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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샤 pacha Feb 22. 2022

몽테뉴의 온천 순례기

몽테뉴의 유럽 여행기

 몽테뉴하면 그의 유일한 저서 [수상록]만 떠올리게 마련이다. 책 한 권으로 이렇게 유명해진 사람도 흔하지 않으리! 에세이 장르의 효시라고 할 수 있는 [수상록]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관점에서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자신의 지각이나 감각 때에 따라 병에 관해 면밀하게 성찰한 글이다. 그런데 [수상록]말고 몽테뉴의 작품은 또 하나 더 있다. 그의 [여행 일기]라는 여행기이다. 1580년 6월에 출발 1581년 11월에 돌아오는 프랑스, 스위스, 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를 포함하는 여정이다. 

몽테뉴, [여행 일기], Gallimard, 1983

 그의 여행기를 읽다 보면 아주 사교적 성격에 쾌락주의자이면서 동시에 의연한 삶의 태도를 보여주는 그렇지만 지극히 자기 중심주의자 미셸을 만날 수 있다. 작가가 죽고 나서 이백 년 가까운 1770년 몽테뉴성에서 프뤼니가 우연히 수사본 원고를 발견하였다. 원래 이 원고는 출판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몽테뉴는 [수상록]처럼 공들인 문장이 아니라 말하듯이 쓴다. 어쨌든 이 수고본을 바탕으로 1774년 크를롱이 책으로 출판하였다. 그러고 원고는 다시 모습을 감추었다. 동시에 크를롱과 측근들의 필사본도 함께 사라졌다.

 

 출판되지 않은 걸작품을 발굴하려면 작가가 살았던 고성이나 헌책방, 골동품점을 뒤지면 된다! 자취를 감춘 몽테뉴의 원고도 언젠가는 다시 발견될 테다. 그런데 몽테뉴를 만나려면 멀리 몽테뉴성이나 보르도까지 가지 않아도 된다. 파리 라틴 구역에 있는 소르본 대학 옆길 "학교길" 보도 끝에 가면 된다. 뭇 사람들이 영문도 모른 채 "지혜를 내려주소서!"하고 오른발을 하도 어루만져서 번쩍번쩍하니 멀리서도 쉽게 알아볼 수 있다. 그는 거대한 목걸이를 늘어뜨리고 꽃다발 같은 에스파냐풍 칼라를 두르고 있다.


학교길에 세워진 몽테뉴 동상


 1570년 아버지로부터 유산을 물려받고 보르도 고등법원 판사직을 사임한 몽테뉴는 1571년 몽테뉴성에 은거하며 [수상록] 저술에 몰두한다. 먹고살 걱정없이 하고 싶은 일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1580년 [수상록] 초판본을 출판한 다음 그는 페스트와 종교전쟁을 등지고 유럽 여행을 떠났다. 

 

 몽테뉴 일행은 모젤 지방의 에피날이라는 도시에 들어갈 수 없었다. 최근에 페스트가 발생한 뇌프샤토를 지나왔기 때문이었다. 가기로 되어 있던 취리히도 이십 리 가까이 왔다가 페스트가 생겼다는 소식을 듣고 발길을 돌려야 했다. 페라라 성문에서는 여권과 위생 증명서를 검문받는다고 오랫동안 멈추었다. 1580년 11월 30일 로마에 도착했을 때도 1579-1580년에 걸쳐 28000명의 희생자를 낸 제노바 페스트 여파로 검문소 통과하는데 고생을 하였다.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라고 적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탈리아에서는 위생 증명서 검문을 여러 차례 받았다고 볼 수 있다. 이탈리아 국경을 지나 몽테뉴성으로 돌아오는 여정에서도 몽테뉴는 페스트에 대한 언급을 세 차례나 한다. 페스트를 피해 리옹 근처로 은둔한 리옹의 은행가, 페스트가 지나간 다음 정화한다고 불태워버린 영주의 성, 페스트가 지나가고 반은 폐허가 된 마을. 이렇게 페스트는 [여행 일기]에도 스쳐지나가듯 은근슬쩍 모습을 드러낸다.


 "새로운 것과 미지의 것에 대한 갈증"으로 떠난 유럽 여행은 결석 치료가 중요한 몫을 차지하였다. 그래서 여정은 온천지를 중심으로 짜여진다. 물론 끔찍한 페스트와 종교전쟁도 피하고 가정생활의 의무에서도 벗어나려는 도피성 여행이었다. 마음에 맞는 사람들끼리 떠나는 여행은 생각만 해도 황홀하다. 몽테뉴의 생에서 세 살 위인 부르주아 신교도 라보에시와 맺은 4년 간의 우정은 전설적이다. 주로 서신 교환을 통해 우정이 다져졌다! 답장 기다리는 시간이 소중한 손으로 쓰는 편지가 지금도 존재하는지 모르겠다. 


 "왜 그를 좋아했냐고 다그친다면 나는 뭐라고 답할 방도가 없다". 

 "왜냐면 그였기에, 왜냐면 나였기에". 


