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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샤 pacha Feb 24. 2022

로베르 샬, [실비의 이야기], 결백한 불륜

    삼백 년 만에 이름이 밝혀진 작가, 로베르 샬


샬, [유명한 프랑스 여인들], [동인도 여행 일기]

 훌륭한 작품이지만 작가가 밝혀지지 않은 작품도 적지 않다. 구전문학의 경우가 그렇다. 또 이런 저런 이유로 의도적으로 작가가 자신을 숨길 수도 있다. 그래서 몇 세기가 지난 다음 작가가 밝혀지기도 한다. 프랑스 근대소설의 효시로 알려진 [유명한 프랑스 여인들](1713)과 인류학자적인 면밀한 자료동원과 날카로운 심리묘사로 문학성이 뛰어난 여행기 [동인도 여행 일기](1721)를 남긴 로베르 샬이라는 작가가 그런 경우다. 


 샬은 자신의 흔적을 없애려고 익명이나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작품을 발표하거나 아예 미간행 원고 상태로 남겨두었기에 꼼꼼한 문학 연구가의 그물망을 빠져나갔다. 20세기 중반까지도 이 작가의 성이나 이름 그리고 태생에 대해 확실하게 알려진 게 없었다. 심지어 그가 실존인물인지도 의문스러웠다. 특히 샬은 자신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쓰면서도 의도적으로 자신의 신원을 감추려고 가능한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하였다. 1960년이 되어서야 샬은 작가로서 정체가 확실하게 밝혀지고 1990년대부터 작품 연구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면서 18세기 초에 활약한 가장 뛰어난 작가로 거듭 태어났다. 프랑스 문학사에서 알려지지 않고 등한시된 훌륭한 작가가 예외적으로 삼백 년 걸려 화려하게 복권된 경우다.

 

 당대에 샬의 작품은 이미 많이 읽혔으며 후대에 미친 영향은 지대하다. 인물과 사건이 서로 교묘하게 얽히고설킨 일곱 편의 연작 소설집 [유명한 프랑스 여인들](1713)은 1780년대까지 14개의 판본으로 출판되고 영어(1727), 독일어(1728), 네덜란드어(1730, 1738, 1748)로 번역이 되어 대성공을 거두었다.

  

 [유명한 프랑스 여인들]은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처럼 듣는 사람 앞에서 이야기꾼이 이야기를 들려주는 액자소설의 형식을 취한다. 일곱 편의 이야기는 장소를 네 군데로 옮겨 가며 이레 동안 진행된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이야기는 데로네의 집, 세 번째와 네 번째는 마농 뒤피의 집, 다섯 번째는 난봉꾼 뒤피 어머니의 방, 여섯 번째 « 데프랑과 실비 »는 콩타민 저택, 마지막 « 난봉꾼 뒤피와 롱데 부인 »은 다시 데로네의 집에서 이루어진다. 이야기가 진행됨에 따라 청중의 수가 늘어난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이야기에서는 데로네가 자신의 집에서 데프랑 한 사람한테 들려주다가 여섯 번째와 마지막 이야기에서는 청중이 열 명으로 늘어난다. 특히 비밀 이야기를 듣지 말아야 하는 청중은 이야기 장소에서 사라진다. 첫 번째 이야기 « 데로네와 마농 뒤피의 이야기 »에서 데로네가 일인칭 주인공 화자로 등장하는데 사촌 여동생과 관계된 사건이라 난봉꾼 뒤피는 자리를 뜬다. 마지막 이야기의 화자인 난봉꾼 뒤피가 자신의 여성 편력을 밝힐 때는 자신의 결혼 상대자인 롱데 부인이 청중으로 참석하지 않는다.


 [데카메론]처럼 청중도 이야기 중간이나 마지막에 끼어들어 자신의 의견을 밝힌다. [데카메론]과 달리 [유명한 프랑스 여인들]에서는 외부 이야기의 인물들이 그대로 내부 이야기의 주인공이나 인물로 등장하여 두 이야기는 한 공간의 무대와 관객석처럼 바로 연결되어 있다. 더욱이 여기에 모인 사람들은 서로 아는 사이라 이야기꾼이 모르는 사실을 청중이 끼어들어 보충하거나 편지를 통해 관찰자 화자가 모르는 정보를 제공한다. 화자는 이미 일어난 과거 이야기를 청중 앞에서 들려줌으로써 현재 진행형처럼 이야기가 전개된다.


