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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샤 pacha Mar 15. 2022

[데카메론]에서 가장 뛰어난 세 이야기

    사제와 벨콜로레 이야기


 이레째는 부인이 불륜 중에 뜻하지 않은 장애물이 생겨도 재치를 발휘하여 남편을 감쪽같이 속이면서 이웃의 젊은 청년과 욕망을 충족시키고 남편의 질투심이나 의심에서도 벗어나는 이야기들이다. 여드레째는 부인이 남편을, 남편이 부인을 아니면 사람들끼리 서로 속이는 갖은 술수의 이야기가 배치된다.


 여드레째 두 번째 이야기는 재담을 통해 상대를 속여 넘기는 술수를 잘 보여준다. 피렌체 부근 바를룽고라는 동네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농부 벤티베냐의 부인 벨콜로레와 그 마을 사제간의 대화에서 대화술로 상대편을 제압하는 묘미를 느낄 수 있다. 서로 속고 속이는 줄다리기 묘수를 보는 듯하다. 사물을 통한 에로틱한 환유 역시 기깔나다. 그뿐 아니다. 이들의 대화 속에 당시 사회상이 고스란히 엿비친다.


 호시탐탐 벨콜로레를 노리던 사제는 나귀에 잔뜩 짐을 싣고 재판에 계류되어 변호사의 도움을 청하러 피렌체로 가는 남편 벤티베냐를 길에서 마주친다. 어수룩하게 법률 용어를 끌어다 대는 말투에서 벤티베냐의 신분이 그대로 드러난다. 남편이 없는 틈을 놓칠세라 사제는 바로 벨콜로레를 찾아간다. 사제의 끈질긴 육체적 서비스 요구에 벨콜로레는 사제들은 모두가 "악마보다 더 구두쇠"라고 비아냥대면서 대가를 요구한다. 사제가 "구두 한 켤레 아니면 모자 하나 그도 아니면 편물 모직 숄이나 또는 원하는 다른 것"을 제시한다. 

벨콜로레는 이렇게 대꾸한다. 


 "다음 토요일에 제가 자은 양털실을 갖다주고 물레도 고칠 겸 피렌체로 갈 일이 있어요. 신부님께서 5리라를 빌려주시면, 그 정도는 갖고 계신 줄 알고 있는데, 고리대금업자한테 맡긴 청록색 긴 드레스와 지참금으로 가져온 축제날 차는 허리띠를 되찾을 수 있을 거예요. (…) 그러면 신부님 원하시는 걸 언제라도 해드릴게요". 


 사제가 당장은 없고 다음 토요일까지 해주겠다고 하자, 그녀는 "신부들은 약속만 하고 지키지는 않는다면서 지금 가진 게 없으면 찾아오시라."라고 다그친다. 

 이러자 사제는 "지금 돈 가지러 집으로 가게 하지 마시오. 아무도 없는 지금이 황금 같은 기회인데 내가 되돌아왔을 때는 누군가가 방해할 수도 있어요". 

 그러자 상대는 "좋아요. 찾으러 가시던지 아니면 그냥 참으시지요". 보증 없이 순순히 넘어가지 않을 듯하자 사제는 "나중에 돈 가져오는 걸 믿지 않으니 그러면 당신한테 이 푸른색 망토를 담보로 두고 가겠소." 

 이에 벨콜로레는 그 망토 얼마 어치 나가요하고 묻자, 사제는 그게 유명한 플랑드르 산 푸른색 나사 제품인데 얼마를 깎아서 7리라 주고 구입했다고 너스레를 떤다. 그제서야 그녀는 일단 망토를 접수하고 아무도 오지 않는 곳간으로 신부를 데리고 간다.


 육체적 쾌락을 실컷 즐기고 성당으로 되돌아온 사제는 일 년 치 양초 봉헌물을 다 끌어모아도 2,5리라도 되지 않는데 거래를 잘못했다고 판단하고 망토 맡긴 것을 후회한다. 그래서 한 푼 들이지 않고 망토를 되찾을 궁리를 하기 시작한다. 그 이튿날 사제는 성가대 소년을 그 집으로 보내 손님 초대로 소스를 빻아야 할 일이 생겼다며 돌로 된 유발을 빌려오도록 심부름시킨다. 점심때가 되어 벤티베냐와 벨콜로레가 식사하는 것을 확인하고 사제는 소년을 다시 불러 유발을 돌려주라고 하면서 이렇게 시킨다. 

