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떠나는 여행
자이에서 아리산으로 향하는 풍경은 동화 같다.
삼림기차가 지나면 기다렸다는 듯 정차하는 역 앞에는 기차를 향해 웃으며 손을 흔드는 사람들이 여럿이다. 아이처럼 해맑은 표정으로 반갑게 손을 흔든다.
나도 그들을 향해 저절로 손이 올라간다. 열심히 손을 흔든다. 웃음이 전염되듯 퍼진다. 손을 흔드는 그들을 따라 당연한 듯 나도 똑같이 웃음을 짓는다. 주름진 얼굴이 펴진다.
정거장마다 약속이나 한 듯 똑같이 반복되었던 웃음, 만남과 헤어짐 속 기차 여행은 지루하지 않았다. 기대감으로 사진을 찍는 사람들, 영상으로 기록을 남기는 사람들. 그 틈바구니에서 내가 찾는 건 인간미. 향수. 우리에게서 오래전 사라진 정다운 사람들의 냄새.
나흘간의 대만 여행에서 아리산 삼림열차를 타겠다고 꼬박 이틀을 할애했다. 짧지만 강렬하게 구부러지며 어두운 터널을 지나면 갑자기 쨍하고 비치는 햇살, 그 햇살을 뒤로하고 달리면 어느새 높은 산에 짙게 깔린 구름, 구름 아래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마치 검은 터널처럼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눈앞은 모든 것이 희다. 사방이 흰 안개뿐이다. 안갯속에 묻혀 있는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1년 전 양명산 좁은 도로를 달릴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때는 미니버스를, 지금은 기차를 탔다. 그때는 가슴을 졸였지만 지금은 마음껏 감상한다. 저 아래로 안개 밑으로 모든 나무와 마을이 꼭꼭 숨었다.
기차는 네 시간 내내 깜깜한 터널과 잠깐 빛나는 햇살, 너무 희어서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산을 헤치며 높은 곳을 향해 달렸다. 그런 운무를 지나야만 아리산에서 멋진 운해와 일몰을 같이 볼 수 있다는 걸 몰랐다. 아리산에 도착하고 나서야, 운무보다 더 높은 곳에 이르렀다는 걸 알았다. 비행기처럼 상공에서 내려다보는 기분. 구름의 형태가 바다처럼 일렁이며 시시각각 달라진다는 것도 이번에 처음 알았다. 빛의 방향에 따라 바람의 숨결처럼 운해가 형태를 바꿨다. 길면 기차, 기차는 빠르다, 빠르면 백두산.... 그리고 백두산 뻗어내려 반도 삼천리.... 노래를 불렀던가. 어쨌든 백두산만큼 높이 올랐다. 아리산 기차역은 해발 2천 미터가 넘는다. 아리산 숙소에 가방을 내려놓고 비탈진 산책로를 걸어 올라갈 때 가슴이 저렸다. 호흡이 쉽지 않았다. 헉헉 거리며 키르기스 비쉬켁을 떠올린다. 눈 오는 날 씩씩거리며 운동장을 몇 바퀴 돌면 녹초가 되어 쓰러져 잠을 잤던 겨울. 고산 지대에 왔으니 산소와 기압에 따라 신체도 적응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배웠던 청춘의 날이 엊그제 같다.
누군가는 대만병이라고 했고 또 어떤 이는 향수병이라고 했다. 고향도 아닌데 단 몇 번의 여행으로 향수병이라니... 떼어내기 힘든 정감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나 역시 약간의 후유증을 거부하지 못한다. 자연스럽게 잊히는 기억을 붙잡고 싶다. 눈앞에 편백나무 숲이 어른거린다. 거실 작은 창 앞에 비쳐오는 햇살은 아리산 주산의 일출과 같은 해일텐데.... 주산의 산등성이에서 떠오르는 햇살을 기다렸던 흥분된 가슴을 꼭 붙잡고 싶다. 희미해지면 야속할지 모른다.
