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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샤 pacha Feb 25. 2022

이웃사촌 독일과 프랑스

    독일과 프랑스의 관계


 프랑스의 텔레비전에서 국가 대항 축구 중계할 때 아나운서가 이웃나라를 가리키는 멘트를 듣다 보면 참 묘하다. 라인강 저편의 독일은 이웃나라라고 하고 벨기에 스위스 이탈리아는 우리 친구라고 부른다. 이탈리아 앞에는 로마 시절부터 부르던 "알프스 저편"이라는 수식어를 붙인다. 스위스는 그들의 옛 부족 이름을 따서 우리 헬베티아 친구라고 부른다. 물론 벨기에도 옛 부족 이름에서 따온 나라 이름이다. 독일과 프랑스도 예외는 아니다. 3세기 중엽부터 몇 부족이 동맹을 이루어 거의 동시에 골(Gaule : 종족이라기보다 언어 공동체)을 쳐들어왔던 프랑크(Francs, 이들이 사는 지역은 Francia)족과 알라만(Alamans : 모든 사람들이라는 뜻)족에서 비롯된다. 그래서 프랑스 사람들은 독일을 알르마뉴(Allemagne : 라틴어로는 Alamania)라고 부른다. 그런데 프랑스 대표팀이 독일 대표팀과 경기할 때면 숨길 수 없는 묘한 경쟁의식이 묻어난다. 프랑스와 독일은 우리와 일본과의 관계와 비슷한가. 아주 거슬러 올라가면 3세기 중반에 시작되어 특히 5세기 중반 사나운 훈족한테 밀린 중유럽의 게르만족들이 로마제국을 위협하며 라인강을 넘고 서쪽으로 이동하여 "장발족" 골(셀트족)과 "난폭하고 호전적인" 게르만이 섞였으니 독일과 프랑스는 이웃사촌이 아닐 수 없다.


 5세기 중엽 라인강 하류 서쪽지방에서 남쪽으로 내려와서 파리를 수도로 삼고 기독교로 개종한 게르만 프랑크의 왕 클로비스(481-511)가 세운 프랑크 왕국이 프랑스 최초의 왕국이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프랑크족에서 프랑스라는 이름이 비롯된다. 중세 말부터 파리를 중심으로 한 주변지역을 일드프랑스(île de France : 프랑스의 섬이라는 뜻)라고 불러왔다. 


 수도를 파리에서 북동쪽 엑스라샤펠(Aix-la-Chapelle, 오늘날 독일의 아아헨 Aachen)로 옮긴 샤를마뉴 대제(768-814)는 오늘날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북부를 포함하는 유럽 대륙을 통치한다. 샤를마뉴는 도량형을 통일시키고 화폐 개혁을 한다. 은화로 주조된 리브르(livre), 수(sou), 드니에(denier)라는 단위는 오랫동안 프랑스 화폐 단위로 자리 잡는다. 샤를마뉴는 교계와 속계가 공동으로 참여하는 서열화된 기독교 조직과 나란히 서열화된 행정조직을 전 국토에 적용시킨다. 황제-영주-농민의 위계질서로 황제는 영주한테 봉토를 나눠주고 영주는 황제한테 주로 군사적 의무를 다할 충성을 서약하고, 다시 영주는 농민한테 토지를 나눠주고 농민은 영주한테 군사와 농업 생산의 의무를 다할 것을 맹세하는 주종 관계의 봉건제를 더욱 공고히 한다. 샤를마뉴는 해마다 대귀족, 영주, 자유인으로 구성된 전체회의를 열고 공동으로 정한 법령을 공포한다. 법조계의 원칙이 유지되지만 이 법령이 모든 분야에 적용된다. 전 국토에 걸쳐 똑같은 기독교 조직과 행정체계가 적용된다 치더라도 중앙 집권식 통치는 아니고 황제를 중심으로 각 지방 제후들이 연방을 결성한 형태이다. 그래서 기독교와 봉건제를 바탕으로 한 샤를마뉴의 제국은 유럽연합의 원조라고도 볼 수 있다. 


 어리석은 질문이지만 그렇다면 샤를마뉴는 프랑스 사람인가 독일 사람인가? 샤를마뉴라고 불러야 하나, 칼이라고 불러야 하나? 오늘날 같은 국가 개념이 없었기 때문에 둘 다 가능하지 않을까. 왕국을 분리할 수 없도록 규정했지만 샤를마뉴의 세 손자들 사이에 권력 투쟁이 일어난다. 두 동생이 맏이 로테르를 상대로 동맹을 맺는 스트라스부르의 서약(842) 때 상대편 병사들이 알아듣도록 독일 쪽 통치자인 루이는 "로망어"로 프랑스 쪽 통치자 샤를은 "튜튼어"로 맹세를 한다. 로망어가 오늘날 프랑스어의 선조이고 튜튼 어가 독일어의 조상이다. 843년 베르댕 조약 때 프랑크 제국은 서프랑크(프랑스) 동프랑크(독일) 중 프랑크(북해에서 롬바르디아까지)의 세 왕국으로 나누어진다. 이때부터 프랑스와 독일의 역사가 갈라진다. 베르댕 조약은 유럽 최초의 조약이자 프랑스와 독일의 출생증명서이다.


