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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아시스를 들으며 2

by 파샤 pacha

오아시스의 두 축은 갈라거(Gallagher) 두 형제다. 동생 리암(Liam)이 주로 노래를 하고 형 노엘(Noel)은 가끔 노래도 부르고 작사 작곡에다 리더기타리스트다. 30대 초 이미 대머리가 된 기타리스트 본헤드(Paul Bonehead Arthurs)는 창립 멤버(밴드 이름이 Rain에서 리암이 들어가면서 Oasis로 바뀐다.)로 출발 1999년 베이스 주자 긱시(Paul Guigsy McGuigan)과 함께 그룹을 떠났다가 2025년에 되돌아왔다. 이번에 긱시는 합류하지 않았다. 대신 2000년대 초반에 오아시스에 합류한 젬 아처(Gem Archer)와 앤디 벨(Andy Bell)이 이번 공연에 기타리스트로 되돌아왔다. 멤버 중 드러머가 여러 차례(Tony McCaroll, Alan White, Zak Starkey) 교체되었다. 창립 멤버 토니 맥카롤은 노엘과 드럼 기교를 두고 다투고 해고된 드러머로 1994년 데뷔 앨범까지만 활약했다. 그 뒤를 이은 알란 화이트는 2004년 오아시스를 떠나고 자크 스타키가 들어왔다. 스타키는 바로 비틀즈 드러머 링고 스타의 아들이다. 그 뒤 스타키도 크리스 샤록(Chris Sharrock)으로 교체되었다. 25년 재결합 공연에 합류한 드러머는 조이 바롱커(Joey Warongker)다. 단순하고 묵직하면서 거친 오아시스 사운드에 꼭맞는 드러머가 없는 걸까?


결국 오아시스의 핵은 리암과 노엘이다. 둘 중에 하나가 빠져도 오아시스는 절름발이가 된다.

리암과 노엘 형제(2005)

2000년대에 들어와 오아시스는 2009년 해체되기 전까지 앨범 네 장을 더 발표했다. 그렇지만 그 전에 비해 이렇다할 좋은 평가도 상업적 성공도 얻지 못했다.


오아시스가 해체되고 리암은 2010년에 Beady Eye 그룹(Liam, Gem Archer, Andy Bell, Jeff Wootton, Chris Sharrock)을 만들고, 2011년 노엘은 High Flying Birds를 결성한다. 2014년 리암은 버디 아이를 해체하고 2017년부터 솔로로 활동한다. 그렇지만 오아시스 해체 이후 리암과 노엘 둘 다 오아시스의 명성에 한참 못 미치는 인기를 누린다. 그룹의 유명세 이면에 형제간 불화도 각종 매체를 달구었다. 마침내 각종 미디어의 주목을 끌며 25년 7월 4일 카디프에서 오아시스는 재결합 순회 공연을 시작했다. 형제가 재결합한 이유는 경제적인 이득을 노린 거라고 하는데... 그들의 나이를 생각하면 맞는 말. 올해 리암이 53세, 노엘이 58세다. 샤우트 창법으로 노래하는 로컨롤 가수로서는 힘이 딸리는 연령대에 가까워졌다.


어쨌거나 공연장마다 매진이다. 10월 21일 서울에서도 한 차례 공연이 예정되어 있다. 놀랍게도 25년 9월 들어 오아시스 공식 사이트에서 한글 가사 자막 서비스까지 제공하기 시작했다. 언젠가부터 한국은 대중 음악에서 무시할 수 없는 시장이 되었다. 그전에 유명 가수들은 일본만 거쳐가고 한국에는 오지 않았었다. 오더라도 전성기가 한참 지나 은퇴 무렵이나 왔다. 눈부신 경제 발전에 힘입어 한국의 시장 가치가 한껏 올라간 것!



Stand by me 한국어 자막 영상(25.09.11)

다섯 살 터울인 형제는 아주 어릴 때부터 맞붙어 뒤엉겨 싸웠다. 아들 셋인 가난한 집에서 맏이 폴은 방을 따로 차지하고 둘째와 막내가 방을 같이 썼다. 같은 밴드에서 활약하면서도 끊임없이 티격태격 쌈박질. 아일랜드 이민자 출신의 하층 부모한테서 태어난 삼형제. 맨체스터 변두리의 극빈층이 모여사는 동네에서 유일한 즐거움이라고는 맨체스터 시티의 축구였다. 재결합 공연하는 지금 무대 뒤에 이 구단 감독 구아디올라의 마분지 초상을 대부처럼 세워두고 연주한다. 그들의 아버지는 자식이 화풀이 장남감인양 걸핏하면 두들겨패곤 하였다. 특히 맏이 폴과 둘째 노엘을 심하게 때린 나머지 말더듬이 지경까지 이른다. 급기야 이들의 어머니 페기는 자식들을 보호하려고 이혼한다. 이혼하고도 6년 뒤 페기는 리암이 열 살 때 세 아들을 데리고 이사한다.