 샬의 소설은 철저한 관찰자 화자(네 편은 일인칭 관찰자, 세 편은 삼인칭 관찰자)의 시점을 취하면서 마치 사건이 눈앞에 펼쳐지는 것처럼 이야기를 전개시킨다. 이야기가 거듭될수록 인물들과 사건들이 복잡하게 얽히고설키는데 같은 사건을 두고 서로 다른 화자의 입으로 서술하는 독특한 이야기 구조를 보여준다. 그 결과 이야기의 진실이 확실하게 드러나지 않고 늘 새로운 미궁 속으로 빠져들어간다. 이 점에서 샬 소설의 혁신적이고 현대적인 면모가 잘 드러난다. 특히 샬은 저자 « 서문 »에서 "친구들한테 말하듯이 완전히 꾸밈없고 구어체적인 문체"로 쓴다고 밝힌다. 


 샬의 인물들은 17세기 후반 귀족과 부르주아 계층에 속하는 인물들로서 뒤피 가문(마농 뒤피의 아버지와 어머니, 난봉꾼 뒤피의 어머니와 형도 부차적 인물로 등장한다.)을 중심으로 서로 친구 관계나 인척 관계로 복잡하게 얽혀 있다. 데로네, 데프랑, 난봉꾼 뒤피는 서로 절친한 친구 사이다. 난봉꾼 뒤피와 결혼하게 되는 롱데 부인은 남편과 사별한 과부로 이 세 사람과 친구 사이인 갈루앵의 여동생 나네트이다. 


 샬의 소설은 영웅적이고 역사적인 사건을 다루는 게 아니라 일상적이고 평범한 사건에서 벌어지는 남녀간 애정 드라마이다. 네 번째까지는 해피엔드로,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는 여주인공의 죽음으로, 마지막 난봉꾼 뒤피의 익살스러운 이야기는 세 쌍의 결혼(난봉꾼 뒤피와 롱데 부인, 데로네와 마농 뒤피, 데프랑과 몽제 부인)으로 끝난다. 그렇지만 작가는 이야기를 완결 구조로 끝맺지 않고 또 다른 인물이나 사건의 후속편이 이어질 것처럼 보류 상태로 놓아둔다.


 샬은 [유명한 프랑스 여인들]에서 정략 결혼이 아닌 자유연애 결혼, 무사귀족의 몰락과 법복귀족과 금융 부르주아의 상승, 기성세대의 권위주의, 상속 문제, 여성의 사회적 지위(특히 과부 문제), 위선적인 카톨릭 신앙 등의 다양한 주제를 다룬다. 소설집 제목이 가리키듯 독립적인 기질의 여주인공들은 자신의 마음이 끌리는 대로 어떤 난관(주로 지위나 부의 차이)을 뚫고서라도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한테 돌진한다. 온갖 어려움을 헤치고 행복한 결말이 나는가 하면 사회적 편견과 남성 권위주의의 희생양(마들롱과 실비)이 되어 죽음에 이르는 비극이 되기도 한다.


 첫 만남에서 한눈에 반하는 남녀간의 다양한 연애 사건을 다룬 일곱 편의 연작 소설집은 전후 맥락 없이 사건 중간에서 바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대낮에 하인 한 명을 거느린 채 말을 타고 이동하는 데프랑은 노트르담 다리와 센 강변 도로의 교차로에서 쇄도한 마차들로 옴짝달싹 못한다. 이때 파리 법원에서 마차를 타고 나온 데로네가 데프랑과 마주친다. 칠 년만에 외국에서 파리로 되돌아온 데프랑과 막역한 친구 데로네는 그 간의 소식을 확인하는데 실비와 갈루앵이 죽은 사실을 서로 상대한테 알린다. 

 이 시작 부분은 숨겨진 외부 작가의 시점으로 장면 묘사와 인물 등장이 이루어지면서 독자한테 수많은 궁금증을 불러일으킨다. 이 중 인물과 사건이 가장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여섯 번째 소설인 « 데프랑과 실비의 이야기 »에서 실비와 데프랑의 인물 묘사와 실비와 갈루앵의 불륜을 바라보는 다초점적인 기법을 살펴 보자.



