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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샤 pacha Mar 17. 2022

[데카메론]을 다시 읽자

중세판 인간 희극

 [데카메론] 읽는데 거의 세 달 이상을 꼬박 보낸 것 같다. 세 달 내내 이 책 한 권만 붙들고 읽지 않았지만 다 읽는데 시간이 오래 걸린 것은 분명하다. 엄청난 분량도 분량이거니와 약 칠백 년 전에 나온 고전이라 심심풀이로 후다닥 읽어 치울 가벼운 소설책이 아니었다.


 열 명의 젊은이들이 모여 열흘에 걸쳐 백 편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데카메론]은 정말 다양한 주제와 수많은 이야기 기법이 들어 있는 멋진 책이었다. 저자 자신이 말한 대로 질박한 연애담이나 신기한 모험담은 슬픔을 떨쳐주기도 하고 슬기로운 재치를 통해 어려움을 헤쳐나가는 이야기에서 인생을 살아가는 지혜도 얻을 수 있었다. 특히 본능에 충실하여 육체적인 사랑을 즐기는 이야기에서 쾌락주의자 보카치오의 인생관도 엿볼 수 있었다. 이상적인 여인을 얻기 위해 중세의 기사가 벌이는 영웅적인 모험담과 귀부인을 향한 이상적이고 관념적인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 보통 사람이 갖은 술수를 다 동원해서라도 성적 욕망을 채우는 육체적이며 관능적인 이야기가 놀랍도록 진솔하다.


 사실 내가 필요한 부분은 페스트와 관련된 첫째 날의 «머리말» 뿐이었다. 보카치오가 밝힌 대로 이 부분을 읽을 때 아주 고통스러웠다. 내용이 끔찍해서가 아니라 중세적인 표현법을 읽어내기가 힘들어서였다. 하는 수 없이 읽고 또 읽을 수밖에 없었다. 작가 자신이 젊은 여성 독자를 겨냥해서 고통스러운 도입부를 읽다가 책을 덮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나는 다른 이유에서 이 부분을 제대로 읽는데 엄청나게 골머리를 앓았다. «머리말»을 읽고 난 뒤 지쳐빠진 나머지 한 동안 [데카메론]을 잡지 않았다. 역시 저자가 말한 대로 어려움을 겪고 본 이야기를 읽기 시작하자 언제 그랬느냐 싶게 술술은 아니지만 그런대로 잘 넘어갔다.



    인공 낙원의 격리 생활


 온 도시가 무덤으로 변해버린 피렌체에서 아름답고 현명하며 우아하고 예의 바른 귀족 출신의 열여덟(엘리사)에서 스물여덟(팜피네아)의 아가씨 일곱과 스물다섯이 막내인 기품 있고 매력적인 청년 셋이 폐허에서 피어나는 꽃처럼 등장한다. 여건이 되는 피렌체 시민들은 이미 다 페스트를 피해 떠났듯이 열 명의 젊은이들은 "올바르게" 살아남기 위해 한 동아리가 되어 시체만 득실거리고 무절제와 문란함이 판치는 도시를 마지막으로 떠난다. 도피행을 제안하는 팜피네아한테 피렌체의 상황을 들어 보자.


 보이느니 시체들이오 들리느니 죽음 소식뿐이다. 미사 드리거나 장례 주관할 사제도 다 죽은지라 정말 찾아보기 힘들다. 유배형 당한 범죄자들이 되돌아와 무법천지로 날뛰고 또 그들은 장의 일꾼으로 떼 지어 다니면서 노략질을 일삼는다. 그들을 통제할 당국자들은 다 죽었거나 죽기 직전이기 때문이다. "집에 들어가 여러 채 건물 가운데 본채에 이르면 하녀 한 명만 달랑 보일 뿐이라 겁이 나서 머리카락이 곤두선다. 집안 어디를 가든 어디에 있든 늘 보던 모습과 영 딴판인 죽은 이들의 그림자를 보는 느낌이다." 속세인들이 욕망이 끌리는 대로 밤낮 할 것 없이 도락에 빠져 있듯이 수도사들마저도 문란하게 육체적인 쾌락에 몸을 내맡긴다.


