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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아시스를 들으며 3

by 파샤 pacha

휴대 전화기가 없던 시절 팬들은 귀로 받아들이고 몸으로 반응한다. 90년대 중반과 2025년의 가장 큰 차이라면 휴대 전화기의 존재다. 90년대는 두 손으로 환호하며 춤을 추지만 지금은 한 손으로 흔들고 한 손으로 촬영한다. 팬들도 아주 바빠졌다. 밤 공연을 보면 환한 화면은 메두사의 눈처럼 소리를 다 잡아 먹을 것 같다. 그 사이 양손잡이는 한손잡이가 되었다! 90년대 중반 10대였던 그들은 이제 10대 자식을 둔 사오십대다. 10대 소녀팬을 사로잡던 비틀즈와 달리 오아시스의 광팬들은 남자팬이 압도적이다. 신기하게도 그사이 젊은 팬들도 새로 생겨났다. 그렇담 오아시스는 단순한 90년대만 대표하는 밴드는 아니다(?) 비틀즈처럼 세대를 뛰어넘는 밴드란 말? 어쨌거나 한 세대를 뛰어넘은 듯 한데...


1997년 8월 21일 발매된 세 번째 앨범 Be here now(Stand by me, D'you know what I mean?...)부터 곡의 긴장감과 신선함이 떨어진다. 멜로디는 탄력이 사라지고 밋밋해진다. 작사 작곡을 도맡다시피하는 노엘한테 영감이 떨어진걸까. 노엘 스스로도 세 번째 앨범은 질이 형편없다고 털어놓는다. 창조력은 결핍에서 나오는데... 하루 아침에 거부가 되어버린 노엘은 돈을 물 쓰듯 한다. 과도하게 마약 복용을 한다. 리암과 노엘만이 아니라 단원 전부가 그랬다. 노엘은 운전도 수영도 못하면서 최고급 자동차를 마구 사들이고 수영장 시설에 열을 올린다. 새로 발표된 곡들은 늘어지듯 길어진다. 멜로디도 느슨하다. 비틀즈는 새 앨범이 나올 때마다 새로움을 선보여주었는데...

대중음악은 3분 30초 정도가 적당하다. 이보다 길어지면 긴장감이 떨어진다. 오아시스의 한 곡은 대개 4분을 훨씬 넘는다. 곡이 길어지면서 연주 부분이 지나치게 늘어난다. 그러고 보면 아무래도 곡의 완성도는 떨어진다. 물론 전작의 후광을 업고 상업적인 성공은 거두었다. 그렇지만 비평계의 평가는 미적지근하였다. 마침 이때가 브릿 팝이 서서히 저물어 가는 무렵과 맞물린다. 시대가 달라지면 팬들의 기호도 달라진다. 거기에 걸맞는 새로운 음악을 선보여야 하는데... 랩의 물결에 휩쓸려 가버렸나(?)


어떻게 그들이 전성기를 구가하던 90년대로 되돌아갈 수 있을까. 재결합 공연에 참가한 팬들이 한결같이 하는 말은 "90년대로 되돌아갔다." 청춘으로 돌아갔다는 말! 어떻게 30년 전 세상을 오롯이 재현할 수 있나. 이게 바로 음악이 주는 최고의 선물! 음악은 시간의 간극을 한순간에 뛰어넘게 해준다. 미술이나 문학, 영화도 이렇게 쉽게 할 수 없다. 음악은 뇌리에 박힌 기억의 단자를 단숨에 되살려낸다. 30년이 흐른 뒤에도 오아시스를 다시 들으면 가슴 뛰는 10대로 바로 되돌아간다! 율리우스는 사이렌의 꾐에 넘어가지 않으려고 자신을 돛에 묶게 하고 선원들은 밀랍으로 귀를 막도록했다. 아름다운 목소리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으려는 극약 처방이었다. 황홀한 목소리의 흡입력은 마약처럼 벗어나기 힘든다. 한번 빠지면 빠져나올 수 없다. 수만 명이 한 몸이 되어 팔을 휘젖고 다리를 흔들며 춤추고 노래한다. 소리에 홀리고 감정에 북받쳐 눈물을 주룩주룩 흘리기도 한다.