    « 데프랑과 실비의 이야기 »


 데프랑은 실비와 사귄 지 이 년이 지나 결혼한 다음에서야 그녀의 진면목을 알게 되었다고 말한다. 데프랑이 보기에 실비는 외형적으로 완벽한 여인이다. 외모는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데다가 감미로운 목소리로 노래도 뛰어나게 불러서 매혹되지 않을 수 없다. 그뿐 아니라 악기 연주도 잘하고 노래에 맞춰 춤까지 우아하게 잘 추어 정신을 잃을 뻔한다. 데프랑은 실비가 미의 화신에 순결한 마음을 가진 줄 알았는데 겉보기와 달리 이중적이다. 실비는 뛰어난 배우처럼 자신을 숨기고 얼굴이며 말을 자유자재로 바꿀 줄 안다. 얼핏 보아 아주 진실된 것처럼 보여도 쾌락에 탐닉하는 기질이 있다. 특히 사랑에 빠지면 다른 모든 가치를 저버리고 헤어나지 못한다. 

 데프랑이 보기에 실비는 한마디로 "변덕스럽고 바람기가 많다". "요컨대 뻔뻔스러울 만치 과감해서 육체적으로 모든 아름다움을 갖춘 만큼 정신적으로 온갖 나쁜 점들을 다 갖고 있다". 그런데 이 나쁜 점들을 용하게 감출 줄 알아서 사람들은 실비를 진실되고 절개를 지키며 사리사욕이 없는 사람으로 여긴다. 이게 실비가 불륜을 저지르고 죽고 난 다음 데프랑이 사건을 되돌아보며 그릇되게 바라보는 실비이다. 스스로 실비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데프랑의 판단도 온당하지 않다. 실비의 외관과 달리 그녀의 성향이나 기질은 하나의 유형으로 고착된 게 아니라 상황에 따라 가변적이다.


 실비한테 반하면 남자들은 물불 가리지 않고 돌진한다. 데프랑은 물론이고 크랑브 부인의 유부남 급사장 발레랑 그리고 마법을 동원해서 육체적으로 실비를 정복한 난봉꾼 갈루앵도 마찬가지다. 크랑브 부인의 재무 집사로 결혼 상대자였다가 감옥에서 죽은 가로도 그렇다. 심지어 법적인 아버지로 삼으려던 말종 루비에르 마저 아름다운 실비의 육체를 탐한다.


 실비는 업둥이로 고아원에서 자라다가 크랑브 공작 부인이 데려온 하녀가 아니라 알고 보니 무사 귀족 뷔랭주 후작의 사생아로 크랑브 부인(뷔랭주와 크랑브는 남매간이다.)의 질녀이다. 여덟 살에 고아원에서 나와 크랑브 부인의 집에서 열여덟 살까지 자란다. 그렇지만 크랑브 부인은 공개적으로 혈연관계를 인정하지는 않는다. 실비는 빼어난 미모에 귀족 출신의 여자한테 필요한 교양과 기예를 다 갖추고 있다. 


 데프랑이 결혼 허락을 누구한테 받아야 하느냐고 물었을 때 실비는 자신의 태생을 밝히지 않고 어물쩍 넘어간다. 다음부터가 발레랑의 음모론적인 실비의 면모이다. 얼핏 보아 미덕까지 타고난 줄로 비치지만 실제 그녀는 도덕적으로 수상한 점이 수두룩하다. 하인과 어울려 결혼 전에 수상쩍은 연애질을 일삼고 모랭 부인과 짜고 크랑브 부인의 패물과 현금을 훔치지 않나 고아인 걸 감추어 부유한 귀족 가문의 데프랑과 결혼하기 위해 기품 없는 몰락한 귀족 루비에르를 매수하여 법적인 아버지로 만들려는 수작까지 벌인다. 실비를 모함하여 데프랑과 헤어지게 하려는 속셈에서 발레랑은 연애와 절도 행위는 확실하지는 않지만 의심 가는 대목이라고 얼버무린다. 발레랑이 쓴 익명의 편지를 통해 데프랑과 데프랑 어머니는 실비의 출생 비밀을 접하게 된다. 실비의 출생에 대해 전혀 정보가 없는 데프랑은 편지가 알려주는 비밀을 긴가민가하면서도 일단 사실처럼 받아들인다.

