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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스랑 Oct 22. 2023

차남이가 된 어진 아들

현자는 의식이 몽롱했다. 하얀 가운을 입은 남자가 물었다. 

 “김현자 씨, 정신이 드세요?” 

 “동상, 차남아, 내 말이 들리는가이?” 

 ‘여기가 어디여?’ 

물어보려 해도 입술이 달싹거리지  않는다. 말을 하고 싶은데 말이 안 나온다.  “동상, 차남아!”  그 이름을 듣는 순간 현자는 차남이가 되었다.  어릴 적 살았던 신송리가 떠올랐다. 신송리에서 어떻게 살았더라. 뼈마디가 남자 손처럼 굵어질 때까지 죽기  살기로 일만 했으니까. 별로 기억하고 싶지 않은, 좋은  것은 하나도 없던 시절이었다. 

 “딸은 방으로 하나 있어도 다 헛 것이구망. 꼭 아들이  있어야 한다니께.”

남아선호 사상이 깊게 뿌리내린 시대였다. 태어나 보니 고대했던 첫아들이 아니라 넷째 딸이었다.  내 이름은 현자, ‘어진 아들’을 대신하라고 붙여진 이름이다. 버젓한 이름을 두고도 집에선 나를 현자라 부르지 않았다. 딸은 한방 가득해도 시집가면, 출가외인, 남이나 다름없어 쓸데없다며 아들을 원했기 때문이다.  

“엄마, 왜 내가 차남이야?” 

“딸, 딸, 딸. 딸만 넷으로 끝나믄 안 되니께 그라재. 다음엔 꼭 아들을 낳아야 하니께. 아들 낳고 싶은 집은 딸 을 차남이로 불러. 너만 그랑게 아녀.”  

차남이라 불린 건 확실히 효과가 있어 7년 후 남동생이 태어났다.  엄마는 깔끔쟁이였다. 집안을 닦고 또 닦았다. 그럴 시간에 마당 한 귀퉁이나 담벼락 돌멩이를 치우고 먹을 걸 심었으면 좋겠는데 엄마는 종일 걸레질만 해댔다. 집안 살림이 불어나야 하는데 엄마는 왜 먹을 걸 키우지  않을까.  


차남이 부모는 일제 강점기 옛날 사람이라 공부가 무엇인지도 몰랐다. 밥 먹고 사는 것도 힘들었으니 딸들을  그 옛날 초등학교에도 보내지 않았다. 큰딸은 그나마 형편이 괜찮았던 때고 워낙 억척이라 제 나이에 학교에 보 내 초등학교를 마쳤지만 둘째 딸부터는 그럴 수 없었다. 딸들은 아무렇게 키워도 되는 줄 알았다.  다들 아들을 바라서 아들을 볼 때까지 아이를 낳던 때라 동네에는 차남이와 동갑내기 여자애들이 많았다. 개중에는 학교 다니는 애들도 많았지만 안 다니는 애들도  있었다. 열두 살 되던 해, 설을 막 보내고 난 후였다. 그때 차남이는 무슨 용기가 났는지 모르겠다. 학교 가는  애들이 부러워서 먼 친척인 집안 친구 하나 보고

 “야, 우리도 학교 다니자.” 

그렇게 말했다.  한겨울 손이 꽁꽁 발이 꽁꽁 얼어붙는 매서운 추위에  눈만 내놓고 치마를 뒤집어썼다. 친구들 따라 학교에 갔다. 학교 벽은 나무판으로 지어져, 친구들은 교실로 공 부하러 들어가고 현자는 밖에서 교실 벽을 기대고 서 있었다. 쉬는 시간에 어떤 선생님이 쟤네들은 누구냐고 물었다. 동네 친구들이 

“우리 동네 김현자가 학교 다니고  싶어 왔대요.” 

했다. 선생님이 현자에게 교실로 들어오랬다.  

“학교 다니고 싶어서, 처음 왔어요.” 

“면사무소 가서 호적초본은 떼어가지고 오고, 나이가  많으니까 2학년으로 들어가서 공부 한번 해 봐.”

 쫓겨날 줄 알았는데 공부 한 번 해보라는 말을 듣자 꽁 꽁 얼었던 몸이 다 녹아내렸다. 


현자는 2학년 반에 들어 가 1학년 공부를 마친 애들과 첫 공부를 시작했다. 기역, 니은도 모르고 학교에 갔으니 아무것도 읽을 수 없었다.  2학년 국어책 1 과를 배웠지만, 아무것도 몰랐다. 2과 역시 마찬가지였다. 까막눈이었지만 책보를 각개 지어 등 허리에 가로로 매고 학교에 가면 눈알이 빠지도록 책을  들여다보았다. 날마다 뚫어지게 책만 들여다본 어느 날이었다.  

