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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샤 pacha Feb 23. 2022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책

[폴리필리의 꿈] 초판본, 프랑스 국립도서관 소장

      콜로나의 [폴리필리의 꿈]


콜로나, [폴리필리의 꿈], Pocket, 2017.


 형형색색으로 글씨를 쓰고 금박이며 번쩍이는 원색조의 삽화가 들어간 책은 분명 하나의 예술품이다. 샹티이성에 가면 오말 공작이 수집한 아름다운 책들을 볼 수 있다. 그의 멋진 서재를 보고 나서 책이 읽기 위한 것만이 아님을 깨달았다. 채색 삽화를 그려 넣고 손으로 쓴 중세의 필사본은 따로 치면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책으로 꼽히는 책은 베네치아의 수도사 프란체스코 콜로나가 쓴 [폴리필리의 꿈](Aldo Manuzio, Venezia, 1499)이다. 이 책은 신비롭고 난해하기로 유명하다. 부제가 « 폴리필리의 꿈 이야기, 꿈속에서 벌이는 사랑의 투쟁 »이다. 오랫동안 이 책은 애서가라면 누구나 소장하고 싶어 하는 예술품일 뿐 아니라 이 책을 읽는 사람은 존경의 대상이었다.


 [폴리필리의 꿈]은 라틴어와 이탈리아어를 바탕으로 그리스어, 헤브라이어, 아랍어, 이집트 상형문자가 뒤섞이고 수학적인 주석이며 그림 수수께끼가 들어가 있다. 남자 주인공 폴리필리라는 이름은 많이 사랑한 남자 또는 폴리아를 사랑하는 남자, 여자 주인공 폴리아는 노인의 머리카락이나 봄날의 하늘이 발하는 눈부신 하얀색이라는 뜻이다. 각 장의 첫 글자를 조합하면 "프란체스코 콜로나 수도사는 폴리아를 열렬히 사랑했다."가 된다. 여기에서 작가가 콜로나라는 것을 짐작할 뿐 작가의 신원은 확실하지 않으며 실제 작가인지 논란이 많다. 그렇지만 출판인은 확실하다. 베네치아에서 활약한 알도 마누초라는 출판인은 전통적인 두꺼운 고딕체를 쓰지 않고 날씬하고 아름다운 로만체 활자를 만들고 주조한 그리포의 도움을 받아 조형 예술적인 편집을 한 전설적인 인물이다. 1501년 옆으로 누운 이탤릭체를 처음 사용한 그는 고대 그리스 문학 작품들을 출판하고 스스로 그리스 문법책을 쓰기도 한다. 더욱이 그가 출판한 인문주의 책들은 영리 목적이 아니었다.


1546년 프랑스어 판 표지


 1546년 프랑스의 장 마르탱이 원서에서 열거법의 장황한 문장은 축약[1]하고 애매한 부분은 수정하며 에로틱한 표현은 순화시켜 번안하고 오리지널만큼 뛰어난 삽화(169개의 오리지널 목판 삽화가는 알려져 있지 않다. 프랑스판 삽화는 화가 장 쿠쟁과 조각가 장 구종의 작품으로 본다.)를 넣어 자크 케르베르가 출판한 프랑스어판도 오리지널에 못지않게 아름답다. 그러니까 프랑스어판 [폴리필리의 꿈]은 원서와 독립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생생한 삽화와 멋진 활자의 조화 그리고 무엇보다 글의 리듬과 호흡을 보여주는 활자의 율동적이고 조형적인 배열[2]! 원조 애니메이션 같다. 이 책은 읽는 게 아니라 보는 거다! 프랑스에서도 16세기에 출판되고 나서 읽는 책으로 보다는 볼거리로 자리 잡았다. 오랫동안 비밀에 휩싸여 극소수 수집가한테만 알려진 이 책은 프랑스의 화가, 건축가, 문학가한테 큰 영향을 미쳤다. 라블레, 푸생, 르노트르, 페로, 라퐁텐, 노디에, 네르발…