 아무튼 서른 둘에 이질로 급사해버린 라보에시와 같이 떠날 수는 없었고 하인들을 거느리고 남동생과 제부를 비롯 몇몇 귀족들과 함께 떠난 단체 여행이었다. 전통적인 여행기처럼 유명 유적지나 여행지의 전설을 주로 소개하기 보다는 자신의 몸 상태나 기분, 여행지의 숙박 시설이며 음식 등을 더 세세하게 기록하고 특히 온천 소개를 자세하게 곁들인다. 여행 일지처럼 이동 수단이며 부대 비용 그리고 지나치는 작은 마을이나 도시도 빠짐없이 기록한다. 출발지와 도착지까지 거리는 물론이고 숙박지의 간략한 지형 설명까지 곁들인다. 또 각 체류지에서 사람들이 자신한테 베푼 호의며 자신이 받은 과일, 생선, 포도주 같은 선물도 잊지 않고 기록한다. 각 도시에서 일어나는 종교나 민속 축제 같은 구경거리는 절대 놓치지 않는다. 호기심 많은 몽테뉴는 가는 곳마다 그 지방 음식과 포도주의 품질을 평가하는 것처럼 각 지역 여자들의 미추에 대해 꼭 한 마디한다. 베네치아나 로마, 피렌체에서는 유곽도 빼놓지 않고 구경간다. 그는 [수상록]에서 "여행만큼 좋은 학교는 없다."하지 않았나. 몽테뉴 선생님의 말씀을 따르자면 학교 다닐 필요없다. 다른 곳과 다른 사람에 대한 무한한 호기심을 가지고 부지런히 여행하면 다 배울 수 있다! 


 로마에 도착하는 여정까지 여행기 원고의 삼분의 일 정도는 신원이 밝혀지지 않은 몽테뉴의 비서가 작성하였다. 나머지는 작가의 육필 원고이다. 몽테뉴는 1580년 보르도에서 출판한 [수상록] 한 권을 가져가는데 로마에 도착한 이튿날 세관의 검문(1580년 12월 1일)에서 카톨릭 기준으로 의심스러운 다른 책들과 함께 압수당한다. 그리고 이듬해 3월 20일 프랑스어를 전혀 모르는 교황청 검열관이 프랑스 수도사의 보고서에 의존하여 이런 저런 트집을 잡은 [수상록]을 되돌려받는다. 단지 신교도가 번역했다는 이유로 [스위스 역사]는 아예 돌려받지 못한다. 4월 15일 몽테뉴는 티볼리를 방문하고 로마로 되돌아와서 교황청 검열관을 만나 작별인사를 전한다. 검열관은 몽테뉴한테 자신들의 검열에 너무 괘념하지 말하고 전한다. 그렇지만 섭리라는 말을 쓰지 않고 운명이라는 말을 썼다고 끝까지 문제삼는다. 그럼에도 교황청 관계자는 몽테뉴의 의도와 성당에 대한 애정 그리고 솔직함을 높이 사면서 검열에 대해 사과하고 로마에 남아 성당을 위해 같이 일하자고 제안까지 한다. 물론 독실한 카톨릭 교도이면서도 신교도한테 우호적인 몽테뉴는 [수상록]을 다시 인쇄할 때 교황청의 독단적인 지적을 절대 고려하지 않는다.


 게다가 몽테뉴는 "마침 이 지방에 와 있으니" 재미 삼아 또는 실험 삼아 이탈리아 여정 부분을 이탈리아어(30% 차지)로 쓴다. 더 정확히 말하면 현대 이탈리아 표준어가 된 "주변 지방의 사투리가 섞여 타락하지 않은 (…) 가장 순수한 토스카나 지방어"이다. 어떻게 해서 토스카나어가 이탈리아 표준어가 되었을까 ? 모두 이 지방 출신으로 초기 이탈리아 문학의 위대한 세 거장 단테, 페트라르카, 보카치오는 토스카나어로 작품을 썼다! 

 

 몽테뉴는 델라빌라 온천장에서 피렌체로 다시 왔을 때 책 한 보따리를 구입한다. 그 중에 보카치오가 [데카메론]에 관해 밝힌 몇몇 견해와 함께 그의 유언장을 인쇄한 책이 들어 있다. 몽테뉴는 이 유언장을 읽고 보카치오가 죽기 직전 얼마나 가난하고 비참한 신세가 되었는지 알게 된다. 장기간(17개월)의 여행 비용에 구애받지 않고 여유 있게 여행하면서 장기 체류하는 숙소에 귀족 문장을 내걸고 가는 곳마다 칙사 대접을 받는 그와는 상당히 다르다! 


"그(보카치오)는 여자 친척들과 누이들한테 고작 침대 시트 몇 개와 침대 부품 몇 개를 남겨준다. 책은 필요로 하는 사람이 나타나면 누구든 열람시켜 줄 조건으로 어느 수도사한테 물려준다. 심지어 그는 가재도구나 허저분한 가구까지 기록한다". 


 이런 처지가 된 것을 두고 누가 신의 섭리하고 할 수 있을까 ?


 아버지 대에 부르주아에서 귀족이 된 몽테뉴는 독일인 가정 교사한테 여섯 살 때가지 라틴어로 고전 교육을 받고 그 이후 학교에 가면서 프랑스어를 배운 인물이다. [여행 일기]의 원고는 사라져서 이후의 발행인들은 원고를 참조할 수 없고 먼저 간행된 여러 판본을 참조하였다. 그런데 1980년 원본의 일부(삼분의 일 정도)를 베낀 필사본이 발견되어 크를롱 초판본의 오류를 바로잡는데 도움이 되었다. 고전을 읽을 때 좋은 판본을 고르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몽테뉴는 [수상록] 출판에서 자신은 "철자라든지 구둣점은 간여하지 않고 출판인한테 맡긴다."고 밝힌다. 결국 저자의 의도를 잘 살리는 일은 편찬자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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