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 쉬는 시간

by 조이스랑

동네 모임에서 돌아오는 길은 늘 무거웠다. 똥 가방 신상 얘기, 제주도 골프 여행 계획, 아파트 시세 이야기가 한 시간 넘게 이어지면 뭔가 같이 웃어야 하는 분위기지만 어떻게 맞장구쳐야 할지 몰라 쓰디쓴 커피만 들이켜야 했다.

이제 그런 모임을 가지 않아도 되었다. 브런치 카페 대신 교정으로 향하는 이른 아침, 배낭을 메고 나가는 길은 가벼웠다. 이렇게 멀리 나와 새로운 풍경 속에 섞이면 적어도 그런 주제들이 끼어들 일은 없을 테니까. "내가 한때 그 오픈런하는 가방 디자인 회사 직원이었잖아요. 늘 신상 디자인을 접했지만, 그 휘황한 것들이 이제는 전혀 끌리지 않는걸요. 골프요? 대학생 때 잠깐 배웠었죠. 사회에 나가면 쓸모 있을 거라며 교수님이 권했지만, 정작 적성에는 안 맞더라고요. 그래서 금방 접었어요."

어쩌면 그런 팩트를 넉살스럽게 나열할 수도 있었겠지만, 팩트를 기분 나쁘지 않게 융통적으로 말하는 재주는 없었다. 아예 아무 말하지 않는 게 낫다.


교정에 들어오면 분위기가 달라진다. 상업 시설 하나 없는 고즈넉한 산이 강의실을 감싼다. 오전 9시부터 저녁 6시까지 종일 수업이 이어진다. 어떤 이들은 쉬는 시간마다 달달한 간식을 집어 들고, 또 어떤 이들은 무리 지어 건물 사이 작은 정원으로 나가 몸을 푼다.

"다리가 자꾸 붓지 않아요? 문 하나인데 이 문만 열면 실내 공기랑 너무 달라요. 이렇게 잠깐이라도 스트레칭하면 확실히 버틸 만하더라고요."
"뒤에 앉으니까 잘 안 보여요. 강사가 상단에 자막을 띄워주면 좋을 텐데요. 아까 퀴즈 게임할 때도 글씨가 너무 작아 안 보이더라고요. 얘들이, 선생님, 안 보여요. 하는 말이 이해돼요. 큐알 코드에 사람 머리만 살짝 있어도 이게 인식이 안 되더라고요."
"저도요. 사진 찍어 카톡으로 보내고 링크 타고 들어가는 데 시간이 꽤 걸리더라고요. 화면 전환이 너무 빨라서 잠깐 놓치면 못 따라가겠던데요. 우리도 이 정도인데 처음 접하는 애들은 로그인하다가 시간 다 간다는 말이 맞아요."
"젊은 강사라서 그래요. 머리로는 나이 든 수강생 힘들다는 걸 이해하겠지만요. 우리 나이쯤 돼 봐야 이 나이 듦이 어떤지 피부로 느낄 수 있을 걸요. 우리가 다 이해해야죠. 뒷자리라 안 보인다는 핑계로 잠깐 쉬었네요."

체조하듯 두 손을 하늘로 치켜들며 좌우로 몸을 푸는 이들은 아이처럼 재잘거린다. 어떻게 하면 아이들을 조금 더 잘 이해할 수 있을지, 어떻게 더 효율적으로 가르칠 수 있을지. 만난 지 겨우 이틀인데 다양한 수업 환경에서 왠지 사람 냄새가 느껴진다. 명품 가방, 해외여행, 부동산 얘기가 없어서 숨통이 트인다.


잠깐 생각에 잠긴다. 한때 나는 무슨 일을 해도 ‘효율적인 성과를 내야 한다’고 믿었다. 수영을 배워도 국가대표 선수에게, 성악을 배우면 프로 성악가에게 배웠다. 아무한테나 배우고, 아무 데서나 일하면 큰 일 나는 줄 알았다. 경쟁에서 뒤쳐지지 않으려면 반드시 검증 받은 사람에게 배워야 한다고 생각하던 시절이었다.

해외에 사는 친척들, 자랑할 만한 영재들까지. 가족이든 친척이든 친구든 좋은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그 반대도 있다. 말하지 않고 말할 수 없는 불편한 저편의 이야기가 있다. 한때 잘 나가던 시절이 지금의 나를 어떻게 달라지게 할 수 있나. 이런 집착은 내 안에 나도 모르게 깊숙이 쌓여 있을지 모른다. 이제는 그 시절을 돌아보고 싶지 않다. 더는 프로 코치를 찾아갈 여유도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런 내용은 더 이상 내 일상의 주제가 아니다. 흘러간 것을 흘러가게 하고, 피할 수 있으면 피하는 것도 방법이지 않을까. 나와 맞지 않는 것에 억지로 나를 구겨 맞추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지금의 나는 배낭을 메도 괜찮고, 명상복에 티셔츠를 걸쳐도 괜찮다. 잘 차려입었던 예전 모습 대신 그냥 자연스럽게 그리고 편하게 살아가는 이 순간이 좋다.

아까 정원에서 체조하던 동료들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글씨가 작아 안 보인다는 말, 화면 전환이 너무 빨라 따라가기 어렵다는 말. 나도 어떤 이들 앞에 가르치는 자로 설 수 있는 날이 오기만을 바란다.

나의 겉모습은 세련되지 않았지만, 적어도 내가 다루는 수업만큼은 학생들을 편안하게 해 주되 최신 트렌드를 놓치고 싶지 않다. 어떤 대상을 만날지 모르겠지만 학생들 눈높이에 따라 글씨 크기를 조절하고, 충분한 시간을 주고, 쉬는 시간에는 함께 정원에 나가 스트레칭하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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