로 시골집으로 내려가 10년을 더 살고, 죽음을 맞이했다. 살아생전에 정리한다며 금가락지, 은가락지를 자식들에게 도로 돌려주었다. 손주며느리 볼 때 받은 혼수품도 죽으면  다 꼬실라 없어진다고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며 정리했다. 천천히 죽음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불행해 보이지는 않았다. 

“행복하게 돌아가신 거여.”  

“그려. 참 호상이네. 보기 드문 호상이여.”

마당에 천막을 치고 마을 사람들이 웃으면서 음식을  나눴다. 할머니가 꽃상여를 타고 따뜻한 봄날 선산 할아버지 곁으로 가는 길을 함께 했다. 외롭지 않은 죽이라 감사했다. 봉분의 흙을 덮고 마지막 인사를 할 때  봄볕이 따사로이 내리쬐었다. 시골이었지만 그 당시에 도 요양원으로 사라진 동네 어르신들이 상당했다. 그들은 낯선 곳에서 외롭게 콧줄 끼고 연명치료를 계속했을지도 모른다. 각혈을 해 방안 사방천지에 핏방울 흔적을  두고 가거나 논에서 일하다 경운기 힘을 못 이겨 즉사하기도 했다. 또 도수로 다리 한쪽에 멍석을 깔고 곡식을  말리다 추락사하는 경우도 심심찮게 있었다. 할머니는  친정 식구들이 다 장수했다면서 벽에 똥칠하는 노망이 나서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아파도 의자에 앉아  연신 팔, 다리, 몸통을 움직이며 운동을 했다. 할머니는 아흔이 훨씬 넘었는데도 밝은 눈으로 큰 글씨를 읽었다.  밝은 귀로 이야기했다. 아무리 맛있어도 배부르기 전 숟가락을 놓았다. 


엄마가 집에서 자연사할 확률은 높지 않다. 자식들이  모두 도시 사람이라 시골에 내려와 함께 하기 어렵다.  원치 않아도 어쩔 수 없이 중환자실에서 나오면 요양병원, 요양원 순서가 될 것인가. 현실적인 문제를 형제들과 의논해야 하는데, 이제 겨우 시작 단계인데, 벌써부터 의견이 다르다. 죽음 앞에서 작고 사소해 보이는 일로 마음이 다친다. 맏이처럼 생각해야 하는 형이 동생을 탓한다. 

 “니가 농사일을 거들어서 여태까지 농사를 지은 것이 야. 돕지 말아야지, 왜 도왔어?” 

지난 20년간 온갖 궂은일 도맡아 했던 아우에게 비난이 쏟아진다. 술을 잔뜩 마시고 또 다른 형이 퍼붓는다. “야, 야아, 그러니까 니가 지금까지 부모한테 한 게 뭐  있냐고!” 


마음을 비우고 혀 꾸부러진 소리를 듣기만 한다. 누가  형이고 누가 아우인가. 이런 생각이 미치자 달게 마시던  커피 맛이 써서 더 이상 못 마시겠다. 도움 안 되는 생각은 어서 잊어버리자. 지혜롭게 생각해야 해. 형제들끼리  소란하고 섭섭해봤자 도움 되는 건 없어. 그러면서도 엄마만이 해놓고 가야 할 일,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일을 엄마에게 부탁하고 싶다.  

“엄만 현자잖아.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이대로 가면 안 돼. 수습하고 가. 제발. 제정신일 때 엄마 죽 고 나서도 우리 형제들 계속 얼굴 보며 살 수 있게. 살아생전에 정리해 놓고 가면 안 되겠어, 응? 잘 산다는 게  뭐야? 왜 백 년 만년 살 것처럼 그렇게 일만 했던 거야?  우애하고 살라며! 할머니처럼 좋은 기억 좀 주고 가면  안 되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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