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딸에 대하여
저자 김혜진
출판사 민음사
출판연도 2017
독서기간 2025.1.26.(197쪽)
장르 소설
나의 별점 ****
첫문장
종업원이 뜨거운 우동 두 그릇을 내온다. 수저통을 뒤져 숟가락과 젓가락을 꺼내는 딸애의 얼굴은 조금 지친 것 같기도, 마른 것 같기도, 늙어 버린 것 같기도 하다.
내 문자 못 봤어?
딸애가 묻는다.
그래. 전화를 해야지 하면서도 자꾸 잊어버리는구나.
나는 다만 그렇게 말한다. 그건 거짓말이다. 오히려 주말 내내 딸애의 문제를 생각하느라 진이 다 빠질 지경이었다. 그러나 다시금 이렇게 아무런 대안도, 방법도 없이 딸애와 마주 앉아 있다. 7
나의 최고 문장
이렇게 있어 줘서 고맙구나.
나는 간신히 입을 연다. 그 애는 다시 앉아야 할지, 돌아가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엉거주춤 서 있다. 나는 앉으라는 손짓을 하고 이런 이야기를 한다. 누군가 내게 너에 대해서 물을 때, 너와 내 딸에 대해서 물을 때, 여전히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이야기다. 아니다. 알고 있지만, 알게 됐지만, 여전히 그 말을 할 수 없다는 의미다.
나는 모르겠다. 너희를 내가 이해할 수 있을지, 살아생전에 그런 날이 올지.
그 애의 발이 아무렇게나 버려진 담배꽁초들을 하나씩 터뜨린다. 새어 나온 담뱃잎이 시멘트 바닥에 누런 자국을 남긴다.
내가 너희를 이해할 수 있는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날까. 때로 기적은 끔찍한 모습으로 오기도 하니까. 포기하지 않는다면 언젠가 오겠지.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건 시간이 필요한 일이잖니. 나한테 그만큼의 시간이 남았는지 모르겠다.
나는 중얼거린다.
그러나 그런 기적이 오기도 전에 내가 이해한다고 말할 순 없지 않니. 그건 거짓말이니까. 내 딸을 포기하는 거니까. 떳떳하고 평범하게 살 수 있는 내 딸의 삶을 내가 놓아버리는 거니까. 내가 그렇게 할 수는 없는 거잖니.
멀리 도로에서 커다란 경적이 울린다. 소리는 순식간에 도로 저편으로 달아나 버린다. 그 애는 듣고만 있다. 그럼에도 노력해 보겠다는 말은 끝내 나오지 않는다. 그런 헛된 기대를 심어 주고 싶진 않다. 여전히 내 안엔 아무것도 이해하고 싶지 않은 내가 있고, 모든 것을 이해하고 싶은 내가 있고, 그걸 멀리서 지켜보는 내가 있고, 또 얼마나 많은 내가 끝이 나지 않는 싸움을 반복하고 있는지. 그런 것을 일일이 다 설명할 자신도, 기운도, 용기도 없다. 195
마지막 문장
그런 걸 받아들일 수 있을까. 견뎌 낼 수 있을까.
스스로에게 물으면 고집스럽고 단호한 얼굴로 고개를 젓는 늙은 노인의 모습이 보일 뿐이다. 다시 눈을 감아 본다. 어쨌든 지금은 좀 자야 하니까. 자고 나면 나를 기다리고 있는 삶을 또 얼마간 받아들일 기운이 나겠지. 그런까 지금 내가 생각하는 건 아득한 내일이 아니다. 마주 서 있는 지금이다. 나는 오늘 주어진 일들을 생각하고 오직 그 모든 일들을 무사히 마무리하겠다는 생각만 한다. 그런 식으ㅗ 길고 긴 내일들을 지날 수 있을 거라고 믿어 볼 뿐이다. 197
주인공에게 한마디
따뜻한 엄마다. 세상 한가운데 서서 딸을 끝까지 보살피려고 하는, 이해하려고 애쓰는 사람. 요양보호사로서 가족이 없는 젠의 마지막을 살뜰히 챙겨준 노인. 힘이 없는 것 같으나 사회의 약자편에 서서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걸 해내는 사람.
작가에게 한마디
23년 여름 <치킨 런>을 읽었을 때, 죽고 싶은 사람을 죽지 못하게 만드는 설정이 블랙 코미디처럼 웃기다고만 생각했는데, <딸에 대하여>는 상당히 뛰어난 노인의 심리 묘사가 눈길을 끌었다. 나이 든 사람도 아닌데 작가가 나이 든 사람의 심리를 이 정도로 세밀하게 이해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작가의 다른 최근 신작이 궁금할 만큼. 작가를 성장시킨 건 무엇일까.
느낌
마음을 그대로 읽는 것 같았다. 나이 들어가는 세월에서 느끼는 한탄 같은 것들. 가족도 아닌데, 나와 상관없는 사람들의 삶을 위해 열정을 쏟아부었던 일이 다 헛수고처럼 가슴을 무너뜨리는 시기에 느낄만한 감정들. 말하고 싶지만, 입술 밖으로 터져나오는 순간 삶 전체를 부정할 것 같아 두려워 마음속에만 담고 있는 가슴 저미는 후회들. 그 언어들이 모두 문장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누군가를 공감시키는 아름다운 글이다. 같은 주제라도 이렇게 아름다운 문체로 쓸 수 있다니. 작가가 고른 인물은 외면할 수 없는 현실이다. 햇빛 속에서 눈이 내리는 오늘, 어쨌든 오늘을 살아가야 한다. 영화 <윤희에게>와는 다른 결의 <딸에 대하여> 추천하고 싶은 명작이다.
한 줄 서평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엄마
제목 다시쓰기
엄마의 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