 

 데프랑은 발레랑의 음모 편지를 받은 이튿날 루비에르(실비를 돈으로 호적을 사고 심지어 몸까지 제공할 수도 있을 천한 여자로 지레짐작한다.)를 만나 추가 정보를 입수한다. 그다음 자정 가까운 시각에 실비를 찾아가 살인자적인 독설로써 잔인하게 공격한다. 자신의 탐탁지 못한 행위가 폭로되자 실비는 아무 대꾸도 못하고 눈물만 흘린다. 실비는 복수의 쾌감을 느끼며 문을 나서려는 데프랑을 완강히 가로막고 그의 발아래 몸을 던져 다리를 부여잡고 해명할 기회를 달라고 간청한다. 그리고 루비에르를 매수하려든 과오를 솔직히 시인하며 데프랑을 너무도 사랑해서 잃을까 두려워 저지른 짓이지 모욕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었다고 고백한다. 


자크 코르미에 판, [유명한 프랑스 여인들], Classiques Garnier, 2015, p. 373.

 "이 순간 나는 그녀한테로 눈길을 돌렸다. 나는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여태 내 발밑에 있었다. 하지만 잔인함마저도 누그러뜨릴 낌새였다. 그녀는 눈물범벅이 되어 있었다. 간편한 잠옷의 벌어진 틈새로 젖가슴이 드러났다. 밤 머리로 하려고 풀어헤친 머리 타래는 다시 묶지 않아서 몸을 타고 죽 흘러내리면서 온 몸을 뒤덮었다. 모욕당한 상태 그대로가 보여주는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이 더욱 연민을 불러일으켰다. 마침내 나를 이끄는 운명의 별은 내 사랑의 대상과 내 마음의 우상만 보게 하였다. (…) 그녀는 제이의 막달라 마리아처럼 보였다. 이 모습이 애처로워서 나는 그녀를 일으켜 세우고는 하고 싶은 말을 다하도록 내두었다. (…) 나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 아니 차라리 살아 있으면서도 죽은 사람이나 다름없는 무감각한 의식 상태로 빠져들었다." 


 이런 실비를 보자 데프랑의 복수심이 한 풀 꺾이면서 혼돈에 빠진다. 일주일을 앓아누운 다음 데프랑이 실비를 찾아갔을 때 실비는 데프랑한테 발레랑의 음모 편지에 대해 사실과 다른 점을 낱낱이 밝힌 다음 수녀원으로 들어가기로 결심했다고 말한다. 특히 루비에르 건에 대해서 자신의 아버지가 고모 크랑브 부인한테 보낸 친서를 가로가 가지고 있다가 감옥에서 죽으면서 사라진 상태라 자신의 출생을 증명할 길이 없어 꾸며댄 짓이었다고 둘러댄다. 실비의 해명을 듣고 난 데프랑은 실비와 영원히 헤어지고 파리를 떠나겠다는 결심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결국 데프랑은 실비와 화해를 하고 결혼을 약속하기에 이른다.

 

 데프랑은 발레랑이 고자질한 거짓 정보를 수정하지만 이미 입력된 부정적인 인상을 완전히 제거할 수는 없다. 특히 데프랑의 어머니는 빌블랭 기사가 진실을 알려줄 때까지 거짓 정보를 사실로 여긴다. 나중에 진실이 밝혀지더라도 이미 입력된 허위 정보는 늘 기억의 찌꺼기로 남게 마련이다.


 발레랑의 음모 편지에 맞서 실비는 데프랑한테 허위 정보를 조목조목 반박하며 자신의 신상에 대한 사실을 수정한다. 발레랑이 익명의 투서를 통해 모함하는 실비의 신상은 거의 다 왜곡된 정보이다. 실비는 도둑질과 사련을 했다고 모함한 발레랑을 일대일로 만나 데프랑이 몸을 숨긴 현장에서 당사자한테 질투심으로 인한 음모였다는 해명을 듣는다. 