 "신부님이 대단히 고맙다고 전하시면서 (아이가) 담보로 맡긴 망토를 돌려달라고 하십니다". 

 벨콜로레가 뭐라고 토를 달려고 하자 남편이 "어떻게 신부님한테 담보를 요구해? (…) 당장 돌려줘 (…) 만일 신부님이 뭘 원하시면 (…) 절대 아니라고 하면 안 돼."하고 심하게 꾸짖는다.


 망토를 소년한테 돌려주면서 벨콜로레는 이렇게 전해라고 한다. 

 "이번에는 과분하게 그렇게 했다고 치더라도 맹세컨대 다시는 신부님께서 내 유발에다 소스를 빻을 수 없을 거라고".

 남편은 부인의 말에서 숨어 있는 성적인 은유를 알아채지 못한다.

 망토를 돌려받고 사제는 연신 웃음을 지으면서 소년한테 이렇게 말했다. 

 "언제 벨콜로레를 보게 되면 이렇게 전하거라. 그네가 유발을 빌려주지 않으면 나도 더 이상 절구공이를 빌려주지 않겠노라고. 그러니 서로 피장파장이라고."

 한 동안 벨콜로레는 사제와 사이가 틀어졌다가 가을철에 화해하여 두 사람은 "그 이후로 수차례 함께 진수성찬을 먹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여성 청중들은 웃고 또 웃는다.



    왕따 당한 칼란드리노


 [데카메론]에 전부 네 번[1]이나 등장하는 순진한 화가 칼란드리노 이야기는 남의 말에 쉽게 속아 넘어가는 인물을 이용해 동료들이 놀리면서 즐거워하는 짓궂은 장난을 소재로 다룬다. 이미 중세 시절부터 친구들 사이에 왕따가 유행했다! 단순하고 호기심 어린 칼란드리노의 두 동료 부팔마코와 브루노[2]는 쾌활하면서도  빈틈없고 교묘하다. 


 여드레째 세 번째 이야기는 동료 화가 둘이서 순진한 동료를 왕따시켜 고통스러울 지경이 되도록 골탕 먹이는 이야기로 웃기다 못해 가학적이다. 칼란드리노는 귀가 얇아 엉뚱하고 터무니없는 이야기를 곧이곧대로 쉽게 믿는 위인이다. 그 결과 우롱하다는 뜻의 "칼란드리노로 만들다."라는 속담까지 생긴다.

 

 신비의 검은 돌을 가지고 있으면 아무한테도 보이지 않게 된다는 낙천적이고 능수능란한 델 사조[3]의 말을 철석같이 믿은 칼란드리노는 횡재할 거라고 생각한다. "하루 종일 달팽이처럼 엉성하게 벽을 칠하지" 않고도 그 돌을 손에 넣기만 하면 대번에 부자가 될 수 있다고 두 동료한테 자신 있게 말한다. 이 말을 들은 두 동료는 웃지 않을 수 없다. 그렇지만 깜짝 놀라는 척하면서 동료의 계획이 훌륭하다고 치켜세운다.