 현실에서 폴리필리는 폴리아를 향한 자신의 사랑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꿈속에서 사랑의 섬 시테르로 순례 여행을 떠난다. 어두컴컴한 숲 속에서 지친 그는 나무 밑동에서 잠들어 꿈(꿈속에서 다시 꿈을 꾼다.)에 빠져든다. 그가 지나가는 장소들(공포의 장소와 지복의 장소 둘로 나눈다.)에는 고대 폐허들이 늘비하다. 마주치는 건물과 조각에는 그리스어, 라틴어, 헤브라이어, 아랍어 그리고 이집트의 상형문자로 글자가 새겨져 있다. 거기서 전설적인 괴물들과 고대의 여러 신들 그리고 목신들과 님프들도 만난다. 특히 님프들이 폴리필리한테 호의를 보인다. 비너스 신전에서 만나 시테르섬으로 인도하는 님프는 바로 폴리아 자신임을 나중에 스스로 밝힌다. 입문식을 거치지 않은 폴리필리는 님프로 변한 폴리아를 알아볼 수 없다. 님프들은 폴리필리와 폴리아의 혼례식(비교 입문식)을 치러주고 시테르섬으로 인도해준다.


 큐피드를 안은 비너스 조각이 올려진 아도니스의 무덤가 분수대에서 폴리아와 폴리필리가 님프들 앞에서 자신들의 사랑 체험을 이야기한다. [폴리필리의 꿈]도 [데카메론]이나 [유명한 프랑스 여인들]과 마찬가지로 액자소설의 형태를 띤다.

 

 1462년 눈부시게 해맑은 어느 봄날 꽃다운 소녀 폴리아는 창문을 말끔히 닦고 창가에서 머리를 빗는다. 때마침 길가던 폴리필리가 폴리아를 보고는 한눈에 반해 광적인 사랑에 빠진다. 아직 폴리아는 사랑이 뭔지 모른다. 그때 트레비조를 휩쓴 페스트에 걸린다 (실제 1464년과 1466년에 페스트가 트레비조에 돌았다). 병이 낫게 되면 영원히 다이애나 여신을 섬기리라고 다짐한다 (정체를 알 수 없는 페스트에 대한 치료는 늘 의술보다는 종교 차원이 지배적이었다). 서약의 효험이 있었던지 폴리아는 페스트에서 회복한다. 약속대로 폴리아는 순결한 처녀신 다이애나 신전의 시녀로 서원한다. 그러니까 폴리필리와 폴리아의 엇갈린 사랑의 운명은 오로지 페스트에 그 근원이 있다. 


 창가의 폴리아를 얼핏 본 지 일 년이 지난 즈음 폴리아의 서원 의식이 있던 날 "우연히" 폴리필리가 참석한다. 그렇게 오랫동안 애타게 그리던 폴리아를 다시 보자 폴리필리는 걷잡을 수 없는 사랑의 불씨가 드세게 불타오른다. "비겁한 남자는 아름다운 여인을 차지하지 못한다. 치유책을 찾는 자는 자기 병을 알려야 한다."라고 격언을 일깨우면서 폴리필리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자신이 겪는 사랑의 고통을 폴리아한테 알리기로 결심한다. 목숨을 내걸고 폴리아의 연민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애원(호의적인 말 한 마디나 아주 하찮은 연민)과 협박("제가 죽는다고 당신한테 살인자의 칭호 말고 무슨 득이 생긴단 말인가요? 신께서 당신한테 풍족하게 내려준 빼어난 미모며 대단한 매력 그리고 상냥한 마음씨가 당신만을 위해 간직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하고 위협한다.)을 동시에 아로새긴 세 통의 연애 편지를 보내지만 차가운 대리석 같은 폴리아는 아무 반응이 없다. 거기에 굴하지 않고 마침내 폴리필리는 신전에서 혼자 기도하는 폴리아를 마주하고 마지막으로 직접 사랑을 호소하는 가운데 폴리아의 눈앞에서 쓰러져 죽는다. 


