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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스의 키스로 되살아나는 프시케

Antonio Canova (1757-1822), Rome, 1793

by 파샤 pacha

[에로스의 키스로 되살아나는 프시케]는 [서 있는 에로스와 프시케](1797)와 마찬가지로 영국 정치인이며 미술품 수집가 존 캠벨(John Campbell)이 1787년 주문하지만 완성되고도 아틀리에에 남아 있다가 1801년 나폴레옹 매부 뮈라(Joachim Murat) 장군이 사들인다. 그러다가 1808년 나폴레옹이 처남으로부터 입수하여 [서 있는 에로스와 프시케]와 함께 루브르로 들어오게 된다.


이 작품이 선보인 뒤로 인기가 하늘로 치솟자 똑같이 만들어 달라는 주문이 쇄도한다. 대부분 카노바 아틀리에의 작품이라고 보면 된다. 그렇지만 조각은 기본적으로 협업이라 모델 제작이나 실제 조각에서 제자나 협력자의 손길이 들어가지 않을 수 없다. 이 작품에 관한 한 유사품에 주의해야 한다. 엇비슷한 형태로 로마나 생페테르스부르그에도 있다. 루브르에 있는 게 그야말로 오리지널이다.


오른쪽으로 보이는 쇠 손잡이는 뭐 하라고 붙여놓았나. 처음에는 손잡이를 잡고 돌려볼 수 있었다. 지금은 작품이 고정되어 있으니 한 바퀴 돌아가며 구경하라. 바라보는 각도에 따라 작품이 주는 깊이감이 달라진다. 특히 빛 방향에 따라 어두움과 밝음이 대조되면서 조각이 한층 돋보인다. 드러나는 부분과 감춰진 부분의 절묘한 조화를 느껴보라.


에로스는 잠을 거둬들여 물병에 다시 가두고 그 옆에 놓인 화살로 숨이 끊긴 것 같은 프시케를 건드린다. 잠자는 에로스를 프시케도 이 사랑의 화살로 찔러보았다. 그러니 둘 다 가슴이 불타오를 수밖에. 바로 시련을 겪고 오래 헤어졌다 만나 다시 불타오르는 사랑의 절정 직전 장면을 묘사한다. 이 작품을 돋보이게 만드는 또 다른 요소다.



[에로스와 프시케] 이야기는 아풀레이우스(Lucius Apuleius : 125-170)의 [황금 나귀]에 삽입된 이야기 속의 이야기로 나온다. 호기심 많은 주인공 루시우스는 주술에 너무 빠진 나머지 나귀로 바뀌어 인간 세상의 갖은 쓴맛을 다 겪고 나서 장미 화환을 먹은 뒤에야 다시 사람으로 되돌아온다. [황금 나귀]는 부제가 [변신]으로 루시우스가 이곳저곳을 떠돌며 여러 부류의 인물을 만나는 피카레스크적 구성을 보여준다. 그중 도적떼한테 잡혀온 처녀한테 노파가 슬픔을 달래려고 들려주는 이야기가 [에로스와 프시케]이다. 구전으로 전해 내려 오는 콩트가 이야기의 원형이 아닌가 싶다.


시어머니 비너스(아프로디테)가 낸 시험문제 네 개를 다 풀어야 프시케는 에로스를 다시 볼 수 있는데... 비너스는 미의 여왕 자리를 프시케한테 물려주었나요? 비너스의 슬픔은 여기서 비롯된다. 그럼 도대체 비너스의 슬픔이란 뭐요?


옛날 옛적에 어떤 왕이 있었는데 딸이 셋이었다. 첫째 둘째 딸은 보통의 미모를 타고났는데 셋째 딸은 너무도 아름다워서 이루 다 표현할 수 없었다. 셋째의 이름은 프시케. 완벽한 미모의 프시케가 미의 여신을 능가한다는 소문이 사방에 퍼져 나갔다. 그런데 첫째 둘째와 달리 프시케는 신랑감을 찾지 못했다. 신탁은 프시케의 신랑감은 흉측한 괴물일 거라고 예언했다. 그래도 왕은 셋째 딸을 시집보내기로 결정하고 신탁에 따라 언덕 위 깎아지른 바위 위로 데려간다. 부드러운 서풍의 신 제피로스가 프시케를 에로스(큐피드)의 황금 궁전으로 데려다준다.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 에로스는 밤에만 프시케를 만나 사랑을 나누다가 동이 트면 사라진다. 에로스와 사랑을 지속하려면 프시케는 애인의 모습을 보면 절대 안 된다.