“국어책 3과 한 번 읽어볼 사람, 손 들어!” 

그날 또 무슨 용기가 났는지 모르겠다. 현자는 자신이  읽는 게 맞는지 확인하고 싶어 손을 들었다.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책이 저절로 줄줄 읽혔다.  

“잘 읽었다, 현자야. 잘 읽었어. 이름처럼 똑똑하구만.  앞으로도 열심히 공부해 봐.”  

선생 칭찬을 듣자 현자는 그날부터 자신감을 갖고 책 장이 닳고 닳도록 읽었다. 책이 저절로 외워져 2학년 반 에서 시험을 보면 계속 일이 등을 했다. 셈본책(옛날 수 학책)을 배울 때면 선생은 칠판에 문제를 써놓고 아는  사람은 손들어 보라고 했다. 그러면 현자는 손을 들고  앞으로 나가 산수셈을 다 풀었다.  

“정답을 다 잘 맞혔다.”  

손뼉을 치며 선생은 칭찬했다. 그때는 시험을 보고 점 수가 좋지 않은 아이들은 손바닥도 맞고, 종아리도 맞던  시절이었다. 동네 아이들은 현자 뒤에 바로 앉아 시험지 답을 다 풀면 보여 달라며, 큰 오담아 사탕을 사주기도  했다. 현자는 공부시간이 참말 좋았다. 2학년 2학기 말 이 되자 선생이 말했다. 

“월반하고 싶은 애들은 시험을 쳐라. 시험을 잘 보면  바로 4학년으로 간다.”  

현자는 시험을 치르고 월반해 3학년 과정을 건너뛰고  4학년으로 올라갔다. 


열세 살, 막 재미있게 공부를 하려  했던 그때 인생의 험난한 물결에 휩쓸렸다. 차남이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이었다.  

“야, 이제 학교 공부는 그만둬! 아무리 어려도 일을 해 야 돼!” 

5년 위 언니는 모내기가 시작되면 농사일을 해야 한다며 차남이가 학교에 못 가도록 꽉 붙잡았다. 학교를 가 려 하면 시퍼렇게 멍이 들도록 비틀어 꼬집었다. 한 달 이 넘도록 학교에 갈 수 없다. 미치게 학교 가고 싶은 마 음을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 한여름 잠깐 농사일이 주춤할 때 어쩌다 학교에 가면 반 친구들이 물었다.  “야, 학교 안 다닐 줄 알았는데, 왔냐?”  

그 말을 들으면 창피했다. 키라도 작으면 좋을 텐데 멀 대같이 큰 데다 삐쩍 마르기까지 해 교실 맨 뒷자리에 앉아있어도 도드라졌다. 

 “아빠 돌아가시고 집이 더 지독하게 가난하니께. 집안일 돕다가 이제 왔어.”  

그래도 정말이지 현자는 공부가 좋았다. 오랫동안 결석해도 책이 외워질 때까지 집에서 혼자 읽고 또  읽었다. 시험 치는 날만큼은 학교에 갔다. 신기하게도 1등은 꼭 현자가 차지했다. 한여름이 지나면 금세 또 가을 벼 추수 기간이 왔고 또다시 학교에 갈 수 없었다. 가 을은 개미처럼 일해야 하는 때다. 논에서 나락을 몇 포 기 낫으로 베어 홀대로 훑어, 볏짚으로 만든 둥근 망태 기에 조금씩 담아, 머리 위에 이고 집으로 가져다 부었 다. 밭에서 고구마를 괭이로 캐어 망태기로 담아 집으로  가져 날랐다. 가을 추수기 역시 학교 가는 날이 거의 없었다. 그렇지만 현자는 틈만 나면 역사책이든 국어책이 든 읽었고 책을 통째로 다 외웠다. 학교를 계속 출석한  친구들과 같이 시험을 봐도 거의 다 이길 수 있었다. 공부시간이면 아주 재미있었고 시험만 보면 힘이 났다. 4 학년 말 다시 한번 월반해 6학년이 되었다. 운동회 날이었다. 달리기 할 때 현자는 팍 하고 넘어져  버렸다. 힘이 모자라 달릴 수가 없었다. 아이들이 깜짝  놀라 다 쳐다봤다.  

“야, 너 어떻게 된 거여? 왜 그렇게 힘이 없는 겨?” 