 그들의 피신처는 피렌체에서 3킬로쯤 떨어진 산등성이 외딴곳(피렌체 북동쪽의 피에솔레라고 본다.)이다. 갖가지 관목의 녹음으로 뒤덮인 산꼭대기에 전원 저택이 있다. 저택 가운데는 널찍하고 아름다운 안뜰이 자리잡고 저택 안에는 회랑과 식당 그리고 거실과 방이 있다. 저택 주변에는 작은 풀밭과 멋진 정원이 둘러치고 신선한 물이 나오는 우물도 있다. 수요일에 거기에 도착하여 나흘을 보내고 일요일에 그곳에서 2천 보 가량 떨어진 서쪽으로 옮겨간다. 그러니까 사흘째 이야기부터는 옮긴 장소에서 이어진다.

워터하우스(John William Waterhouse), 데카메론의 한 장면(1916), 리버풀, Lady Lever Art Gallery

 이곳 역시 언덕 비탈에 세워진 멋진 저택이며 거기서는 평원이 내려다 보인다. 특히 첫 번째 저택에 비해 두 번째는 벽으로 둘러친 닫힌 정원이 환상적으로 아름답다. 포도 덩굴 뒤덮인 오솔길이 곳곳에 있다. 포도 꽃 향기가 다른 나무 향내와 어우러져 오리엔트의 모든 향을 내뿜는다. 재스민과 장미꽃이 오솔길 가를 둘러 피어 있다. 그늘이 짙게 드리워져 햇빛을 받지 않고 오솔길을 거닐 수 있다. 정원 가운데는 온갖 꽃으로 어우러진 풀밭이 있고 오렌지와 레몬이 생울타리를 치면서 그늘과 함께 향기도 선사한다. 풀밭 한복판에 멋진 부조의 대리석 분수가 있다. 수반 기둥에 얹힌 인물상이 내뿜는 물이 하늘로 치솟았다가 풍성히 떨어진다. 모두가 인공낙원이라고 생각한다. 스무 남은 종류의 새들이 앞다투어 지저귄다. 집토끼며 산토끼, 노루, 사슴을 비롯 백 가지 가까운 순한 짐승들이 즐겁게 뛰논다.

 다들 멋진 공간에 황홀해한 나머지 점심 식사 전까지 춤추고 노래하며 맘껏 즐긴다. 식사 후에도 이들은 더욱더 즐거워져 춤추고 노래하다가 더위가 몰려오면서 누구는 낮잠 자러 가고 누구는 소설을 읽고 또 누구는 체스 놀이를 즐긴다. 정해진 때(태양이 가장 높이 떠 있을 때)가 되자 분수대 옆 잔디 위에 둘러앉아 사흘째 이야기할 순간을 기다린다. 그리고 디오네오가 왕이 된 이레째는 장소를 특별히 여인들의 골짜기로 옮겨 보낸다. 저택에서 1,6킬로 떨어진 곳으로 산봉우리 여섯 개가 둘러친 평평한 초원이다. 바위를 타고 맑은 계곡물이 떨어지는 작은 호수가 있는 비밀의 골짜기이다. 해가 쨍쨍한 오후 그들은 낮잠을 즐긴 다음 나무 그늘 아래 호숫가 풀밭에 모여 앉아 한담을 즐긴다.


 그들은 매일 즐거운 하루 생활을 주관하고 통제할 그날의 좌장(여왕이나 왕이라고 부른다.)을 선출한다. 이상 사회의 수장은 돌아가며 맡아서 모든 사람이 다 한 번씩 여왕이나 왕이 된다. 하루는 전날 더위가 한풀 꺾이고 해가 설핏해지는 때 그러니까 그날의 이야기가 끝난 시점부터 다음날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이다. 하루가 끝나면 좌장은 영광의 월계관을 다음 타자한테 씌워준다. 그들은 외부와 단절된 보호 지역(외부의 나쁜 소식은 알리지 못하게 되어 있다.)에서 이성의 범위 안에서 질서와 절도를 지키면서 여러 가지 쾌락을 추구한다.

 죽음의 공포를 이겨내는 데는 역시 즐거움을 만끽하는 게 최고의 묘약인가? 페트라르카의 친구 피렌체의 의사 톰마소 델 가르보의 페스트 처방전은 이렇다.


 "이 경우 최선책이라면 즐겁게 처신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선 죽음을 떠올리지 말고… 재미있고 즐거운 생각만 하고… 몸이 지치지 않을 만큼 노래를 부르고 이야기를 하는 방법이다".


 이 열 명의 젊은이들도 성당에 들어가 열심히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를 들으며 웃고 즐기면서 고통을 이겨낸다.