폭력적인 아버지를 보고 자란 리암과 노엘은 걸핏하면 서로 치고받고 싸웠다. 또 둘은 학교에서도 말썽꾸리기 악동이었다. 리암은 학교에서 싸움을 벌이고 15세에 퇴학당했다. 동네 자전거 가게에서 도둑질도 일삼았다. 노엘은 열세 살 때 식료품점을 털었다가 보호 관찰로 가석방된다. 자유가 제한되어 마음대로 이동할 수 없던 이 시기에 노엘은 아버지가 남겨준 기타로 혼자서 기타를 배우기 시작한다. 열다섯에 노엘은 교사한테 밀가루 포대를 집어던졌다가 퇴학당한다. 청소년 시절 그는 길에서 여러 차례 카스테레오를 훔치고 훌리건 패거리와 어울렸다. 퇴학 당하고 나서 두 형제는 아버지가 근무하는 부동산 회사에서 같이 일을 하였다. 아버지와 아들들의 관계가 좋을 리 없었다. 일하는 중에 형제는 걸핏하면 말싸움을 하는 통에 거의 매일 저녁 9시나 되어야 일을 마치곤 했다. 마침내 노엘은 브리티쉬 가스(British Gas) 계열 회사로 일자리를 옮겼다.

둘 다 악동이지만 형보다 동생이 더 그침없다. 오르한과 너스렛과 비슷하다. 그렇다고 노엘은 너스렛 같은 모범생은 절대 아니다.

난폭과 괴짜로는 동생 리암이 형 노엘을 앞찌른다. 호텔 방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같이 사진찍자는 팬한테 박치기를 하고 기자를 폭행한다. 1996년 메인 로드(Maine Road) 공연에서 Whatever를 부를 때 먼저 관중한테 떼창 기회를 주지 않았다고 노엘이 연주를 멈추자 리암은 노래하지 않는다. 결국 노엘이 대신 부른다. 1996년 네브워쓰 공연에서 끊임없이 무대를 누비면서 리암은 Cast no shadow를 부를 때 간주를 이용해 담배를 꼬나문다. 2010년 브리트 어워드(Brit Awards) 수상식에서 마이크와 트로피를 관중석으로 집어던진다. 영국 문화와 다르다고 미국과 호주 사람들을 대놓고 헐뜯는다. 이 때문에 노엘과 사이가 아주 나빠진다. 걸핏하면 형과 말다툼을 벌이고 쌈박질까지 간다. 2002년 12월 독일 뮌헨의 바에서 싸움을 벌이다 이가 몇 개씩 부르져 공연이 취소된다.


노엘은 일하다가 강철관이 떨어지면서 오른발을 다친다. 보직을 창고 경비로 옮긴다. 위기가 기회였다. 이때(80년대말) 기타 연주 실력을 더 연마하고 작곡도 시작한다. 이미 첫 번째 앨범에 들어가는 Live Forever와 Columbia를 썼다고 한다. 한편 노엘은 기타리스트 본헤드가 이끄는 레인의 가수로 발탁된다. 다른 밴드(Inspiral Carpets)에서 활약하다 탈퇴한 노엘이 오아시스 멤버로 들어온다. 노엘이 보기에 레인은 수준이 형편없는 밴드였다. 노엘이 참가하면서 밴드는 눈부신 변화와 발전을 거듭하여 90년대 중반 스웨드나 블러를 제치고 브릿 팝의 대표 주자로 발돋움한다.


오아시스의 음악은 짬뽕? 펑크, 팝, 록 발라드, 사이키델릭, 포크, 리듬앤블루스... 감각적으로 다가오는 첫 번째 느낌은 뭐 약간 복고풍이 아닌가? 멜로디는 단순하고 완만해서 귀에 듣기 편한 리듬이다. 주로 노엘이 백 보컬로 부르는 반복되는 후렴구가 많다. "I said maybe", "saves me", "Some might say", "Don't look back in anger" "stand by me, nobody knows, the way it's gonna be"... 따라부르기 좋은 응원가 같다. 실제 공연에서 특히 노엘은 노래를 멈추고 청중들이 떼창하는 기회를 준다. 90년대 오아시스 음악은 alternative rock, Britpop, pop rock 등으로 분류된다. 노동당의 토니 블레어가 집권한 90년대 영국 문화에 새바람을 불러일으키는 현상으로 록이 아니라 브릿 팝으로 부른다. 경쟁 밴드이던 블러(Blur)가 대표적이다.