 희망에 들떠 칼란드리노는 두 동료와 함께 인적 드문 일요일 아침 그 돌이 난다는 피렌체 성밖 무뇨네 개울로 간다. 점심때가 가까워지자 브루노와 부팔마코는 동료가 영험한 검은 돌을 잔뜩 끌어모은 것을 보며 바로 곁에 두고도 칼란드리노가 보이지 않는다고 의뭉스럽게 말한다. 그런 효험을 가진 신비의 돌이 없는데 우리를 두고 혼자 점심 먹으러 갔다고 하면서 그한테 속았다고 말한다. 이 말을 들은 칼란드리노는 진짜 자신이 보이지 않는다고 믿는다. 둘은 조약돌을 던져 동료의 발뒤꿈치와 옆구리를 맞히면서 즐거워한다. 칼란드리노는 돌에 맞아 아파도 소리를 지르지 못한다. 둘은 계속해서 칼란드리노를 따라가며 괴롭히고는 산갈로 검문소가 나오자 자신들이 모은 돌을 버린다. 이미 보초와 짜고서 칼란드리노를 검문없이 그냥 통과시키도록 한다. 장난이 잘 먹혀들어간 것이 칼란드리노가 개울을 출발하여 검문소를 지나고 시내로 들어와 자기 집으로 갈 때까지 아무도 말을 거는 사람이 없었다. 하기는 점심시간이어서 마주치는 사람도 거의 없기도 했다. 


 집에 도착해서 그의 부인이 남들은 점심을 다 먹은 시간에서야 들어오느냐고 지청구를 늘어놓자 가져온 돌을 부려놓기가 무섭게 부인한테로 달려든다. 머리채를 잡아 발 아래 때려눕히고는 주먹질과 발길질로 만신창이로 만든다[4]. 먼발치에서 뒤따라온 동료 둘이 집에 들어와 어떻게 된 거나고 물었을 때 그는 쓸모없이 무겁도록 들고 온 돌과 마누라를 패대기친 홧김과 행운을 놓쳤다는 슬픔에 짓눌려 말문조차 잃는다. 부팔마코는 칼란드리노를 위로하기는커녕 신비의 돌을 찾으러 두 동료를 데려갔다가 개울가에 내버려 둔 채 "우리는 물론 신과 악마한테도 아무 말없이" 혼자 집으로 되돌아왔다고 불평한다. 오히려 칼란드리노가 둘을 속였다고 우긴다.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칼란드리노는 지금까지 돌의 효험이 진짜라고 믿게 만든 일련의 사건들을 되짚어간다. 개울에서 출발하여 집에 도착할 때까지 아무도 자기를 알아보지 못했는데 맨 처음 자신을 알아본 재수 없는 부인한테 화풀이했다고 털어놓는다. 동료의 이야기를 들은 두 사람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맞장구를 치고 웃고 싶어 죽을 지경이 된다. "피렌체에서 최고 행운아인 줄 알았는데 가장 불행한 인간"이 된 게 마치 제 부인 탓인 양 다시금 그녀한테로 달려들려고 하자 이번에는 두 사람이 가로막으며 이렇게 말한다. "당신 부인은 아무 죄도 없고 오늘 당신한테 나타나지 말도록 미리 조심시키지 않은 (…) 당신이 잘못이오. 신께서 당신한테 그런 조심을 시키지 않은 것은 이런 행운이 당신한테 일어나면 안 되기 때문이거나 (…) 당신이 동료들을 속일 작정을 했기 때문이라네."하고 끝까지 공격을 한다.


 "있는 말 없는 말 다 끌어대어 어렵사리 애꿎은 부인과 칼란드리노를 화해시키고 돌 수북이 쌓인 집에 침울해진 동료를 남겨 두고서 두 사람은 떠났다."로 이야기를 맺는다.



    자신을 골탕 먹인 미녀 과부를 복수한 대학생 이야기


 가학적인 이야기로는 단연 여드레째 일곱 번째 이야기를 꼽을 수 있다. 또한 [데카메론] 전체를 통해 가장 긴 이야기이다. 한국의 단편소설 분량의 두 배 이상 되어서 중편소설에 해당한다. 이 이야기는 대화를  통한 공격과 대꾸가 줄다리기를 하면서 사건이 전개된다. 반전이 일어나면서 뒤바뀐 두 남녀 주인공의 처지가 전반부와 후반부가 교묘하게 짝을 이룬다. 고문자와 피고문자의 역할이 바뀌면서 이미 당한 치욕에 일일이 상응하는 복수가 뒤따른다. 말을 통한 놀림과 비꼼의 쾌감과 이에 따르는 수모와 봉변의 고통을 드러내는 심리묘사가 단연 돋보인다. 직접 이 이야기를 읽지 않은 독자를 위해 사건 전개를 자세하게 요약해보겠다.