1492년 판에 들어간 삽화

 그들은 하인들로부터 좋은 포도주에 훌륭한 음식과 정결한 잠자리를 제공받으면서 정원의 나무 그늘 아래 모여 체스나 주사위 놀이도 하고 악기 연주에 맞춰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함께 산책도 즐긴다. 오후 시간에 모여 한 사람씩 돌아가면서 좌장이 정해준 주제에 따라 하거나 때로는 자유로운 주제(첫째 날과 아흐레 날)로 하루에 한 편씩 이야기를 한다. 예외 없는 규칙은 없다고 유일하게 재기 넘치고 유쾌한 청년 디오네오만 정해진 주제와 상관없이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한다. 도착하는 날부터 디오네오는 "슬픔을 뒤로하고 품위에 걸맞게 나와 함께 웃고 노래하며 즐겁게 생활하지 않을 테면 피렌체로 되돌아간다."라고 으름장을 놓더니 이야기 주제가 정해진 둘째 날부터 자신은 정해진 주제가 아니라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마지막 차례에 하도록 허락받는다. 한마디로 디오네오는 류트나 백파이프 연주를 도맡고 흥을 돋우는 분위기 잡이 역할을 한다. 자신의 역할에 걸맞게 배꼽 잡게 웃기고 유쾌한 이야기를 독점적으로 들려준다.


 예의 바름과 품위 그리고 정직함을 최고의 가치로 내세우는 이들의 이상 사회는 2주 간 지속된다. 금요일(기도를 올리며 경건하게 보낸다.)과 토요일(머리를 감고 몸을 정결하게 하며 단식을 한다.)은 정신 건강을 위해 쾌락을 삼간다. 그래서 열흘 동안 돌아가면서 각자 열 편의 이야기를 한다[1]. 바로 첫째 날 여왕으로 뽑힌 팜피네아의 제안이었다. 뜨거운 열기를 내뿜는 오후에 경쟁심을 부추기는 체스 같은 놀이로만 시간을 보낼 게 아니라 한 사람이 이야기를 들려주면 나머지 사람들 모두가 아주 즐거울 것이다! 좋소! 만장일치로 통과.


 아침에 일어나서 오전 중에는 각자 하고 싶은 소일거리로 시간을 보낸다. 그날의 이야기가 막이 내리면 이야기 내용에 대해 토론도 벌이고 저녁 식사가 올 때까지 자유롭게 자신이 원하는 유희를 즐긴다. 저녁 식사가 끝나면 늘 류트와 비올라 반주에 맞추어 감상적인 연애 시를 노래하고 춤을 곁들여 하루를 마감한다. 마치 궁정 파티를 떠올리게 한다.



    중세판 인간 희극


 [데카메론]에 등장하는 인물은 이상화된 영웅적인 주인공이 아니라 당대 사회의 기층민이다. 귀족적인 세련미는 없이 눈앞의 이익만 추구하는 상인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피렌체를 중심으로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며 프랑스와 부르고뉴, 플랑드르 지방, 영국의 도시와 지중해 연안의 항구를 오가는 상인의 인생관이며 취향, 생활상이 생생하게 펼쳐진다. 나아가 지중해를 무대로 펼쳐지는 상인의 이야기는 해적질이며 우발적인 사건의 연속인 모험소설이 되기도 한다.


 아버지가 상인이어서 자신도 한 동안 상업에 몸담은 보카치오는 특히 중세 말 떠오르는 사회 계층 상인들을 통해 그들의 풍습이며 그들의 언어를 통해 당시 사회를 사실적으로 묘사해낸다. 당대 사회[2]를 구성하는 평민들을 "있는 그대로" 현실감 있게 그려낸 데 바로 [데카메론]의 새로움이 있다. 예를 들어 보카치오는 상인의 음흉한 술수나 파렴치한 행각을 숨김없이 드러낸다. 여드레째 열 번째 이야기에서 시칠리아 여인이 미인계와 교묘한 술수로 엮어 피렌체 상인을 속여 넘겨 500플로린을 갈취하는 한편, 피렌체 상인은 더 교묘한 술책을 동원하여 500플로린도 받아내고 시칠리아 사기꾼한테 1000플로린을 우려내어 도망친다. 상인뿐 아니다. 의사, 공증인, 제빵사, 요리사, 정원사, 대학생, 농부, 석공, 도둑, 사제, 수도사, 수녀, 하녀, 화가 등의 일상생활을 생생하게 그들만의 어투로 표현해낸다. 때로는 우스꽝스럽고 때로는 적나라한 외설적인 어조로 인물들의 성격을 생생하게 그려낸다. 한마디로 [데카메론]은 중세판 인간 희극이다.