그들의 명곡은 멜로디며 가사가 자꾸만 귀에 쟁쟁거린다.


I'm free to be whatever I / Whatever I choose / and I'll sing the blues if I want (Whatever)

(난 무엇이 되든 자유로워 / 내가 부르고 싶다면 / 블루스를 부르는 거지


We're gonna live forever (Live forever)

(우리는 영원한 삶을 살거야)


I said maybe / You're gonna be the one that saves me (Wonderwall)

(왜냐하면 아마도 / 네가 나를 구해줄 그 사람일지도 모르니)


Some might say we will find a brighter day (Some might say)

(어떤 이는 우리한테 더 좋은 날이 온다고 할 거야)


Someday you will find me / Caught beneath the landslide / In a champagne supernova in the sky (Champagne supernova)

(언젠가 날 찾을 수 있을 거야 / 산사태 밑에 갇힌 / 하늘 위에 떠 있는 샴페인 수퍼노바 안에서)


Stand by me / Nobody knows / the way it' gonna be (Stand by me)

(내 곁에 있어줘 / 아무도 몰라 / 앞으로 어떻게 될지)


90년대에 난 오아시스의 음악을 듣지 못했다. 2025년에 듣는 리암의 목소리는 윤기며 탄력이 많이 사라졌다. 물론 30년 사이 변한 외모는 어쩔 수 없이 세월을 느낀다. 머리가 희끗희끗해지고 이마며 눈가에 굵은 주름이 패였다. 20대의 훌리건 같은 이미지는 사라지고 얌전한 호랑이가 되었다. 그래도 그 엄청난 힘은 살아남아 있다. 90년대의 실황 유튜브를 듣고 진행 중인 실황과 비교해보았다. 역시 20대 리암의 음색은 맑고 윤기가 자르르르하다. 목소리가 갈라지거나 전혀 탁하지 않다. 리암이나 노엘의 목소리 하나만으로도 이미 듣는 사람을 사로잡고도 남는다. 25년 공연을 들으면 연주자의 연배는 지긋하지만 밴드의 사운드는 더욱 강력해졌다. 되돌아온 본헤드, 젬 아처, 앤디 벨, 새로 드러머로 들어온 조이 바롱커...


94년 8월 파리에 도착했을 때 난 내손으로 밥도 한번 지어본 적이 없었다. 혼자 살 준비가 전혀 돼 있지 않았다. 큰누나네나 작은형네와 같이 살 때 빨래며 끼니를 의존했다. 하숙 역시 끼니가 자동 해결되었다. 혼자 살 때 가장 어려운 일은 끼니 해결이다. 부엌일이라곤 거의 해본 적 없는 사람이 어떻게 홀로서기를 하지? 누구나 다 하는 일인데 나라고 못할라구.


한국에서 혼자 살 때 끼니 해결은 주로 식당이었다. 공무원 아파트에는 구내 식당에서 아침 저녁을 다 먹을 수 있었다. 학교 근무할 때는 직원 식당이나 직장 주변에서 쉽게 해결했다. 교문을 나가 왼쪽을 조금 걸어가면 나오는 김치식당을 자주 이용했다. 고등학교와 붙어 있는 중학교 울타리 바로 바깥에 있는 호수 삼계탕은 맛이 썩 괜찮았다. 식당 이름이 보여주듯 이 집은 삼계탕만 주로하는 전문집이었다. 방이 몇 개로 나뉘어져 있었다. 안에 들어가면 길쭉한 앉은뱅이 탁자가 놓여 있었다. 바닥은 좀 촌스러운 누르스럼한 두터운 장판이 깔려 있었다. 마주보고 둘러앉아 식사하게끔 되었다. 지금까지 다른 식당에서는 이 집 같은 감칠맛을 맛보지 못했다. 고운 소리처럼 맛도 그 인상이 혀끝에 오래 맴돈다. 때때로 동료와 함께 아니면 혼자 신길 시장으로 진출하기도 했다. 시장에는 먹을거리가 풍성했다. 갓만들어 먹음직스러운 쑥떡이며 시루떡, 김치볶음밥이며 호박죽, 팥죽 등이 나를 이쪽으로 이끌었다. 시장을 지날갈 때 어물전은 늘 멀리한다. 비위 약한 나는 생선 가게를 반드시 피해다닌다. 중학생 때 대창 시장통을 지날 적이면 맨끝에 있는 생선 가게 앞에서는 자전거 페달을 빨리해서 코를 막고 얼른 지나쳤다. 신길 시장 갈 때도 마찬가지였다. 어물전은 거덜떠보지도 않았다. 바로 음식 파는 쪽으로 직행하였다.