 파리에서 사물의 이치나 원리를 오랫동안 공부하고 피렌체로 되돌아온 귀족 출신의 대학생이 빼어난 몸매에 고귀한 집안 출신으로 젠체하는 유복한 젊은 과부한테 한눈에 반해 열렬히 사모한다. 그런데 이 과부는 이미 자신보다 젊은 미남 청년과 정을 나누고 있다. 철학도는 과부의 하녀를 통해 자신의 사랑을 과부한테 고백한다. 과부의 반응이 긍정적으로 나오자 대학생은 편지를 쓰고 선물 공세를 퍼붓는다. 대신 과부는 받기만 할 뿐 아무 대응도 않는다. 그러다가 과부가 인기를 뽐내려고 자신의 정부한테 이 사연을 털어놓는다. 정부가 과부한테 질투심을 내비치자 과부는 오해를 풀 각본을 당장 행동에 옮긴다. 과부는 지금까지 철학도한테 다정하게 대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며 선심 쓰는 척 하녀를 통해 밀회의 약속을 전달한다.


 크리스마스 이튿날 밤 대학생은 과부의 집으로 초대받는다. 철학도는 꿈에 부풀어 약속 장소에 도착하지만 눈 내리는 추운 겨울날 눈 덮인 뜰에서 마냥 기다려야 한다. 그날 저녁 과부는 동시에 자신의 정부를 초대하여 만찬을 즐기면서 철학도한테 어떻게 대할지 자신의 계획을 알려준다. 손님을 한참 기다리게 한 다음 하녀가 주인마님의 분부대로 뜰로 나가 이렇게 알린다. 저녁 먹으러 온 과부의 동생이 빨리 자리를 떠지 않아서 당신을 당장 집안으로 들어오게 할 수 없다. 동생이 가면 곧장 마님께서 맞이하러 나올 것이다. 이렇게 전달하고 하녀는 바로 잠들어버린다. 창문 틈을 통해 이 장면을 보고 들으며 과부와 정부는 마냥 기꺼워한다. 그리고 그들은 침실로 가서 육체적 쾌락을 실컷 즐긴다. 

 이윽고 자정이 가까워진다. 철학도가 기다리는 안뜰에는 편히 앉을 자리나 추위를 피할 데가 없다. 과부와 정부는 다시 창문을 통해 대학생이 어떻게 하나 내다보며 즐거워한다. 그는 눈밭 위에서 추위를 견디다 못해 이를 덜덜 떨며 춤추듯 쉴 새 없이 빠르게 마당을 맴돈다. 또다시 한참 지나 과부는 아래층으로 내려가 출입문 틈으로 대학생을 부른다. 추워 죽겠다며 문 열어달라는 대학생한테 아직 동생이 떠나지 않았다며 잠시 후에 떠나게 할 거라는 헛된 약속을 한다. 대학생은 세찬 눈발과 살을 에는 추위를 피해 몸을 덥히게 실내로 들어가 기다리게 해달라고 애원을 한다. 이에 과부는 "편지마다 사랑으로 온몸이 불타오른다고 한 게 사실이라면 날 놀리는 거 아니냐."며 좀 더 기다리라며 잔인하게 거절한다. 

 마침내 철학도는 과부가 자신을 속였다는 것을 깨닫는다. 지금까지 품었던 사랑이 한순간에 증오심으로 바뀌어 복수의 칼을 간다. 누가 대문을 열어주지 않는 한 빠져나갈 방도도 없어 철학도는 추위로 온 몸이 얼어트진 상태로 지옥같이 긴 밤을 버텨내어야 한다. 

 여명이 밝아 오자 마님의 지시대로 하녀가 애처로운 표정으로 문을 열어주면서 순전히 망할 놈의 손님 때문에 일을 그러쳤다고 둘러대며 다른 기회가 반드시 올 거라고 말한다. 마음을 가라앉힌 대학생은 원망 대신 차분한 어조로 마님의 잘못도 아니니 "다음 기회"를 기다리마고 대꾸하고 고분고분 물러난다.