 엘리사가 여왕인 엿새째 이야기가 시작되기 전 시중꾼들 사이에 한바탕 소란이 일어난다. 남자 하인이 리치스카한테 유치하게 초야의 부부 성행위를 설명하다가 호되게 당하는 일화이다. 하녀 리치스카의 말투에서 그 계층이 바로 드러난다. 열 명의 귀족들과는 완전히 다른 언어이다. 그녀는 상대방을 "바보 미련퉁이", "꺽다리 얼간이"라고 야멸차게 쏘아붙이면서 "내가 모르는 줄 알고 저 바보는 시코판테가 첫날밤에 (…) 강제로 검은 숲 속으로 처박아서 피가 쏟아진다고 우겼는데 그게 아니고 아주 부드럽게 뚫고 들어갔다고 봐야 한다니까요 (…). 내 주변 여자 중 처녀로 시집간 년 하나도 없고 결혼한 여편네들도 있는 꾀 없는 꾀 다 부려 남편을 속여먹는 걸 다 아는데 저 꺽다리 얼간이가 내가 갓난앤 줄 알고 여자들이 어떻다는 둥 꿍꿍이 수작을 부린다니깐요!"


 보카치오는 [데카메론]에서 평민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식자층 언어 라틴어[3]가 아닌 "피렌체의 통속어로 그리고 산문으로 제목 없이 가장 소박하고 간결한 문체로" 작품을 썼다.


 루터의 종교개혁이 나오기 백오십 년 전 보카치오는 벌써 반카톨릭적 생각을 펼친다. 미신이나 성유물을 조롱하고 수도사들을 신랄하게 비난하는데 핵심이 놓이는 게 아니라 구원에 목매달지 않고 자연과 운명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본능에 충실한 육체적 욕구의 자유를 외친다. 그가 추구하는 사랑은 이상적인 사랑이 아니고 관능적인 사랑이다. 적지 않은 어려움을 헤쳐 나간 다음 육체적 욕구를 실컷 누리는 남녀 이야기를 마치면서 화자들은 놀랍도록 솔직하게 "우리 또한 그렇게 누리게 되기를!"하고 끝맺는다 (사흘째 여섯 번째와 일곱 번째 이야기, 이레째 아홉 번째 이야기).


 보카치오는 이야기의 장단을 고려하고 주제를 대칭적으로 번갈아 가며 배치하여 독자들을 지루하지 않도록 배려한다. 불행하게 끝나는 사랑 이야기(나흘째)[4]에 이어 행복하게 끝나는 사랑 이야기(닷새째)가 나온다. 첫째 날이 악덕을 비난하는 주제라면 마지막 날은 미덕을 칭송하는 이야기로 마감한다. 긴 이야기와 짧은 이야기가 뒤섞이고 슬픈 내용에 이어 즐거운 이야기를 배치한다. 갖은 역경을 다 겪은 뒤 행복해지는 이야기들(이틀째)은 대부분 길이가 길다. 반면 짧고 기민한 재담을 주제로 한 엿새째 이야기는 마지막 디오네오의 이야기를 빼면 아주 짧은 이야기들이다. 심각함과 가벼움, 웃음과 눈물을 균형 있게 집어넣는다. 이야기의 분위기도 서서히 고조되게 이야기들을 배치한다. 남녀 간의 애정사도 불륜 현장범이 되는 급박한 시점에 초점을 맞춘다. 이런 상황에 놓인 주인공이 정부와 함께 재치 있고 간교한 술수로 상대방을 속여 궁지를 용하게 벗어난다. 남녀 간의 애정사보다 사건의 극적인 전개에 더 무게가 주어진다.

 

 [데카메론]에서 이야기를 듣고 난 뒤 청중들은 내용에 따라 여러 가지 반응을 보인다. 지난 이야기에 대한 결론도 내리고 촌평도 하고 넘어간다. 이야기의 대화 상대자는 늘 귀부인들이다. 셋째 날 이야기 중 가장 긴 일곱 번째 에밀리아의 이야기가 끝났을 때 "이야기에 언급된 사건의 양이나 다양성에 비추어 길이 때문에 싫어하기는커녕 모두가 짤막하게 말했다고 느꼈다."는 언급을 한다. 화자 자신이 하게 될 이야기의 주제에 대해 미리 언급하고 이야기를 시작하기도 한다. 넷째 날 첫 번째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피아메타는 "며칠간 맛본 환희를 완화시킬 양으로" 정해준 주제에 맞추어 눈물을 흘리지 않고서는 들을 수 없는 감동적인 불운한 이야기를 시작한다고 말문을 연다.

