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째 날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 작가로서 보카치오가 다시 «머리말»에서 자신을 비방하는 사람들에 대한 변론을 꺼낸다. 그는 이 부분에서 남자가 여자를 좋아하는 본능은 가르치지 않아도 저절로 드러난다는 예로써 인간의 천성을 드러내는 미완성 우화 한 편을 끼워 넣는다. 어린아이적부터 열여덟 살까지 산속 독방에서 외부와 완전히 단절된 채 아버지와 단 둘이 경건한 수도생활만 했을 뿐인 젊은이가 난생처음 피렌체에 나가 젊은 여인들을 보자마자 바로 매혹된다는 이야기이다. 작품이 삼분의 일도 완성하기 전인데 보카치오는 온갖 비난의 화살을 다 맞는다.
"저자가 귀부인들을 지나치게 좋아하면서 그들의 환심을 사고 그들을 위로하고 나아가 칭송하기까지 하는 일에 너무 즐거워하는 것은 올바르지 못하다".
"(마흔 다 된) 그 나이에 여자들 이야기나 하고 여자들의 환심을 사는 일에 시간을 끄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
"귀부인들과 어울려 한담을 즐기기보다 뮤즈들과 어울리는 게 현명하다".
"시시껄렁한 이야기나하고 몽상에 빠질 게 아니라 어떻게 빵을 손에 넣을지 생각하는 편이 현명하다".
"당신이 한 이야기는 당신이 말한 대로 일어나지 않았다".
작가는 이런 "물어뜯고 찢어발기는" 비난들로 엄청난 괴로움을 겪고 있다고 고백하면서 이렇게 반론을 편다. 그는 공개적으로 젊고 고귀한 여인을 좋아하고 마음에 들려고 애쓴다고 밝힌다. 이것은 거역할 수 없는 인간의 자연이기 때문이다. 단테와 함께 귀도 카발칸티나 치노 다 피스토이아 같은 선배 시인들도 다 작품을 통해 귀부인의 환심을 사는 일을 영광으로 여겼다. 나는 이야기를 통해 옛날 용맹했던 성숙한 남자들도 모두 이러했다는 사실을 보여주겠다. 애정의 쾌락이나 미덕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보고 배우라고 말하고 싶다.
뮤즈들과 어울려야 한다는 지적은 좋은 충고이다. 항상 뮤즈와 어울릴 수만 없다. 뮤즈도 늘 나한테 머물지도 않는다. 뮤즈도 여성이고 여성과 닮은 존재라 시적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여인들과 어울리는 것은 나쁘지 않다. 어쨌거나 나는 시작에 도움을 주는 뮤즈들과 아주 척을 지지는 않는다.
내 배고픔에 동정하면서 빵을 얻는 법을 충고하는 이들한테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시인은 부자가 보물에서 얻는 것보다 우화에서 더 많은 빵을 찾았다. 시인은 우화를 지으면서 즐기고 명랑해진다. 반면 부자는 필요 이상의 빵을 얻으려다 일찍 죽는다.
내가 하는 이야기가 이미 나와 있는 이야기를 바탕으로 만든 이야기인데 독창적인 것을 만들어내라는 지적에 대해 감사의 말을 전한다 [1]. 이점 나 스스로 개선하려고 애쓴다.
아무튼 "이 짧은 생애 동안" 내가 자연의 법칙에 따라 살도록 내버려 두었으면 좋겠다.
피렌체의 페스트 상황 르포만큼이나 이 부분 읽는데 힘들었다. 작가의 말은 아직 하나 더 남았다. «작가의 결론»이다. 보카치오는 약속한 이야기를 무사히 끝맺도록 도움을 준 신과 귀부인 독자한테 고마움을 표하면서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변론을 펼친다.
정숙한 여인한테 들려주고 듣게 하기에 부적절한 사실을 너무 외설적으로 표현했다는 지적에 대한 항변이다.
"올바른 용어를 통하여 표현할 때는 어느 누구한테도 어울리지 않고 예의에 어긋나는 것이란 없다. 그래서 적절하게 표현했다고 생각한다".