교문에서 왼편 학교 담장을 따라 백미터쯤 걸어가 오르편으로 돌아 시장으로 가려면 창녀촌을 지나가야 했다. 우리가 588이라고 부르던 소규모 집창촌이었다. 늦은 밤 붉은 조명이 들어와야 알아볼 정도로 아주 많은 가게들은 아니었다. 창녀촌이 주로 역주변에 형성되는 데 신길동은 예외였다. 한적한 단독 주택가인 이 골목 어귀에 점집도 눈에 띄었다. 한번은 시장쪽으로 가다가 굿판이 벌어져서 한참 구경하다 발길을 돌렸다. 악운을 몰아내는 굿판은 아니고 길운을 부르는 굿이었다. 바로 길 바닥에 젯상을 차리고 무당이 북과 꽹과리 나팔 반주에 맞춰 주문을 외며 춤을 추었다. 굿판의 간판은 역시 붉그스럼한 돼지 머리다. 하늘 향해 큼지막하게 치솟은 양쪽 귀도 그렇지만 둥그런 두 눈깔이 지나가는 사람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골목길 양쪽은 주로 2층 단독주택들이 빼곡이 들어선 서민촌이었다. 학생부 소속으로 방과후 비행 학생을 단속한다고 주임 선생님과 선배 동료와 순시나가는 길이기도 했다. 워낙 자유롭게 직장 생활하는 초년병 막내가 못미더워서 선배 교사들은 나한테 그런 일도 잘 시키지도 않았다.


다른 동료들이 잘 지키는 출퇴근이 나한테는 없었다. 칼퇴근도 아니고 출퇴근의 자유화! 성실하게 직업에 임하는 그들한테는 가히 충격적이었을 테다. 담임을 맡지 않은 교사여서 수업 이외의 업무도 많지 않았다. 학생부가 도맡아 하는 교문 정리도 나한테는 맡기지 않았다. 지각하는 학생들보다 한참 뒤에 출근하니 얼마나 우습게 느껴졌을까. 그렇지만 늦게 출근하거나 결근해서 수업을 빼먹거나 시험 감독을 안하는 일은 절대 하지 않았다. 그런 부류 동료도 한둘 있긴 했다. 아니다. 딱 한번 결근했다. 그것도 정말 무책임하게...


2박3일 논스톱으로 고스톱치다가 그랬다. 문경 새재로 처음 갔을 때 먹고 마시는 시간만 빼고 고스톱을 쳤다. 금요일 저녁에 떠났다가 월요일 오후에 서울로 올라왔다. 말로만 듣던 동화원으로 진출! 월요일을 결근했다. 공식적인 이유는 건강 문제였다. 교감 선생님한테 새빨간 거짓말을 둘러댄 것. 월요일 저녁 개고기집에서 저녁을 거나하게 먹고 마무리 고스톱판을 또 벌였다. 문경에서는 내가 판을 휩쓸었다. 근데 이 마지막 판에서 욕심을 부리다 그만 다 잃고 말았다. 못 먹어도 고! 쓰리고에 양피박을 호기롭게 외쳤으나 독박!! 동화원에서 싹쓸이 했던 판돈을 한판에 날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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