 그렇다면 실비가 밝힌 자신의 출생에 얽힌 정보는 백 퍼센트 정확한가? 아니다. 자신도 모르는 비밀이 숨겨져 있다. 이것은 실비의 대부인 빌블랭 기사가 밝힌다. 실비 아버지와 각별한 친구였던 빌블랭 기사는 크랑브 부인과 데프랑 부인한테 공히 절대적 신임을 가진 인물이다. 실비와 데프랑이 결혼 직후 빌블랭 기사가 실비를 만나러 왔을 때 그는 데프랑 어머니와 사촌간이라고 뒤늦게 밝힌다. 빌블랭은 실비의 친모가 실비 할머니의 하녀 출신으로 실비를 낳고 바로 죽은 게 아니라 귀족 출신으로 실비의 아버지가 전쟁터로 간 사이 딴 남자와 강제 결혼하게 된 사연을 알려준다. 이런 식으로 실비를 둘러싼 정보는 늘 불완전하고 파편적이다. 더욱이 서로 모순되는 수가 많다. 그렇다면 독자들은 실비라는 인물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실비는 자신한테 돌진한 남자들을 파멸의 길로 이끄는 팜 파탈인가? 크랑브 부인이 정해준 결혼 상대자 가로는 발레랑의 모함으로 감옥에 들어간 지 닷새만에 학대당해 죽는다. 실비가 수도원에서 죽은 다음 회한에 찬 데프랑은 칠 년 동안 외국으로 떠돈다. 갈루앵은 실비를 정복할 때 걸림돌인 실비의 후견인 모랭 부인을 마약으로 독살시킨다. 나중에 그는 실비와의 관계가 불륜임을 깨닫고 범행을 숨기려고 아니면 속죄하려고 수도사가 되는데 숲길을 지나다가 산적한테 살해당한다. 실비를 차지하려고 노골적으로 모략질 하던 발레랑은 실비를 부인으로 삼을 꿍꿍이 수로 자신의 부인까지 살해하지만 결국 루비에르의 손에 죽임을 당한다… 

 그렇지만 실비는 남자들의 희생양으로 볼 수도 있다. 발레랑의 모함 편지 이야기를 듣고 난 난봉꾼 뒤피는 이렇게 판단한다. 


 "가여운 실비는 늘 냉대받은 애인들의 피해자였습니다. 무척 고결하고 정숙했음에도 늘 운 나쁘게 의심받았으니 말입니다. 끝내 실제로는 아주 결백했음에도 겉보기에는 죄인으로 죽었어요." 


 난봉꾼 갈루앵도 실비가 자신 때문에 불행해지고 파멸의 길에 이르렀다고 진심으로 뉘우친다.


 한편 데프랑은 품위 높은 무사 귀족의 후예라고 제 입으로 말하지만 그에 걸맞게 지조 있는 신사가 절대 아니다. 데프랑은 아버지가 전쟁터에서 전사하여 빛까지 떠안아 경제적인 여유가 없는 데도 삼촌들이 주선해준 세금 징수하는 일자리가 싫어서 자신의 어머니와 삼촌들한테 온갖 핑계를 둘러대고 박차고 만다. 지방의 근무지에서 자신한테 근무 시간을 지키지 않았다고 훈계한 지방 유지한테 고스란히 앙갚음한다. 금융과 조세 분야에서 부자가 된 삼촌 둘을 "유태인에다 고리대금업자"라고 비야냥 그리면서도 자신이 높이 사는 무사로서 곧장 전쟁터로 나가지도 않는다. 실비와의 관계에서도 약점이 발견되면 가차 없이 복수한다. 실비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된 데프랑은 자신의 어머니한테 "살아생전 두 번 다시는 그 천한 년을 쳐다보지도 않을 겁니다."하고 심한 표현을 서슴없이 쓴다. 실비와의 관계도 자신의 어머니한테 완전히 숨기고 몰래 결혼까지 한다. 실비와 갈루앵의 불륜 현장을 목격한 다음 복수하기 위해 이유를 밝히지 않고 실비를 지방으로 유인하여 감금하고 죄수처럼 다룬 것은 데프랑의 어머니를 비롯 주변 사람들이 상상하기 힘든 야만적인 행위다. 데프랑은 스스로 마음이 약하다고 밝히지만 잘못을 인정하고 뉘우치는 실비를 잔인하게 벌주고 냉혹하게 버린다. 이런 데프랑의 언행은 귀족의 품위에 전혀 맞지 않는다. 그럼에도 실비가 수도원으로 들어갈 때 그녀가 가진 전 재산을 고스란히 물려받는다.