 동상에서 어렵사리 회복한 철학도는 원한을 품은 채 계속해서 과부한테 사랑에 빠진 것처럼 행세한다. 시간이 흘러 7월 중순 사정이 뒤바뀐다. 과부의 정부가 딴 여자 만나 과부를 떠난 것이다. 상심에 빠진 주인을 위로할 셈으로 하녀는 해박한 철학도를 강신술의 대가라고 생각하고 마법을 써서 변심한 정부의 마음을 돌려보자고 제안한다. 그다지 지혜롭지 못한 과부는 제 꾀에 제가 넘어간다. 한때 맹목적인 사랑에 빠진 철학도를 "파리에서 배워온 분별력을 잃었다."라고 비아냥댄 과부는 하녀의 제안에 귀가 솔깃해진다. 철학도가 강신술사라면 왜 자신을 위해 마법을 쓰지 않았겠는가. 처지가 바뀐 과부는 철학도가 마법을 부려준다면 원하는 것은 뭐든지 다 들어주겠다고 약속한다. 대학생은 하녀를 통해 과부를 버린 정부의 마음을 당장 되돌려주겠노라고 장담한다. 단 과부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만나 직접 말하겠다고 전한다.

 

 단둘이 과부를 만난 대학생은 이렇게 말한다. 파리 유학 시절에 배워서 강신술에 정통해 있지만 신을 모독하는 행위라 절대 써본 적이 없는데 당신을 향한 사랑으로 악마의 소굴로 빠질 위험을 무릅쓰고 해 주겠다. 변심한 연인의 마음을 돌리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라 반드시 당사자가 직접 조작을 해야 한다. 이 마법을 완수하려면 단호한 결단력으로 밤에 외딴곳에서 홀로 실행해야 한다. 떠난 정부가 되돌아온다면 뭐든 못하겠느냐며 과부는 방법만 알려주면 과감하게 임할 거라고 대답한다. 


 "달이 이지러지고 난 초 저녁 내가 제작해준 정부 이름의 은종이 초상을 들고 맑은 강물에 들어가 일곱 번 목욕재계하고 나온 다음 계속 나체로 외딴곳에 있는 나무 위나 집 위로 올라가 북쪽을 향해 초상을 들고 내가 쓰주는 주문을 일곱 번 외면 얼마 지나지 않아 선녀처럼 아름다운 아가씨 둘이 나타나 원하는 게 뭐냐고 물으면 명확하게 대답해야 한다. (…) 소원을 다 듣고 나서 여인 둘이 사라지면 내려와 옷을 입고 집으로 돌아가라. 이튿날 자정이 되기 전에 변심한 정부가 되돌아와 눈물을 흘리며 뉘우치면서 용서해달라고 빌고 다시는 다른 여자를 찾아 당신을 버리지 않을 것이다."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 된 과부는 돌팔이 점쟁이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따른다. 과부는 실행할 장소는 자신의 영지가 있는 아르노강 외딴 계곡이고 강가에서 멀지 않은 곳에 버려진 작은 탑이 있는데 사다리를 타고 그곳에 올라갈 거라고 말한다. 철학도는 엉성하게 초상을 그리고 제멋대로 휘갈긴 터무니없는 주문을 쓴 다음 적당한 날을 잡아 전달하면서 다음 날 저녁 바로 실행에 옮기라고 말한다.

 

 그날 저녁 철학도는 하인을 동반하여 버려진 탑 가까운 데 몸을 숨기고 일이 계획대로 진행되나 관찰한다. 과부가 목욕재계를 마치고 탑을 향해 자기 앞을 지날 때 과부의 알몸을 본 철학도는 한순간 동정심과 함께 욕정이 치솟아 거기에 넘어갈 뻔한다. 하지만 자신이 당한 치욕을 떠올리며 동정심과 육체적 욕망을 불타는 복수심으로 억누른다. 과부가 사다리를 타고 탑 위에 올라가 북쪽을 향해 주문 외는 것을 듣고 철학도는 은밀히 탑 쪽으로 접근하여 사다리를 치워버린다. 