 “쌀겨 갯떡 먹고 독해서 자꾸 보대껴. 추석인데 송편 도 몇 개 없고 나물밥 솔껍질 벗겨 먹고, 호밀을 맷돌에 막 갈아서 고구마 순 뜯어 넣고 풋대죽을 쑤어 마셨어.  보리를 솥에 볶아 한 줌씩 먹고 물 마시면 그게 끼니여.  그렇게 때우니까 힘이 없어.”  


배가 너무 고파 고구마 한 개만 더 달라고 해도 귀녀  언니는 한 사람 앞에 네 개씩 하면서 더 이상 주지 않았 다. 큰 거는 다 장에다 팔아버리고 자디잘은 것만 주면 서도 한 개를 더 주지 않았다. 지독해도 그렇게 지독할  수 없었다. 몰래 먹다 들키면 언니가 숫자를 딱 세어보고는 꼬집고 때렸다. 징그럽게 미웠다. 형제지간 따뜻한  우애가 뭔지 몰랐다.  현자를 기죽이는 것이 또 있었다. 집에서는 학교에 낼  잡비를 달라고 하면 어디에 쓸 거냐고 조사를 심하게 하였다. 학교에서는 집에서 월사금을 안 가지고 온다고 야 단을 했다. 

“월사금을 안 낸 사람은 다 앞으로 나와. 너희들은 모 두 지금 집으로 가도록.” 

다달이 학교에 내야 하는 돈을 못 내어 공부시간에 집으로 쫓겨가기를 반복했다. 돈을 달라고 울며 어머니 마 음을 괴롭혀도 소용없었다. 없는 돈이 땅을 판다고 나올  리 없었다. 학교에 몇 푼 내는 월사금도 없는 현자는 가 난이 죽도록 미웠다.  열두 살에 초등학교 2학년에 들어가 공부를 시작해 학교를 늘상 빠졌지만 3년 만에 겨우 졸업할 수 있었다. 초등학교도 간신히 졸업한 터라 상급학교 진학은 꿈도 꿀  수 없었다.  

“이렇게 똑똑한데, 니가 남자였으면 내가라도 아들 삼 아 고등교육까지 가르치고 싶고만.” 

여자라서 별수 없다는 정석구 담임 선생의 그 말은 두 고두고 응어리로 맺혔다. 


 더 이상 공부는 할 수 없었다. 큰언니, 둘째 언니는 시집을 갔고 남동생은 너무 어렸다. 현자도 어렸지만 5살  더 많은 위 언니는 쉴 새 없이 일만 하자고 했다. 남자 일을 대신해 두 딸이 농사를 지었다. 호미로 풀 베고 낫으 로 나락 베고 괭이로 땅 파고 밭 곡식 심고 홀태로 나락  훑고 손발이 시려 호호 불어가며 일했다. 손이 칼로 벤  것처럼 손마디가 다 갈라지면 광목 헝겊으로 밥풀질하여 손마디를 감아서 붙였다. 밥 하는 일도 현자가 해야  하는 일이었다. 나락을 훑어 독도구통에 넣어 도구대로  찧어 쌀을 만들었다. 물은 옹달샘에서 길었다. 두레박  끝을 한 발 두 발 세게 양손으로 잡아당겨 옹기 물동이에 한가득 퍼부었다. 물동이 꼭지를 잡고 샘물을 길어다  옛날 부엌 밥솥 옆에 묻은 커다란 물항아리에 부을 때면  물항아리에 빠질까 무서워 바가지로 조금씩 부었다. 물을 채우고 나면 아궁이 짚에 불을 붙여 불을 때서 밥을  해 먹었다.  


보리를 큰 솥에 쪄 말린 후 찧으면 그 보리는 그냥 먹을 수 있고, 나락을 훑어 솥에 쪄서 말린 다음 독도구통에 찧으면 오리쌀이 된다. 오리쌀은 그냥 씹어 먹으면  구수하고 참 맛이 난다. 그런데 언니는 그 오리쌀도 못  먹게 하고 점심밥 대신 고구마만 몇 개 주었다. 거친 삶 은 따뜻한 정을 어떻게 주고받는 것인지 가르쳐주지 않았다. 현자는 결혼할 때까지 남자처럼 일했고 손발은 나 무꾼 같았다. 여자의 손발처럼 부드러운 데가 한 군데도  없었다. 흙 속에 묻혀 현자의 십 대가 하릴없이 지났다.  이평면 신송리에서 22년을 살다 백산면 거룡리로 이사를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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