 데프랑과 실비는 몰래 결혼(그렇더라도 성당에서 카톨릭 신부가 주관하는 예식과 증인이 반드시 필요하다.)하고 남들한테 결혼한 사이가 아닌 것처럼 행세한다. 그러다가 빌블랭 기사한테 결혼 사실을 밝힌다. 그로부터 자신의 동의 없이 외동아들이 결혼한 소식을 접한 데프랑의 어머니는 사적으로는 인정하되 공개적으로는 절대로 인정할 수 없다고 완강하게 나온다. 그 결과 데프랑은 실비와 거처를 달리하고 손님처럼 실비의 집을 몰래 드나들 수밖에 없다. 데프랑은 신혼 초 아버지가 물려준 지방의 영지에 화재가 나서 법적인 문제를 처리하러 네 달 동안 파리의 집을 비운다. 이 점에서 실비의 불륜에 대해 책임을 면할 수 없다. 그 사이 데프랑의 친구인 난봉꾼 갈루앵은 실비한테 한눈에 반해 집요하게 접근하지만 실비는 전혀 호의를 보이지 않는다. 결국 갈루앵은 음흉한 술수를 이용하여 예상보다 손쉽게 실비를 정복한다. 그런데 갈루앵이 실비와 육체관계를 맺던 밤 예정보다 빨리 올라온 데프랑이 두 사람이 뒤엉겨 잠든 모습을 목격한다. 불륜 현장에서 데프랑은 두 사람을 죽이지 않고 갈루앵이 이용한 실비의 마법 목걸이만 챙겨 물러선다. 그 이후 데프랑은 이유를 밝히지 않고 갈루앵한테 시비를 걸고 결투(루이 13세 시절부터 법적으로 금지되었다.)를 벌여 갈루앵한테 크게 상처를 입히지만 죽이지는 않는다. 데프랑은 실비한테 복수하려고 치밀하게 계획을 짠다. 편지로 실비를 자신이 머무는 지방으로 유인하여 불탄 영지에 남은 건물 일부를 감방으로 개조하고 실비를 세 달 동안 감금한다. 데프랑은 실비가 스스로 자기 머리채를 자르게 하고 누더기를 걸치게 하여 흑빵에 물만 주면서 죄수처럼 학대한다.


 갈루앵의 비밀을 알고 있는 난봉꾼 뒤피는 여러 차례 실비가 "인간의 본성이나 여인의 정조로는 저항할 수 없는" 강력한 힘에 이끌려 간통을 저지르게 된 것이지 의도적인 행위가 아니라고 실비를 두둔한다. 남편의 친구와 간통한 실비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면서도 데프랑한테 "어떤 초자연적인 힘"에 강제되었을 뿐 의도적인 불륜은 아니었다고 변호한다. 남편의 가학적인 처분을 달게 받으면서도 실비는 데프랑한테 자신의 사랑은 변함없다고 고백한다. 자기 주장이 뚜렷한 독립적인 성격의 실비가 데프랑한테 집착하는 면은 거의 병적이다. 곁에 두고 학대해도 좋으니 제발 자신을 버리지 말라고 아무리 애원해도 데프랑은 자신이 당한 치욕과 불명예를 내세우며 실비의 수도원 입소를 강행한다. 실비한테 데프랑과 헤어짐은 바로 죽음을 뜻한다. 


 실비는 수도원에 들어간 뒤 갈루앵한테 보낸 유일한 편지에서 스스로 약점에 넘어가 육체적으로 정복당했지만 끝내 자신은 결백하다고 주장한다. 정신적으로는 순수하지만 육체적으로는 관능에 쉽게 넘어갈 수 있다고 우긴다. 갈루앵한테 마음으로 전혀 이끌리지 않았으면서도 스스로 육체관계를 맺었다고 밝힌다. 이 점에서 샬은 실비의 간통을 "결백한 불륜"이라는 관점으로 제시한다. 실비는 데프랑한테 버림받고 수도원으로 들어가면서 데프랑과 나눈 마지막 대화에서 이렇게 자신을 변호한다. 