 시체를 신전 한 곳에 내버려 두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폴리아는 사랑을 거부한 처녀 둘이 잔인하게 벌 받아 죽는 환영에 사로잡힌다. 밤에는 사랑에 무정했다고 괴물들한테 괴롭힘을 당하는 악몽을 꾸고서 하녀한테 꿈 이야기를 한다. 하녀는 폴리아한테 비너스 신전에 가서 과오를 고백하고 도움을 청하라고 조언한다. 드디어 큐피드의 화살을 맞은 폴리아는 사랑에 눈을 뜨고 이튿날 신전으로 달려가 죽은 폴리필리를 입맞춤으로 되살려낸다. 한편 죽은 폴리필리의 영혼은 비너스 신전으로 가서 큐피드의 가혹한 처사에 대해 항의를 한다. 폴리필리의 하소연을 들은 비너스는 사랑의 장난꾼 아들한테 두 사람의 사랑이 이루어지도록 타이른다. 사랑의 화살은 맞은 폴리아가 그제야 폴리필리의 사랑을 받아들인다.


 무엇보다 아름다운 폴리아의 미모, 특히 매혹적인 눈에 반해 상사병에 걸린 폴리필리는 폴리아의 사랑을 얻지 못하면 죽음에 이를 수밖에 없다. 이런 통속적인 연애 사건에 큐피드를 등장시켜 유일신이 지배한 지 오래된 르네상스 시절 고대 다신교의 인간사에 신이 끼어드는 사건 설정은 진부하면서도 한편 신선하다.


 비너스 신전 사제장이 폴리필리한테 사랑의 체험을 이야기해달라고 했을 때 폴리필리는 다는 할 수 없고 일부만 하겠다고 대답한다. 폴리아도 마찬가지 반응을 보인다. 온갖 시련과 우여곡절을 겪고 도달한 고귀하고 숭고한 사랑 체험도 이루어진 다음에 이야기하면 싱거워지고 김 빠지게 마련이다. 사랑이 거세게 불타올라 어려운 고비를 겪고 원하던 결실을 맺게 되면 더 이상 이야깃거리가 없어진다. 사랑이 이루어졌다고 느끼는 순간 이야기의 죽음이 찾아온다.


 영원히 냉혈 처녀일 것 같은 폴리아가 폴리필리한테 사랑에 빠지게 되는 신비 체험담을 다 들은 님프들은 음악에 맞춰 흥겨운 춤판을 벌인 다음 자리를 뜬다. 두 사람만 남았을 때 폴리아와 폴리필리는 이루 말할 수 없는 달콤한 사랑을 맛본다. 아뿔싸! 폴리아가 폴리필리의 목을 껴안고 입맞춤을 하자 황홀해진 폴리필리도 폴리아한테 입맞춤을 하는 순간 폴리아는 얼굴이 새빨갛게 변하더니 영롱한 눈물을 떨구고서 향 연기처럼 하늘로 사라진다. 꿈이었다네! 1467년 5월 1일 해가 뜨면서 폴리필리는 단꿈에서 깨어난다. 


콜로나, [폴리필리의 꿈], Imprimerie nationale, 1994, p. 408-409, 마지막 페이지.


 이 세상 모든 일은 헛될 뿐인가? 쾌락의 절정 뒤에는 어쩔 수 없이 죽음만 도사리나? 숭고하고 영원한 사랑은 꿈속에서나 죽은 뒤에야 이루어지나? 그래서 모든 드라마는 결혼 아니면 죽음으로 끝날까?