달콤한 사랑에 빠져 행복하지만 외로움을 견디지 못한 프시케는 에로스한테 언니들을 초청해 달라고 애원한다. 괴물한테 시집가서 죽었다고 여기던 언니들이 궁금해서 동생집을 찾아간다. 동생 신랑 모습은 볼 수 없었지만 금은보화를 바리바리 선물 받아 되돌아간다. 으리으리한 황금 궁전에 사는 여동생을 보고 하잘 것 없는 불구 신랑들과 결혼한 두 언니들은 질투심에 불붙는다. 둘은 다시 동생집을 찾아간다. 이번에는 프시케한테 괴물 신랑이 언제 널 해칠지 모르니 네가 먼저 제거해야 한다고 부추긴다. 언니들 말에 솔깃해진 프시케는 신랑이 잠든 틈을 타서 칼과 램프를 들고 괴물을 물리치기로 한다. 램프를 켠 순간 눈부시게 아름다운 사랑의 신일 줄이야! 깜짝 놀란 프시케의 램프에서 기름이 떨어져 에로스의 오른 어깨에 상처를 입힌다. 프시케가 금기를 깼으니 에로스는 날아가 버린다. 이리하여 프시케의 에로스 찾아 삼만리가 시작된다.


낙심한 프시케는 에로스를 다시 만나려고 도움을 청하기 위해 여기저기 신전을 헤매 다닌다. 데메테르도 헤라도 비너스의 분노를 두려워한 나머지 도움을 주지 않는다. 프시케는 절망한 나머지 강물에 몸을 던져 자살을 시도한다. 강의 신이 구해내어 못난이 신 판을 만나게 한다. 판으로부터 에로스가 프시케를 완전히 버린 게 아니라는 위안의 말을 듣고 에로스를 되찾을 결심을 굳힌다. 결국 시어머니 비너스 신전의 문을 두드린다. 이때 에로스는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어머니 신전에 머무는 중이다.


급기야 프시케의 소문이 비너스한테까지 들어갔다. 비너스 신전에는 제물이 줄어들고 향은 끄지고 싸늘한 재만 남는다. 질투심을 느낀 비너스는 개구쟁이 망나니 아들 에로스를 보내 프시케가 가장 추한 신랑감한테 사랑에 빠지도록 심부름을 시킨다. 프시케를 본 에로스는 어머니의 명을 뒤로한 채 스스로 사랑의 화살에 찔려 프시케한테 사랑에 빠진다.


배신감을 느낀 비너스는 프시케를 곤경에 빠뜨리기로 작심한다.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풀 수 없는 네 가지 시험문제를 낸다. 모두 누군가가 도와주어서 프시케는 세 가지 문제를 풀었다. 첫 번째는 창고에 비둘기 모이로 쓰는 곡식들이 뒤섞여 있는데 하루 만에 종류별로 갈라 정리하는 일이다. 개미들이 도와줘서 해결을 한다. 두 번째는 강가에 사는 사나운 양 떼의 황금 양털을 구해오는 일이다. 이 역시 강의 신 갈대의 도움으로 어렵지 않게 통과한다. 세 번째는 지옥의 강 스틱스에서 검은 물을 길어오는 문제다. 제우스의 심부름꾼 독수리가 도와준다. 물론 비너스는 프시케가 스스로 해내었다고 믿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프시케한테 지옥으로 내려가 지옥의 여왕 페르세포네한테 여신의 아름다움 한 움큼 얻어 유리병에 넣어오라고 명령한다.