 "그리고 저는 머잖아 죽을 거예요. 정당한 사랑의 희생자이자 실질적인 죄악의 희생자요 그리고 동시에 완전히 무고한 희생자로서 말이에요. 어쩌다가! 눈물을 쏟아부으면서 그녀는 말을 이었다. 무슨 마법에 걸려 서로 모순되는 것들이 제 속에 실제로 있을 수 있단 말인가요?"

 

 데프랑은 실비를 학대하고 냉혹하게 버리고서 마음이 약해져 슬픔과 회한을 억누르지 못하고 죽음을 찾아 이탈리아를 향해 떠난다. 얼마 가지 않아 실비를 향한 사랑의 불길이 드세게 되살아나면서 광기에 사로잡혀 사경을 헤맨다. 쇠약에서 회복한 다음 데프랑은 그르노블에서 우연히 예전에 산적한테 빼앗긴 실비의 초상을 다시 발견한다. 실비의 초상을 되찾고는 실비한테 되돌아가기로 결심한다. 이미지의 강력함이란! 네  달 전에 실비가 들어간 수도원으로 서둘러 급히 달려가지만 실비는 이틀 전에 숨을 거두고 없다.


 나중에 갈루앵은 데프랑과 실비가 결혼한 사이인 줄 모르고 그런 짓을 했다고 변명한다. 일곱 번째 소설(« 뒤퓌와 롱데 부인 »)에서 이야기꾼으로 등장하는 갈루앵과 절친한 친구 난봉꾼 뒤퓌가 갈루앵의 증언을 들려준다. 목격담도 아니고 친구 난봉꾼한테 들은 이야기이다. 자신의 말대로라면 동 쥐앙 뒤퓌는 이름을 밝힐 수 없는 과부와의 5년간의 (육체적) 관계에서 깨달은 바 있어 방탕한 생활에서 졸업하여 갈루앵의 여동생이며 과부가 된 영원한 소녀 같은(?) 롱데 부인과 결혼할 사이다. 그러니 바람둥이 뒤퓌는 이미 죽은 처남한테 유리한 입장을 취했을 수 있다. 게다가 신실함이 없는 난봉꾼들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도 없는 일. 난봉꾼 뒤피의 말로는 수도사가 되어 성인처럼 살아 가던 갈루앵은 지방에서 설교하고 파리로 돌아오는 밤길에 숲을 지나다가 점괘대로 도적떼한테 잡혀 수도사 복장은 뺏기고 목매달려 죽는다.

 

 데프랑은 실비가 죽은 다음 슬픔을 달래려고 외국 전쟁터로 떠돌다가 칠 년 만에 프랑스로 되돌아온 참이었다. 자신의 잘못으로 실비를 죽였다고 친구들 앞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으면서 가슴을 치며 회한의 눈물을 흘린다. 사건이 눈앞에 벌어지는 것처럼 체험담을 들려주지만 시간의 간극으로 실비를 바라보는 데프랑의 시각도 변했을 가능성이 많다. 소설 마지막에 가서 갈루앵의 비밀을 들은 난봉꾼 뒤퓌는 실비가 자신의 욕망에 따라 불륜을 저지른 게 아니고 갈루앵의 미약에 넘어간 것이라 도덕적으로 순결하다는 면죄부를 준다. 이 이야기를 들은 데프랑은 흐느껴 울고 덩달아 청중들 모두가 애꿎게 죽은 실비가 가여워서 눈물을 흘린다. 갈루앵의 증언을 전달하는 난봉꾼 뒤피의 이야기를 듣고 참석한 모든 청중들이 실비의 무고함에 동의한다. 그렇다면 갈루앵의 음흉한 술수에 넘어간 실비의 불륜은 무고하다고 보아야 하나? 그렇지만 뒤퓌나 데프랑의 이야기는 사건의 당사자인 갈루앵과 실비가 죽고 난 다음 뒤돌아 보는 시점이라 당사자들은 사건에 대해 반응을 보일 수 없는 상태다.