 

 그렇지만 [폴리필리의 꿈]이 보카치오풍의 목가적인 연애소설로 그치는 것은 아니다. 기독교가 지배하는 르네상스 시절에도 용케 살아남은 비너스 여신의 비교 입문식(고대 다신교 의식과 기독교 의식이 혼합된다.)과 그 무대 배경으로 등장하는 건축물과 정원의 구조와 궁전의 장식, 주인공들의 의상이며 종교의식 등이 지나칠 만큼 극도로 세밀하게 묘사된다 (1권). 이 과정에서 정원의 배열, 조각하듯 깎은 관목들, 건물이며 조각, 비석에 새겨진 경구들의 해석을 통해 고대 문명을 재발견하게 해 준다. 16세기 피렌체의 몇몇 정원과 17세기 르노트르의 프랑스식 정원(특히 베르사유)은 이 책에서 묘사된 대로 재현하였다. 그리고 폴리아와 폴리필리의 사랑(2권)은 중세 기사가 미덕과 순결의 화신인 이상적인 여인을 향해 꿈꾸는 관념적인 사랑이 아니라 육체적 쾌락을 추구하는 관능적인 사랑이다. 비록 꿈속에서 벌어지기는 해도 폴리필리는 목숨을 내걸고 끈질기게 투쟁하여 폴리아의 사랑을 얻어낸다. 콜로나는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 그리고 "끈기야말로 사랑에서 희한하게 유익하고 필요한 것이다." 라는 사랑의 금언을 내세운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인들은 육체적 쾌락을 적극 권장한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성적 욕망을 채우는 이야기로 가득한 [데카메론]에서 보카치오도 관능적인 사랑을 칭송한다. 다른 한편 가톨릭 교리에서 동정녀 마리아 숭배와 함께 금욕적인 세계관이 지배하면서 관능적인 사랑이 금기시되기 시작한다. 콜로나의 작품과는 반대로 가면무도회 축제의 밤 곤돌라 유람에서 몰래 흠모하는 폴리아의 파트너가 된 프란체스코가 폴리아한테 사랑을 고백하는 노디에의 소설과 현실 세계에서 사랑이 이루어질 수 없자 각자 수도사와 수녀가 되어 사후 세계에서 영원한 결합을 꿈꾸는 네르발의 소설에서는 플라토닉 러브로 바뀐다.


 콜로나의 작품을 모델로 다시 쓰기를 통해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낸 노디에와 네르발의 작품을 참조 텍스트와 비교해보자.



    노디에의 [프란치스쿠스 콜룸나]


Charles Nodier, Franciscus Columna, Gallimard, 2004.

 

 노디에는 중심에서 벗어난 별난 것을 좋아하는 호기심 충만한 주변 작가로 프랑스 문학사에서 자리매김을 하기 힘든 인물이다. 곤충학자, 다양한 수집가, 아르스날 도서관 사서... 그는 소설에 환상적인 요소를 많이 부여한다. 시인, 소설가, 비평가, 전기 작가... 모방, 표절, 모작이 그의 전형적인 글쓰기 기법이다. 또한 당대 사람들은 네르발을 노디에의 정신적인 아들이라고 불렀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희귀본 [폴리필리의 꿈] 초판본을 손에 넣으려는 파리와 노르웨이이의 두 애서가가 베네치아의 부근 도시 트레비조의 호텔에서 우연히 마주친다. 두 사람은 확실하지는 않지만 트레비조 어딘가에 있다고 생각하고 이 책을 찾아 아포스톨로 서점으로 가려는 참이다. 트레비조의 서적상 아포스톨로는 권위 있는 유명 잡지에 [폴리필리의 꿈]이란 책에 대한 연재소설을 발표하기로 되어 있다. 소설이 이 잡지에 발표되면 명성과 부를 동시에 얻는다. 이튿날 잡지가 발행되는 시점에 그는 단 한 줄도 못쓰고 있다. 절박해진 아포스톨로는 박식한 노르웨이의 노리치 수도원장한테 SOS를 청한다. 

