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진짜 서운했다.
내 영어는 10년째 기초 수준이다.
맹물 같은 아메리카노를 닮은 끈기와
진한 에스프레소 더블샷 같은 열정이 만나
어디선가 효과 있다는 소문만 들리면
일단 주저 없이 실행부터 해본다.
로또를 사듯,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이번엔 문장 외워서 대화하기에 도전했다.
혼자 해보려 했지만, 뭔가 맛이 안 살아
하루 종일 틈만 나면 남편과 영어 문장을 주고받았다.
나의 과한 열정에 입에서는 단내가 나는 것 같았고,
그 문장들은 달디단 시럽 원액을 먹은 것처럼
쳐다보기도 싫었다.
그래도 나를 위해 ‘희생’해 준 남편이
내 짝꿍이라 참 좋고 고마웠다.
우리가 외운 문장은 이랬다.
B: Good morning. Did you sleep well?
A: Good morning! I slept well. How about you?
B: I slept well too. Did you have any dreams? …
어느새 문장은 술술 주고받게 되었다.
그런데 남편이 단어 하나만 바꿔 묻자
갑자기 머리가 멍해졌다.
나는 풀이 죽어, 하루 만에 그만두었다.
며칠 뒤, 외출을 앞두고 옷을 고르고 있었다.
연한 하늘색 티셔츠에 청바지,
그리고 검은색에 가까운 짙은 청색 니트 조끼.
베란다 창가에 서서 빨래를 널고 있는데,
운동을 마친 남편이 돌아왔다.
약속 시간이 빠듯해 서두르느라
남편을 쳐다볼 틈도 없었다.
나는 그를 등진 채 물었다.
“나 이렇게 입으면 추울까?”
“조끼 하나 입고 나가.” 남편이 말했다.
...어? 뭐지? 조끼 입었는데?
살짝 인상이 찌푸려졌다.
기분이 상했지만,
다시 최대한 상냥하게 물었다.
“이렇게 입고 나가면 어때?”
남편은 또 같은 말을 반복했다.
“조끼 입고 나가.”
그 순간, 확신이 들었다.
‘아, 이 사람. 나 안 봤구나...’
“조끼 이미 입었는데 왜 또 입으라고 하지?”
서운함이 밀려왔다.
마치 외도 현장을 급습하듯
태연한 척 물었다.
“나 지금 옷 입은 거 봤어?”
남편의 대답은 뻔뻔했다.
“봤어.”
그 한마디에,
내 참을성은 로켓 타고 안드로메다로 사라졌다.
보기도 싫고, 밉고, 서운하고, 짜증나고, 화까지 났다.
고작 3초. 그 짧은 3초조차 나한테 안 줬다는 게 너무 서운했다.
신발을 신으며 말했다.
“조끼 입었잖아! 왜 자꾸 입으래? 날 보긴 한 거야?”
그리고는 무표정하게,
뒤도 안 돌아보고 집을 나섰다.
이 봄, 벚꽃은 만개했고 동백꽃도 예뻤지만
내 마음에 핀 문장은 하나였다.
“너랑 안 놀아! 너 나빠! 배신자!”
집에 돌아오니, 서운함은 더 짙어졌다.
조용히 방에 들어와 책을 펼쳤다.
잠시 후,
엄마가 아끼는 꽃병을 깬 아이처럼
남편이 쭈뼛거리며 방에 들어왔다.
“미..안....해..”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에,
콜라병에 가득 채워둔 서운함이
흔들려 손쓸 틈도 없이 터져버렸다.
말하고 싶지도 않았지만,
차가운 고드름 같은 “됐어.”를 툭 내뱉었다.
남편은 아무 말 없이,
물고기를 기다리는 낚시꾼처럼
내 옆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침묵 속에
기나긴 5분쯤 흘렀을까.
그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Did you sleep well?”
순간 어이없었지만,
나도 모르게 튀어나올 뻔했다.
“Good morning! I slept well. How about you?”
우리가 이 문장을 얼마나 주고받았던가.
남편은 한번 더 말했다.
“Did you sleep well?”
그리고 그 뒤엔
“How about you?”
가 가벼운 발걸음처럼 따라왔다.
그 순간,
마음속 짜증도 미움도
남편의 영어와 함께 스르르 사라졌다.
얼음처럼 굳었던 마음이,
한여름 햇살 속 아이스크림처럼
조용히 녹아내렸다.
남편의 낚시는 절묘했다.
미끼를 던진 그는 대어를 낚았고,
나는 물고기가 되어
그 낚싯줄 끝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황당함, 허무함, 서운함을 비집고
웃음이 방 안 가득 퍼졌다.
석 달 열흘 삐지겠다고 다짐에 다짐을 했는데...
진짜 많이 서운했고, 정말 꼴도 보기 싫었는데...
석 달 열흘 삐지면 손해는 누구?
바로 나지, 뭐!
그날 이후,
우리 부부는 얼굴만 마주치면 수시로 말한다.
“Did you sleep well?”
그 말만 들으면
그날의 웃음이 다시 떠오른다.
또 웃게 된다.
아직 영어는 서툴지만,
사랑은 꽤 유창하게 주고받고 있는 거겠죠?
안녕하세요, 빨간머리 푸입니다.
그날 남편은
운동하고 피곤해서
제 말에 팔만 슬쩍 봤다고 하네요.
지금 생각하면
참 별거 아닌데
그땐 왜 그리 서운했는지...
사실, 그 순간 말 걸기 쉽지 않았을 텐데.
어려운 타이밍에
용기 내어 다가와 준 남편이 지금은 고맙기만 해요.
삶이란 그런 거겠죠?
사소한 일이지만 진심이 엇갈리고,
작은 말 한마디에 얼음이 녹기도 하는...
오늘도,
마음 따뜻한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