 의식을 완수한 과부는 탑 꼭대기에서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을 선녀 같은 여자 둘을 목이 빠져라 기다린다. 여명이 밝아올 무렵 과부도 마침내 대학생이 복수하는 것을 알아차린다. 해가 돋기 전에 탑을 내려가려고 사다리 걸쳐둔 쪽으로 가지만 사다리는 온데간데없다. 그 순간 정신을 잃고 쓰러진다. 정신을 차리고 엉엉 울면서 자신이 경솔했음을 깨닫는다. 내려갈 방법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다시 울기 시작한다. 나체로 탑 위에 버려진 자신의 처지를 떠올리며 잘못 사랑한 정부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잘 간직해온 고귀한 명예도 다 잃어버렸다고 한탄한다. 이런 생각에 미치자 하마터면 탑 아래로 뛰어내릴 뻔한다. 

 아침 해가 이미 밝아 있다. 혹 도움 청할 목동이라도 없나 해서 사방을 둘러본다. 그때 덤불 속에서 잠들었다 깨어난 대학생이 과부를 발견하고 과부도 대학생과 눈을 마주친다. 철학도는 점잖게 인사를 건네고 아가씨 둘이 왔었냐고 능청스럽게 묻는다. 

 이때부터 고문하는 사람과 고문받는 사람 사이에 합일점을 찾을 수 없는 대화의 줄다리기가 시작된다. 이 줄다리기식 대화는 사정이 바뀐 두 사람의 처지를 극명하게 드러낸다. 앙갚음을 하는 한쪽은 복수의 쾌감을 느끼며 훈계를 하고 다른 한쪽은 끊임없는 읍소로써 상대의 동정을 사려 든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면서 옷을 돌려받고 탑에서 내려올 수 있게 눈물과 순종적인 목소리로써 유도하는 과부의 설득은 호소력이 대단하다. 한편 가슴 한 구석에 동정심을 내비치면서도 과부의 설득에 넘어가지 않고 과부의 잘못을 낱낱이 지적하며 인생철학을 가르치는 대학생의 답변 또한 차면서도 이지적이다. 철학도는 자신의 전공을 살려 글로 써서 명예에 목숨 거는 과부한테 복수할 수도 있다고 으른다. 이 장면에서 저자는 철학도의 목소리를 빌어 경륜과 경험을 갖춘 중년 남자가 혈기왕성한 청년에 비해 여성을 사귈 때 장점이 많다고 역설한다.


 과부는 대학생이 새로 만난 애인한테 사랑받는 것을 들먹이며 벗어둔 옷을 갖다 달라고 부탁하자 대학생은 그러마고 대꾸한다. 옷을 가져오기는커녕 하인을 보초 세워 두고 그는 근처 친구 집으로 가서 느긋하게 점심을 먹고 낮잠에 빠져든다. 그 사이 밤을 꼬박 지새운 과부도 지쳐 잠에 곯아떨어진다. 

 어느덧 정오가 가까워진다. 과부는 여름이기는 해도 벌거벗은 채 하룻밤을 떨고 난 뒤 이제는 뜨거운 햇살에 살이 익어 갈라 터지고 타기 시작한다. 화상 때문에 따가워서 잠을 깬다. 작열하는 열기로 한 곳에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 대학생이 추위로 그랬듯이 과부는 열기를 피하려고 이리저리 끊임없이 옮겨 다닌다. 게다가 바람 한 점 없으니 파리와 등에가 떼 지어 몰려들어 물어뜯고 쏜다. 시간이 지나면서 배고픔에다 목마름까지 더해져 고통이 극에 이른다. 구조 요청할 누군가 없나 둘러보아야 아무도 없고 매미 소리만 들려오는데 눈앞에 보이는 강물은 갈증만 더해준다. 머리 위에는 이글대는 태양, 발 밑에는 뜨겁게 달구어진 바닥, 옆구리에는 쉴 새 없이 달려드는 파리와 등에 떼... 

