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로 오갈 때 꼭 지나는 대봉 사거리를 마주하고 양쪽에 서점이 있었다. 학교 쪽 그러니까 대봉 성당 쪽에 제일서적이 맞은편에 삼화서적이 있었다. 제일서적은 문방구류나 잡지, 참고서, 문제집이 주를 이루었다. 난 문방구류는 주로 제일서적에서 구입했다. 아주 드물게 팝송책을 사기도 했다. 영어 공부 한답시고 원문 아래쪽에 구문 설명이 들어간 붉은 표지의 다이제스트판 소설도 구입했다. 수요가 적어서 인지 모퉁이 구석자리 맨 아래칸에 꽂혀 있었다. 길 모퉁이를 따라 타원으로 길쭉한 공간의 제일서적은 드나드는 손님이 더 많아 번잡했다. 학용품이나 전과며 간단한 주전부리를 사러 오는 국민학생에서부터 자습서 참고서를 찾는 중고등학생들로 등하교 시간에는 제법 붐볐다. 그래서 직원도 두엇 되었다.
네모진 모양의 삼화서적은 집으로 갈 때 타는 16번 버스 정류장 바로 앞자리였다. 문을 들어서자마자 마주치는 것은 천장에 매달리거나 진열대에 세워진 광고 전단과 한가운데 자리를 차지한 참고서와 문제집, 최신 소설과 수필, 잡지류이다. 그보다 내 시선을 잡아끄는 것은 벽을 빙 돌아가는 서가에 빼곡 꽂힌 총서로 나온 소설과 시집을 비롯 삼중당 문고나 범우사 수필집이다. 내가 제일 갖고 싶었던 것은 동서문화사의 번역판 고전 소설이었다. 교과서보다 약간 작은 판형에 본문 종이도 매끈하고 빳빳하고 겉표지는 비닐처럼 반질한 종이여서 더욱 내 시선을 끌었다. 얼마나 표지의 종이 질에 매달렸으면! 참고서 고를 때 첫째 기준이 표지의 맨질맨질함이었다!! 예컨대 국어 참고서는 지학사에서 나온 하이라이트 국어였다. 초록 바탕에 빤질빤질한 표지가 내 맘에 꼭 들었다.
아직 청초한 아름다움을 간직한 사장님은 인상도 부드럽고 늘 친절하였다. 워낙 자주 들러 꼭 누님 같은 사장님과도 낯이 익었다. 아마도 난 좀 특이한 손님이었을 테다. 다른 학생들은 참고서나 문제집을 주로 사러 들렀을 게 뻔한테 난 주로 소설이나 수필집을 사곤 했으니까. 일단 서점에 들어가면 서가를 훑어보고 다음에 살 책을 물색할 양으로 꽤 오래 머물렀다. 용돈이 빠듯해서 내 방에 남아 있던 작은누나의 가정, 가사 교과서와 참고서, 지리부도 등을 헌책방에 갖다 팔고 삼중당 문고 소설을 사곤 했다. 상업적인 머리라곤 전무한 내가 어떻게 헌책방에 책을 팔아 돈을 받을 생각을 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책을 내다 판다는 발상은 획기적이지 않나! 다른 사물과 달리 내게 책은 진리를 품은 신성한 존재였으니. 고등학생 때까지 난 절대로 책에 밑줄을 귿지 않았다. 지금도 거의 변함이 없다. 줄을 쳐도 연필로 하지 볼펜으로 거의 한 적이 없다. 때로 책을 다시 펼치면 예전에 그은 밑줄을 지우개로 지운다. 워낙 깨끗하게 책을 모신다. 어쩌다 용돈에 좀 여유가 생겼을 때면 삼화서점으로 제깍 달려가 문고판이 아닌 동서문화사의 소설책을 사모으곤 했다. 읽는 재미뿐 아니라 모으는 재미도 솔솔찮았다.
시험 기간이 아니면 나는 숙제를 대충 끝내고 밤마다 국내 소설은 물론 외국 번역 소설들을 걸신들린 듯 읽어댔다. 작은형이 남겨둔 소설이며 시집이 제법 내 방에 남아 있었다. 그때 내 우상은 헤르만 헤세였다. 이것으로 갈증을 달래기는 턱없이 부족했다. 아무리 두꺼운 소설이라도 하룻밤에 다 해치우곤 했다. 전광석화 같은 속도로 책을 미친 듯이 읽었다. 그러다 보니 국어시간에 그냥 본문을 소리 내어 읽는 속도와 내가 눈으로 읽는 속도는 엄청난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다. 결과 암기 과목 시험공부는 공부라고 할 게 없었다. 읽는 속도가 다른 친구들보다 적어도 세 배는 빨랐으니까. 다른 친구들이 두세 시간 할 것을 한 시간이면 충분했다. 이때의 나쁜 독서 습관이 제법 오래갔다. 빨리 읽는 데만 열 올렸지 내용을 진지하게 파악하는 것은 생판 뒷전이었으니. 건성으로 줄거리만 따라가는 책 읽기. 나중에 전공서적을 주의 깊게 읽을 때 오래된 나쁜 버릇 때문에 무척 고생했다. 빨리 독파하는 게 무슨 장땡이라고! 의미 파악도 제대로 못하고서 읽어냈다는데 만족했으니… 그럼에도 독서열 하나만은 대단했다. 그리고 그 무서운 속도와 엄청난 집중력!! 공부를 그렇게 해야 하는 건데, 쯪…
대학 들어간 다음에도 한 동안 방학 때 내려오면 삼화서적을 더러 들리곤 했다. 대학생이 되어 서점에 갈 때면 사장님은 차나 간단한 주전부리도 내놓곤 했다. 고를 책이 더 많은 큰 서점을 상대하게 되면서 삼화서적과는 작별하였다. 서울에서는 광장서적보다는 교보서적이나 종로서적을 대구에 오면 중앙통의 대구서적을 찾았다. 굳이 큰 서점으로 간 것은 영어나 프랑스어 원서가 있어서였다. 용돈을 아껴 문고판을 사모으던 시절 삼화서적 같은 동네서점은 하나둘씩 사라진 지 벌써 오래전 일이다. 지금은 대형 서점마저도 인터넷 판매로 휘청거린다. 서울 시내에 나가면 단골 약속 장소이던 종로서적이 문 닫은 지도 한참 되었으니…
이제 물건을 보며 만져보고 직접 고르기보다 매장에 가지 않고 이미지를 보고 클릭해서 구입하는 시대다. 클릭만 하면 결제도 배달도 다 된다. 굳이 다리품을 팔 이유가 없다. 시간도 절약이다. 게다가 매장보다 인터넷 구매가 가격도 더 싸다. 인터넷 만만세! 그렇지만 편리함과 신속함이 다는 아니다. 책이 가지는 물질성과 서점이 가지는 공간성, 그리고 책을 사려는 사람과 서점 사이에 맺어지는 훈훈한 관계도 중요하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