 

 노리치라는 인물은 노디에의 분신 같은 인물로 보통 사람들이 전혀 관심을 갖지 않을 그리고 "잊어버리면 좋을" 특이한 것들을 많이 알고 있다. 예를 들어 형편없는 책의 편집자의 이름이나 어떤 바보의 출생 연도 같은 전기적이고 문헌적인 자질구레한 것들을 꿰차고 있는 인물이다. 노리치는 아포스톨로한테 초판본 [폴리필리의 꿈]을 구해주는 조건으로 대신 소설을 써주기로 약속한다. 이 책에 대해 네 가지 틀린 정보를 갖고 있는 아포스톨로는 자신이 가진 한 질밖에 없는 "마지막 장이 떨어져나간" 희귀본을 내놓는다. 우연하게도 마지막 장은 노리치가 구해 가지고 있다. 노리치는 아포스톨로가 잘못 알고 있는 이 책에 관한 네 가지 오류(출판 연도, 출판 장소, 삽화가, 작가)를 바로 잡은 다음 이 책의 출판 과정과 두 주인공의 숭고한 사랑 이야기를 들려준다. 노리치 덕분에 아포스톨로는 연재소설을 완성하고 그 보상으로 희귀본을 노리치한테 그냥 준다. 로리치는 문헌학적인 소설을 완성시켜준 대가로 초판본 [폴리필리의 꿈]을 받아 약속대로 파리의 애서가한테 선물한다. 이게 액자소설의 외부 이야기에 해당한다. 두 애서가가 희귀본을 찾는 이야기는 완전히 노디에의 몫이다.


 액자소설의 내부 이야기는 노리치가 들려주는 프란체스코와 폴리아의 전설적인 사랑 이야기이다. 원서의 1권에 해당하는 부분은 다 빼버리고 2권에 해당하는 두 주인공이 사랑을 고백하고 프란체스코가 사랑의 시를 완성해 폴리아한테 전달하는 사건에 초점을 맞춘다.

 1843년 발표된 노디에의 마지막 소설 [프란치스쿠스 콜룸나][3]에서 노디에는 작가 프란체스코와 가상의 남자 주인공 폴리필리를 동일시한다.


 신성로마제국 황제파로 교황 보니파치오 8세를 포로로 잡고 뺨까지 때린 그래서 결과적으로 귀족 지위와 재산을 박탈당한 로마의 명문 귀족 시아라 콜루나의 유일한 후손 프란치스쿠스 콜룸나는 1444년 태어나기 전날 아버지가 살해당하고 어머니는 아이를 낳은 날 죽는다. 고아인 프란체스코를 화가 야코포 벨리니가 거두어 키운다. 프란체스코는 조반니와 젠틸레 벨리니와 함께 자라 열여덟 살에 미술계를 혁신한다. 당대 최고의 화가 만테냐나 조반니 벨리니의 작품으로 알려진 숨은 작가이다. 프란체스코는 회화보다는 건축에 더 우선 순위를 둔다. 더욱이 그는 기독교적 신앙에 고대 다신교적 미학을 희한하게 결합시킨다. 당시 이탈리아어는 물질적인 요구나 반영할 뿐이지 "생각과 감정의 웅변적이거나 시적인 표현"에는 이르지 못한다고 판단한다. 그의 작품은 당대 이탈리아의 작가들(보카치오나 페트라르카)의 언어보다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작가들에 더 가까워진다. 이런 독창성과 특이함으로 말미암아 프란체스코는 현실 세계와 동떨어지게 된다.


 프란체스코는 화가, 시인으로 명성을 얻지만 고독하고 가난한 예술가이다. 베네치아의 문화 중심지인 피자니 저택에 드나들면서 이 가문의 상속녀 레오노라의 사촌 폴리아를 만난다. 폴리아의 눈부신 미모와 뛰어난 교양에 반해 몰래 흠모한다. 피자니 가문의 레오노라는 28세, 트레비조의 폴리 가문의  폴리아는 20세에 엄청난 재산 상속을 받는 여인들이다. 두 여인 모두 귀족 신분에 재산을 갖춘 데다 대단한 미모를 자랑한다. 프란체스코는 차갑고 오만하게 보이는 폴리아가 자신한테 무관심하다고 느껴 한 동안 피자니 저택에 발을 뚝 끊는다. 이 상황을 알아차린 레오노라가 베네치아의 1466년 2월 축제기간 마지막 날 폴리아를 위해 특별 행사를 마련한다. 가면을 쓴 여인들이 곤돌라를 같이 탈 남자 파트너를 골라 대운하를 유람하는 놀이다. 