대부분 히트곡을 작사 작곡한 이가 노엘이라 분위기는 엇비슷하다. 가사를 제대로 못 알아듣기에 이 곡이 이 곡 같고 저 곡이 저 곡 같다. 처음 들었을 때 좀 느리다고 느꼈다. 그런데 리암의 목소리가 그걸 잠재워주었다. 존 레논의 음색과 얼핏 닮았다. 리암 자신이 레논의 화신이라고 우기기도 했다. I am the Walrus. 성량의 풍부함도 마찬가지다. 그가 오아시스의 목소리고 얼굴이다. 호소력 강한 리암의 가창력이 청중을 사로잡는 가장 큰 열쇠다. 거칠기도 하지만 레논 같은 따뜻한 음색이 중독성을 가졌다. 언제 들어도 좋아서 자꾸 듣고 싶은 목소리다. 목에서 올라오는 앵앵거리는 소리가 아니라 복부 깊은 곳에서부터 끌어올리는 울림이 큰 목소리다. 숨쉴 새없이 내뱉는 가사며 그에 맞춰 올라가는 곡조가 긴장감을 절정으로 몰고간다. 리암만큼 우렁차고 박력넘치는 목소리가 또 어디 있을까. 레논이나 길런의 전성기가 떠오른다.


리암의 무대 매너는 정말 특이하다. 로큰롤 가수치고는 과장된 몸짓이며 관중을 흥분시키는 멘트는 비교적 적은 편이다. 그런데 1995년 글라스톤베리 공연에서 리암은 잠시도 가만 있지 않고 이리저리 스왜거(swagger)다. 무대 위에서 무대 아래로 오른쪽으로 갔다가 왼쪽으로 돌았다가 정신이 불안정한 사람처럼 갈팡질팡한다. 탬버린을 집어던지고 술을 마시고 갈짓자 걸음으로 으스대며 무대를 누빈다. 1996년 8월 10-11일 네브워스(Knebworth) 공연 때 관중석으로 내려와 팬들과 악수를 교환하는 해프닝을 연출한 적이 있지만 대부분은 무대 위 정해진 자리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당시 최대 규모의 125000 청중이 모여든 네브워스 두 차례 야외 공연 표를 사려는 사람이 2백5십만이나 몰려 영국 공연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가사가 끊기는 사이 두 손을 흔들며 어색한 춤 사위를 보이거나 두 팔을 휘저으며 무대를 누비기도 한다. 두 손을 등짐진 채 약간 꺼부정한 자세로 입과 코를 마이크에 바짝대고 포효한다. 이건 그야말로 리암의 트레이드 마크다. 마이크가 없으면 리암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가수 같다. 마이크를 손으로 잡고 노래할 수도 있는데 막대 끝에 꽂아둔 마이크에 코와 입을 대야만 되는 줄 아는 어린아이 같다. 마이크를 손에 들고 노래하면 큰일난다고 여기는 걸까?


리암이 등짐지고 갈짓자로 무대를 누비는 품새는 껄렁해 보이나? 영락없는 건달 폼이다. 건달은 건달인데 순진한 건달! 어쨌거나 얼굴 표정은 천진해보인다. 다른 연주자들은 거의 붙박이로 제자리를 지킨다. 록 밴드치고 공연 자세는 퍽 고답적이다. 그런데 관중들은 열광의 도가니로 빠져든다. 쉴새없이 떼춤추고 떼창한다. 특히 그들의 본고장 영국에서의 공연이 그렇다. 다들 공연에 참가하는 기쁨을 되살려낸다고 말한다. 오아시스의 가사는 고뇌에 차고 우울하며 자학적인 내용이 아니라 밝고 긍정적인 세상을 노래한다. 그룹 이름부터가 이미 희망의 메시지를 품지 않나. "우리한테 더 좋은 날도 올거야." "네가 나를 구해줄 그 사람이야." 철혈 재상 대처의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하층민들의 삶이 힘겹던 시절 오아시스의 음악은 그들한테 탈출구였다. 유튜브 댓글에는 오아시스의 노래가 인생곡라고 밝힌 팬들이 많다. 비틀즈 공연에서는 감격에 겨워 실신하는 팬들이 많지만 오아시스 팬들은 흥에 경워 춤을 추고 노래를 따라 부르며 즐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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