 

 실비라는 인물의 출생 비밀은 여러 사람의 입을 통해 차츰차츰 드러난다. 정보가 전혀 없는 상태에서 왜곡된 거짓 정보부터 제공되어 허위 정보를 바로 잡고 불충분한 정보는 보충된다. 오해와 반전을 거듭하면서 실비 출생의 수수께끼가 한 꺼풀 한 꺼풀 벗겨진다. 마찬가지로 실비와 갈루앵의 불륜 행각도 여러 사람의 시선을 통해 사건이 비친다. 불륜 현장에서 목격한 데프랑의 관점, 간통을 한 실비 당사자의 관점 그리고 마법을 동원한 갈루앵의 관점을 각기 다른 화자의 입을 통해 같은 사건을 두고 여러 각도로 보도한다. 그런데 여러 화자가 밝히는 정보는 늘 불완전하다. 화자가 몇몇 정보를 생략하고 빠뜨리면서 새로운 궁금증이 생기는데 나중에 가서 다른 화자나 편지를 통해 숨겨진 비밀이나 잘못된 정보를 다른 각도로 보도한다. 독자는 서로 모순적인 조각조각난 정보들을 끌어모아 퍼즐을 재구성할 수밖에 없다. 


 화자의 제한된 시점으로 이야기꾼이 청중 앞에서 사건이 마치 눈앞에 펼쳐지는 것처럼 들려주어서 독자들이 이야기에서 눈을 뗄 수가 없다. 복잡하고 정치한 실마리를 깔고 사건을 전개시켜 잠시 한눈을 팔면 이야기의 흐름을 놓친다. 남들이 듣는 앞에서 화자가 자신과 자신이 사랑하는 여주인공의 이야기를 하거나 아니면 타인의 사랑 이야기를 전달시키는 형식을 띠는데 거기에 청중까지 가세하면 그야말로 폴리포니한 목소리가 뒤섞인다. 작가는 이야기 상황에 따라 직접화법과 간접화법, 자유 간접화법을 수시로 뒤섞는다. 이런 상황은 프랑스어의 복잡한 대명사로 드러난다. 읽다 보면 화자가 누구인지 대명사가 가리키는 것이 무엇인지 헛갈릴 때가 수두룩하다. 


 결국 이야기가 진행됨에 따라 독자들은 작가가 조금조금씩 제공하는 모든 단서들을 종합해서 사실을 판단해야 한다. 단순히 벌어지는 사건의 겉모습만 가지고 사건의 진정한 실체를 파악할 수 없다.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정보들은 늘 확실하지 않고 유동적이다. 숨겨진 비밀의 폭로나 같은 사건을 서로 다른 인물의 관점에서 보도하면서 숱한 오해와 갈등과 반전이 끊임없이 일어난다. 보이지 않는 외부의 작가가 정보를 통제하면서 같은 사건이라도 보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 사실 판단이 확연히 달라진다. 독자는 여러 인물의 관점을 종합하여 자신의 주관에 따라 재해석할 수밖에 없다. 데프랑이 전하는 실비 자신의 고백과 갈루앵의 비밀을 전달하는 뒤퓌의 이야기를 들은 청중들이 실비가 무고하다는 의견에 동의한다고 그게 진실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렇다면 실비와 갈루앵의 불륜의 정체는 과연 무엇인가?... 


 샬의 소설 기법을 들추어내면서 페이크 뉴스와 음모론이 활개 치는 인터넷 시대에 객관적인 진실은 어떻게 가려낼 수 있나 하는 의문을 품어본다. 그럴듯한 사실적 효과로 구축하는 소설의 사건과 현실 세계의 사건은 분명 다른데…


 아무튼 아주 드문 경우지만 이 책은 한번 책을 읽기 시작하면 중간에 그만 둘 수가 없다. 또 이렇게 뛰어난 작품이 널리 읽히지 않는다는 것은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적게는 서너 권 많게는 열 권 이상을 번갈아가며 책을 읽는 내가 다른 모든 책을 뒤로 미루고 [유명한 프랑스 여인들]만 읽는 희한한 경험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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