 폴리아는 레오노라의 초대에 응해 피자니 저택에 나타난 프란체스코를 택한다. 곤돌라를 타는 즉시 폴리아는 규칙을 버리고 가면을 벗는다. 곤돌라가 대운하를 한 바퀴 돌아올 때까지 두 사람은 남의 말을 하듯 서로 상대방한테 사랑을 고백한다. 원서에서와 마찬가지로 폴리필리가 폴리아한테 일방적으로 광적인 사랑에 빠지지만 사랑 고백은 폴리아가 먼저 한다. 폴리아는 이튿날 자신의 거처인 트레비조로 돌아가고 프란체스코는 사흘 뒤 트레비조의 수도원에서 수도사 서원을 하게 되어 있다. 신분과 지위의 차이로 현실에서 폴리아와의 사랑이 맺어질 수 없다고 생각한 프란체스코는 자신이 체험한 사랑을 시로 써서 폴리아한테 바친다. 바로 그 이튿날 수도사 서원한 지 1주년 되는 날 프란체스코가 다시 서원을 다짐하는 아침 미사 중 바닥에 기도하듯 쓰러져 죽는다. 

 콜로나의 원서에서는 폴리필리가 폴리아의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 다이애나 신전에서 기절하여 죽는데 이튿날 신전으로 되돌아간 폴리아가 입맞춤으로 되살려낸다. 잠에 빠진 프시케를 에로스가 입맞춤으로 되살려내는 마법이 재현된다. 평생 결혼하지 않은 폴리아는 31년이 지나 베네치아의 전설적인 출판인 알도 마누초를 찾아가 풍족한 출판 비용과 함께 원고를 전달한다. 이 책이 바로 역사상 가장 아름답고 신비로운 책으로 알려진 [폴리필리의 꿈]이다.



    네르발의 [폴리필리의 꿈]


네르발, [동방 여행 1], Garnier-Flammarion, 1980.


 한편 네르발은 자신의 "폴리필리의 꿈"에서 콜로나와 노디에, 폴리필리와 폴리아를 환기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알레고리적인 시로 써진 [폴리필리의 꿈]을 직접 간파할 수 없을 때는 노디에의 감동적인 이야기를 읽을 필요가 있다고 밝힌다. 콜로나의 소설을 모방한 노디에의 소설을 다시 인용하는 네르발은 노디에처럼 남자 주인공 폴리필리를 작가 프란체스코와 동일시한다.

 

 폴리필리와 폴리아는 신분의 차이(콜로나의 원서에서는 폴리필리도 귀족 신분이다.)로 현실에서 사랑이 실현될 수 없는 조건을 받아들이고 죽은 다음에 결혼하기 위해 살아 생전에는 헤어져 살기로 언약한다. 폴리필리는 수도사가 되고 폴리아는 수녀가 된다. 노디에의 작품에서는 폴리아는 귀족 신분으로 남는다. 종교 축제 때 기도 행렬에서 둘이 마주치면 서로 눈길을 주고받으며 "형제여, 죽어야 합니다." "자매여, 죽어야 합니다."라는 마음의 대화를 나눈다. 프란체스코가 사랑의 시를 완성하고 죽은 뒤 폴리아가 책으로 출판한다. 


 네르발은 [동방여행]의 1부 « 동방으로 »의 13장 "비너스의 미사"와 14장 "폴리필리의 꿈"에서 콜로나의 원서와 이것을 바탕으로 쓴 노디에의 소설을 인용하면서 자신의 판본을 만들어낸다. "비너스의 미사"는 콜로나의 원서 1권에 해당하는 장소 묘사이다. 꿈속에서 폴리필리와 폴리아가 사랑의 섬 시테르로 순례 여행을 떠나 비너스 신전에서 치르는 비너스 여신의 비교 입문식은 콜로나의 텍스트를 요약해서 인용한다.