<여덟 살, 혼자 떠나는 여행>. 제목이 좋았다. 나도 여덟 살 때 처음으로 혼자 외갓집에 갔었다. 버스를 몇 번 갈아타고 엄마와 갔던 길을 더듬으며 평교에서 거룡리까지 버스를 타고, 거룡리에서 내려 산전리까지 걸었다. 버스 시간이 안 맞으면 산전리에서 평교까지 가는 길 어디쯤 버스 정류장이 교차되는 곳까지 걸었다. 혼자 외갓집을 찾아가야 했던 긴장이 살아나 <여덟 살, 혼자 떠나는 여행>을 계속 서가에 두었는지 모르겠다.
밥을 먹다 식탁 옆 책장에 꽂힌 그 책을 다시 펼쳤다. 예전엔 전혀 생각지도 못한 강렬한 느낌이 왔다. 이 책 배경은 대만이구나. 바로 알 수 있었다. 과거엔 관심이 없었던, 작가도 지명도 알지 못한 채 그저 이야기의 줄거리만 읽었던 책. 이번엔 달랐다. 작가를 찾아보았다.
번역가가 현지 발음 그대로 '쟈이', '쥬펀'이라 지명을 이름했지만, 도시 이름이 '자이'라는 걸 바로 알 수 있었다. 내가 며칠 전 다녀왔던 그 '자이.' 알고 읽으니 이야기는 더 친근해져 구수한 맛이다. 광산에서 일했다는 걸 보면, '쥬펀'은 '지우펀'이다. 광부도시락으로 유명한 지우펀. 예스진지 패키지 투어 중 한 곳.
작가는 어떤 사람일까. 구글링 한다. 더 번역된 책이 있을까. 링크를 연결해 보지만 절판이다. 대만 여행의 후유증인가 보다. 더 찾아본다.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01324079
그러다 영화를 본다. 구슬치기, 팽이치기, 솥밥, 좌식 밥상, 고물장수, 또다시 내 어릴 적 풍경을 떠올리게 하는 장면들이 연속된다.
여자가 가사일만 잘하면 되지 공부가 왜 필요하냐
대만 할머니의 말이 야속해진다. 우리 또한 한때 저렇게 살았었지. 야자수 풍경은 자이역에서 아리산으로 향할 때 보았던 철길 따라 늘어선 가옥과 교차된다.
똑같이 일본의 강제점령을 경험했기 때문일까. 대만영화에서 내가 어렸을 적 경험했던 감성을 발견하고는 흠칫 놀랐다. 네모난 녹색 칠판, 분필, 흰 셔츠에 검정 플리츠 치마, 책상 배열, 학급의 분위기, 학생들이 부르는 노래, 운동장의 학생 대열, 심지어 체벌까지.... 모두 내 어린 시절 한국 학교의 감성과 다르지 않다.
영화 속 풍경은, 바람은, 태풍은 모든 걸 암시한다. 앞으로 이어질 이야기와 연결된다. 그런 연결고리가 어긋난다면 자연스럽지 않은 시나리오가 되는 걸까, 의문한다.
현실에서 자연은 연관되지 않을 때가 많다. 태풍이 풀면 농민은 벼가 쓰러질까, 과실이 떨어질까 근심걱정으로 잠 못 이루지만, 도시의 급여 생활자는 상관없어 보인다. 긴 연쇄 고리에 의한 폭풍이 불지 않는다면...
대만에서도 2.28 사건이 있었다는 걸 알게 된다. 제주 4.3 사건처럼 정국이 혼란스러울 때. 2차 대전이 끝나고 각 국가에서 벌어지는 폭력사건마저 비슷하다. <작별하지 않는다>를 읽고 소감을 나눌 도서관 수업이 이번 주부터 시작되는데, 대만 도서관에서는 어떤 책을 읽고 나눌까, 성인 독서 모임이 궁금하다.
https://www.youtube.com/watch?v=8nnwVSJLZGg
https://blog.naver.com/reclines/222295435630
25.2.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