몇몇 이야기가 외설적이라고 해도 "통찰력 있는 독자가 정상적으로 읽는다면 이야기 자체의 성격상 이야기를 왜곡시키지 않고서는 그런 식으로 밖에 쓸 수 없다는 사실을 쉽게 알아차릴 것이다". "사실보다 표현에 본질보다 외관에 집착하는 편협한 여자들"이 몇몇 세부나 용어가 노골적이라고 할지언정 줄곧 그런 표현만 쓰면 모를까 그 정도 썼다고 해서 무례한 것은 아니다. 에로틱한 장면 묘사를 할 때 보카치오는 주로 비유법을 통해 표현한다. 예를 들어 석공인 남편이 이웃한테 팔려고 빨래통 밑바닥의 찌꺼기를 청소하는 동안 그의 부인이 빨래통 뚜껑을 잡고 이웃 청년과 벌이는 성행위는 이란 고원을 달리는 파르티아(Parthia: 기원전 247-기원후 224에 걸쳐 이란과 메소포타미아에 자리 잡은 제국으로 키 큰 말이 유명했다.)의 발정한 암말의 교미 자세에 비유한다 (이레째 두 번째 이야기).
이야기가 펼쳐지는 곳은 특히 정직함이 요구되는 성당도 학교도 아닌 오락을 즐기기에 알맞은 정원이다. 게다가 열 명의 젊은이들은 그런 이야기에 휘둘리지 않을 만큼 성숙한 인물들이다. 이야기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도움도 해도 될 수 있는 것이지 이야기 자체가 유해해서 생기는 문제는 결코 아니다.
이야기가 너무 길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이 있다. 따로 할 일이 있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한가한 사람을 위한 것이다. 짧은 이야기는 시간을 유용하게 활용하는 학구적인 사람들한테 좋다. "연구로 정신이 예민해진 사람들"보다 "아테나나 볼로냐 또 파리로 유학가지 않을" 여인한테는 길게 말하는 게 어울린다. 14세기 중엽 이미 파리의 소르본 대학은 유럽 최고의 학교였다!
많은 이야기가 익살이나 객담으로 채워져 있는데 당신 같이 중후한 사람한테 어울리지 않는다. 나한테 호의를 보여주는 여인을 위한 것이다. "수도사가 남자한테 과오를 들추어 가책을 느끼게 하는 설교"도 익살이며 객담, 헛소리 천지다. 나는 이야기에 들어간 이런 류의 말이 여인한테 우울을 떨쳐버리는 데 도움이 된다고 본다.
수도사와 관련된 몇몇 구절에서 내가 악의를 품고 한 게 아니냐라는 걱정을 한다. 이렇게 말하는 여인이 정당한 이유로 그렇게 이끌리지 않았다고 보기에 그녀를 용서하는 게 바람직하다.
마지막으로 보카치오는 이 세상 모든 것은 영속적이지 않고 늘 변하는 것이라 스스로 내린 판단도 믿을 수 없듯이 내 말도 같은 운명일 거라고 덧붙이고 대장정의 막을 내린다.
오 뿌듯! 이렇게 두꺼운 책을 다 읽어내다니! 즐겁기도 하고 힘들기도 했다.
근데 당신의 [데카메론] 소개를 읽고는 뭐가 그리 재미있고 도움까지 되는 책인지 전혀 감이 안 와요.
제 딴은 공들여 설명한다고 애썼는데 한마디로 능력 부족입니다. 아무래도 [데카메론]이 얼마나 흥미롭고 훌륭한 책인지는 직접 읽어보아야 확인될 거 같습니다.
[1] 보카치오는 아흐레째 다섯 번째 이야기의 화자 피아메타의 입을 통해 "이야기꾼이 일어났던 사실과 동떨어지면 이해력 있는 사람들한테 흥미가 반감되어서 (…) 정확한 형식으로 이야기를 들려주겠다."라고 자신의 소설이 사실적임을 밝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