지옥 입구에 자리한 높은 탑의 정령이 지옥으로 내려가는 방법과 거기서 빠져나오는 방법을 세세하게 프시케한테 가리켜준다. 성공적으로 임무를 완수하고 지상 세계로 올라온 순간 프시케는 참을 수 없는 호기심이 발동한다. 오르페우스도 그 호기심 때문에 유리디체를 잃지 않았던가! 뚜껑을 열자 거기서 나온 김을 쐬고는 치명적인 잠에 빠져든다. 그때 어머니의 감시망을 뚫고 빠져나온 에로스가 날개 달고 날아와서 잠든 프시케를 키스와 사랑의 화살로 다시 살려낸다.


가장 감동적인 키스 장면을 묘사한 조각으로 두 사람의 팔이 만들어내는 우아한 곡선미는 음악의 선율에 맞춰 듀오로 춤추는 발레의 한 장면 같다.

묘사 부위에 따라 다른 끌 쓰임새를 눈여겨볼 만하다. 아랫도리를 살짝 휘감으면서 바위를 덮는 매끈한 옷감이며, 머리카락은 꼬불꼬불하게, 피부는 반들반들하게 바위는 우툴두툴하게 처리한다. 직선과 곡선의 오묘한 조화도 완벽하다.


에로스한테 날개를 떼버리면 더 좋을 것 같은데... 저 뒤쪽 스탄가(Stanga)궁 개선문 앞에서 쇠사슬에 묶인 미켈란젤로의 미완성 [반항하는 노예]가 이쪽을 노려본다. 날개를 떼버리면 망나니 같은 나쁜 짓은 더 이상 못하리. 이런 날개는 사족일 수도 있다. 날개가 없다면 더 현대적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1788년 작가가 수정을 가해 날개를 제거한 모형을 만들기도 했다. 사실 이런 완성작으로 가기까지는 여러 차례 수정을 가하기 마련이다. 어쨌거나 고양의 느낌을 주기 위해서는 날개가 필요하겠다.

해밀턴(Hugh Douglas Hamilton), 에로스와 프시케의 석고 모델 앞에서 Tresham과 함께 아틀리에에 있는 카노바, 파스텔, 런던 빅토리아 알버트 박물관

이렇게 빈틈없이 매끈하게 마무리된 걸 추구하면 매너리즘에 빠질 수 있다. 잘 빚은 항아리 이상이어야 뛰어난 예술품이 되지 않을까. 그걸 뛰어넘는 치열한 작가혼이 배어들어야 한다. 이 작품 역시 완벽한 기하학적인 아름다움에서 어쩔 수 없는 일말의 아쉬움도 남는다. 보는 사람한테 약간 빈틈과 신비를 남겨두어야 하지 않을까.


맨 처음 두 시선이 마주쳤을 때 피어나는 순간의 감정을 사랑이라 하던가. 그 소중한 시간은 오래 지속되지도 않을뿐더러 오래가도 처음의 신선함은 사라진다. 사랑이 공고해졌다고 느끼는 순간 이미 변질되기 시작한다. 흔히 사랑의 하향곡선을 막아보려고 안간힘을 다해 그 본질은 뒤로 한 채 사랑의 행위만을 하릴없이 반복하는지 모른다. 대부분 사람들은 그게 사랑이라고 믿는다. 그건 어쩌면 꺼져가는 사랑의 불꽃을 애써 유지하려는 허망한 몸부림에 지나지 않는다. 그 유일하고 귀한 순간이 사라지면 그걸 되살리려고 부질없는 행위만 반복하는 것이다. 긴장감이 떨어지고 습관이 되어버린 사랑이다. 그리하여 사랑의 드라마는 결혼 아니면 죽음으로 끝나게 마련이다. 사랑이 이루어졌다거나 실패하면 더 이상 이야기는 연장될 수 없다. 서로 등 돌리고 입이 찢어지도록 하품해 대는 오노레 도미에의 [결혼 여섯 달 뒤]라는 풍자화가 자꾸 떠오른다.


그럼 비너스의 슬픔은...? 중년 여성의 위기...



카노바, [에로스와 프시케], 1797. 영혼을 상징하는 나비를 쥐고 있다.

보르게제 컬렉션, [에로스와 프시케], 2세기, 18세기에 복원.


참고 자료

Isabelle Leroy-Jay Lemaître, Psyché ranimée par le baiser de l'Amour, musée du Louvre, 2003.

Apulée, L'âne d'or ou les Métamorphoses, Gallimard, 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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