네르발, Oeuvres Complètes II, Gallimard, 1984, p. 237.

 

 폴리필리가 그랬듯이 네르발도 자신이 직접 방문하지 않는 세리고(옛 이름이 시테르)섬을 주인공들의 순례(독서)를 통해 가상 여행을 한다. 루브르 3층 프랑스 회화관에 가면 젊은 연인들의 우아한 야외 축제를 보여주는 바토의 [시테르섬으로 가는 순례](1717)를 볼 수 있다. 보들레르의 « 시테르로 가는 여행 »([악의 꽃])은 네르발의 [동방여행]에서 비너스 신전이 있던 시테르섬의 폐허에서 시체가 매달린 교수대를 발견하는 장면에서 영감을 받아 쓴 시이다.

 

 네르발은 프란체스코의 예술가 이력과 폴리아의 신분 그리고 그의 사랑 고백은 노디에의 소설을 요약 인용한다. 콜로나와 노디에의 작품에서 끌어낸 두 주인공을 소개한 다음 신화와 신전이 사라지고 잔해만 남은 세리고섬을 괴테의 [파우스트]처럼 시공간을 초월하여 신화가 숨 쉬는 고대 세계(시테르섬)로 생생하게 되살려낸다("폴리필리의 꿈"). 바로 이 점에서 두 참조 텍스트에 네르발이 새로운 입김을 불어넣는다. 그러니까 네르발의 참조 텍스트는 모두 셋이다. 콜로나의 [폴리필리의 꿈](프랑스어판), 이것을 바탕으로 쓴 노디에의 [프란치스쿠스 콜룸나], 그리고 세리고섬을 시테르섬으로 탈바꿈하는데 동원하는 괴테의 [파우스트].


 네르발은 콜로나도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텍스트(특히 고대 종교의 입문식과 관련해서 아풀레이우스의 [황금 나귀 또는 변신]을 쉽게 떠올릴 수 있다.)를 참조했듯이 자신도 두 작품을 바탕으로 다시 쓰기를 한다고 밝힌다. 게다가 네르발은 [파우스트]의 초현실적인 장면처럼 극적인 연출을 통하여 잊혀진 신화와 종교 아울러 잊혀 가는 작가들(콜로나와 노디에)과 주인공들(폴리필리와 폴리아)을 다시 쓰기를 통해 되살려낸다. 더욱이 네르발은 감정이입을 하여 가상의 주인공들을 실존 인물처럼 현실 세계의 무대로 불러내고 인용을 통해 사라진 작가들도 소환시킨다. 잊히고 희미해진 고전의 기억을 더듬으려면 다시 읽기 이외에 또 다른 길이 있을까?


          

[1] 오리지널에 비해 프랑스어판의 분량은 대략 1권이 70%, 2권은 50%에 해당한다. 늘 오리지널을 줄이거나 다른 것으로 바꾸고 프랑스화시키는 것만 아니라 이해를 돕기 위해 보태기도 한다.

[2] 쉽게 아폴리네르의 [칼리그람](1918)을 떠올릴 수 있다.

[3] Francesco Colonna의 라틴어식 표기로 노디에는 프랑스어화 시켜 François Colouna(Colonne)로 쓰기도 한다. Colonna, Columna, Colouna, Colonne는 동일 인물을 달리 표기하는 것인데 인물의 정체성에 혼란을 가져온다. 네르발은 [소금 밀매꾼들]에서 감옥 탈출의 달인 뷔쿠아(Bucquoy) 신부의 표기를 여섯 개 변이형으로 표기한다. 희귀본 이야기 책의 주인공이며 탈출의 귀재로 책도 인물도 찾기 쉽지 않음을 잘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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