 캄캄한 밤을 빛내던 백옥 같던 피부는 벌겋게 변하고 피칠갑이 되어 그 몰골이 차마 눈 뜨고 볼 수가 없다. 이제 과부는 아무 희망도 없이 절망에 휩싸여 죽음만 기다린다. 대학생은 오후 한 시 반이 되어서야 낮잠에서 깨어나 탑 쪽으로 되돌아온다. 과부는 철학도한테 자살할 용기는 없으니 차라리 고통을 덜기 위해 죽여달라고 한다. 그도 아니면 물 한 모금이라도 달라고 애원한다. 대학생은 죽여줄 마음이 없으니 자살하라고 냉정하게 대꾸한다. 아무 동정심도 얻어내지 못하자 과부도 이제는 악에 받쳐 상대의 잔임함에 원망과 저주를 퍼붓기 시작한다. 참고 죽음을 기다리겠노라고 말한다. 

 이윽고 저녁 기도 시간이 된다. 대학생은 벌을 줄 만큼 주었다고 여기고 과부의 옷을 거두어 하녀한테 갖다 주면서 자초지종을 알려준다. 길 잃은 돼지를 찾으러 다니다 탑 쪽으로 온 농부와 함께 하녀가 과부를 구조한다. 그런데 하녀는 사다리를 타고 내려오다 발을 헛디뎌 굴러 떨어지면서 넓적다리가 부러진다. 농부가 집으로 가서 두 동생과 부인을 불러 넷이서 두 부상자를 과부의 집으로 옮긴다. 


 정신을 차린 과부는 사건의 진실이 밝혀질까 두려워 악마의 저주로 하녀와 자신이 봉변을 당했다고 꾸며 대어 주변 사람들한테 믿게 만든다. 화상에서 나은 다음부터 과부는 더 이상 남자들을 조롱하지도 사랑하지도 않는다. 하녀가 다리를 부러뜨렸다는 소문을 들은 철학도는 완벽한 복수라고 판단하고 그것으로 만족해하면서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는다. 


 대학생을 골려 먹으려다 된통 당한 잘난 체 하는 과부의 이야기는 양지가 음지 되고 음지가 양지된다는 격언을 떠올리게 한다. 또 다른 교훈이라면 파리에서 오랫동안 유학한 철학도를 속이다가는 큰코다친다!


***

 위에 소개한 세 이야기를 포함 여드레째 이야기들은 [데카메론]의 이야기들 중 짜임새 있는 구성이며 극적인 사건의 전개가 단연 뛰어나다. 자신을 속인 상대편을 더 교묘한 술수를 동원해 능갈치는 대화술을 통해 상대편을 반격하여 더 심하게 속여 넘기는 이야기들에서 갈등을 고조시키는 섬세한 심리묘사 또한 돋보인다.



[1] 여드레째 세 번째와 여섯 번째, 아흐레째 세 번째와 다섯 번째 이야기이다.

[2] 부팔마코(Buonamico Buffalmacco)와 브루노(Bruno di Giovanni)는 실존 화가이다. 특히 부팔마코는 화가보다 시인이 되지 못한 것을 아쉬워한 인물로 [데카메론]에 묘사된 것처럼 익살과 재담으로 유명했다. 이들의 또 다른 동료 화가 넬로(Nello di Dino)도 칼란드리노를 속여먹는 공모자다. 실제 부팔마코는 재능 있는 화가로 피사의 캄포산토에 그린 [죽음의 승리]가 그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3] 터무니없는 이야기를 밥먹듯이 꾸며대는 델 사조(Maso del Saggio)는 이미 칼란드리노의 한 동료한테 자신이 하려는 장난의 술수를 귀띔해 놓은 상태다. 그는 자신이 끌어다 대는 이야기를 사실처럼 믿게 하려고 "웃지 않고 태연하게" 말한다.

[4] 동료 셋을 비롯 그들 넷이 작업하는 부잣집의 아들과 그 여자 친구가 서로 짜고 칼란드리노가 사랑에 빠진 부잣집 아들의 여자 친구와 헛간에서 정사 장면을 연기하는 시점에 현장을 덮친 칼란드리노 부인은 남편의 얼굴을 할퀴고 머리털을 뽑고 말로 망신을 주면서 지난번 자신이 당한 만큼 복수를 한다. (아흐레째 다섯 번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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