 어떤 경우 바로 앞에 들은 이야기에서 자신이 할 이야기를 끌어내게 되었다고 밝히기도 한다. 바로 보카치오 자신의 수법으로 그는 이미 나와 있는 이야기를 바탕으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란 없으니까 작가들은 이미 나와 있는 모델을 바탕으로 새것을 창조한다.

 이야기를 듣는 여인들은 숨김없는 노골적인 성행위 묘사에 얼굴을 붉히고 비통하고 안타까운 사연에 울기도 한다. 우스꽝스러운 이야기를 듣고 입이 찢어지도록 웃기도 하고 애절하고 비장한 이야기 내용에 자신의 감정을 이입시켜 한숨을 내쉬기도 한다. 지혜롭게 어려움을 헤쳐나간 인물들의 행위를 칭찬하기도 하고 야비하고 비열한 인물에 대해 비난도 아끼지 않는다.

 닷새째 정해진 주제와 상관없이 마지막에 이야기하는 디오네오는 "어떤 면에서 사랑에 빠진 여인한테는 어울리지 않을 이야기이지만 즐거울 수 있겠다고 판단해서 그래도 이야기한다."라고 양해를 구하기도 한다. 이레째 왕인 디오네오가 주제로서 사랑을 얻기 위해서나 아니면 안전을 위해 부인이 남편을 속이는 온갖 술수를 내걸었을 때 여인들로부터 적지 않은 항의에 부딪히기도 한다. 이 경우만 디오네오는 자신이 강요한 주제에 맞게 이야기를 마감한다.


 [데카메론]이 음탕하고 외설적인 이야기로만 가득 차 있다고 생각하면 잘못이다. 가능한 한 모든 수단을 총동원해 육체적 욕구를 채우는 이야기가 다는 아니고 재기와 지혜로써 자신의 운명을 개척해 나가는 사례도 많다. 게다가 애정 이야기도 반 이상은 애절하고 비극적인 상황에 빠지는 이야기이다. 신중하고 품위 있는 여주인공이 순수한 사랑에 이르지 못해 고통스러워하거나 함정이나 난국에 빠진 주인공이 재치나 정중함, 관대함과 용맹함으로 위험에서 벗어나가는 이야기도 많다. 엿새째 이야기는 달콤하거나 구슬픈 남녀 간의 애정사보다는 재치 있고 교묘한 대화술로 위기를 모면하는 일화를 다룬다. 이미 사흘째 이야기의 주제가 능수능란한 술수로 잃어버린 재산을 되찾는 내용이었다.

 보카치오는 "상황에 걸맞게 짧지만 재빠르게 대꾸하는 대화술"을 아주 높이 평가한다. 말하는 사람이 익살이나 농담, 해학이나 조롱 등의 수사를 동원하여 생대방 희생자가 알아차리지 못하게 속이면서 즐거워한다. 엿새째 모든 이야기와 첫째 날 대부분 이야기는 재치 있고 유쾌한 말로써 상황에 꼭 맞게 즉각적으로 대꾸하는 기지를 발휘하여 피해나 위험 또는 치욕에서 벗어난다.


[1] 열 명의 인물들이 하는 이야기는 전체 백 편이다. 그런데 작가 자신이 나흘째 이야기에 앞서는 "머리말"에서 미완성인 이야기 한 편을 끼워 넣는다. 그러니까 [데카메론]은 101편의 이야기로 구성된다고 볼 수도 있다.

[2] 시대적 배경이 훨씬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서 메소포타미아나 이집트를 배경으로 하는 이야기들이 더러 나오지만 그래도 대부분은 중세 말이고 피렌체와 그 주변 도시가 무대이다.

[3] 최초의 [데카메론] 프랑스어 완역판(1414)은 라틴어 번역판을 프랑스어로 다시 번역한 것이었다.

[4] 나흘째 불행하게 끝나는 사랑 이야기가 주제인데 마지막으로 디오네오는 슬픔을 덜어 내려고 닷새째 주제를 미리 적용시켜 유쾌한 이야기를 꺼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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