라인강과 알프스 산맥, 피레네 산맥이라는 자연지리적 경계를 국경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한 루이 14세가 라인강변의 독일 지역을 초토화시킨다. 그 결과 라인강변에 17세기 이전의 옛날 유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경우가 드물다. 하이델베르그 성의 허물어진 성벽을 보라. 바로 루이 14세 군대 대포의 흔적이다. 로마제국의 재현을 꿈꾼 나폴레옹은 독일 지역을 통째로 손아귀에 넣었다. 1870년 보불전쟁 때 독일의 모태가 된 프로이센이 프랑스를 쳐들어와서 파리를 점령한다. 그리고 독일은 1차 대전과 2차 대전 때 프랑스를 침략한다. 특히 2차 대전 때 프랑스는 4년간 독일한테 점령된다. 이렇게 독일과 프랑스는 역사적으로 떼려야 뗄 수 없는 아주 복잡한 관계다.


 독일은 전통적인 연방제 국가이고 프랑스는 전통적인 중앙집권 국가이다. 프랑스 사람 가운데 독일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다. 제르마노필(germanophile)이라 부른다. 프랑스 중고등학교에서 우수한 학생들은 제2외국어로 독일어를 선택하는 전통이 있다. 꿈의 세계를 작품화(Aurélia)한 프랑스 낭만주의 작가 네르발(Gérard de Nerval : 1808-1855)은 스트라스부르를 거쳐 독일로 가면서 "북구의 요정" 로렐라이가 손짓하며 유혹하는 라인강 저편에 "독일이 있다! 괴테와 쉴러의 땅이요, 호프만의 고향인 옛 독일은 우리 모두의 어머니이다!… 튜토니아." (Lorely) 라고 칭송한다. 


 독일은 프랑스에 훨씬 앞선 1770-1790년에 걸쳐 "질풍노도 Strum und Drang"로 표방되는 낭만주의의 꽃을 피운 나라이다. 형식과 원칙에 철저한 고전주의 전통이 워낙 뿌리 깊은 프랑스는 1830년 위고의 희곡 [에르나니 Hernani] 공연의 성공으로 마침내 낭만주의가 자리 잡는다. 


 원조 제르마노필이라면 나폴레옹이 위험한 자유의 화신이라고 여긴 마담 드 스탈(Madame de Staël)이다. 또한 그녀는 샤토브리앙(Chateaubriand)과 함께 전기 낭만주의의 쌍두마차이며 조르주 상드(George Sand)에 앞선 원조 페미니스트이기도 하다. 그녀는 레싱, 괴테, 쉴러, 쉴레겔 형제 등 독일의 낭만주의 작가들을 소개하면서 그때까지 프랑스에서는 뒤떨어진 나라라고 여겼던 독일을 "감상적이고 순수한" 나라라고 치켜세우는 [독일론 De l’Allemange]을 썼다. 결과는 나폴레옹의 미움을 사서 1810년 9월 책은 출판되자마자 소각되고 작가는 주네브 근처 코페(Coppet) 성으로 유배길에 오른다. 이후 코페성은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의 전위적인 지식인들의 아지트가 된다. 콩스탕(Constant), 본스테텐(Bonstetten), 시스몬디(Sismondi), 쉴레겔(August Schlegel)… 특히 마담 드 스탈은 콩스탕과 헤어진 뒤 새 연인이 되는 쉴레겔을 세 자녀의 가정교사이자 자신의 스승으로 베를린으로부터 모셔온다. 그렇다면 이들이 모였을 때 의사소통은 과연 무슨 말로 했을까? 두말할 나위가 없다… 분명 셰익스피어의 언어는 아니다. 몰리에르의 언어 말고 다른 방도가 있었을까.



    빅토로 위고가 생각한 유럽 연합


시인 극작가 소설가로 널리 알려진 위고는 중세 문화유적 보존위원으로 활약을 많이 한 인물이기도 하다. 특히 1831년 발표한 [파리의 노트르담]이라는 소설은 19세기 후반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을 복원하는데 일등공신 역할을 한다. 그렇게 공들여 복원한 고딕 성당은 2019년 4월 15일 지붕을 떠받치던 8백 년 된 1300개의 참나무 들보 도리 서까래는 잿더미로 남아 지붕 입힐 날을 기다리며 하늘만 쳐다보고 있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 1830년 7월 혁명, 1871년 파리코뮌, 두 차례의 세계대전도 잘 버텼는데… 하지만 노트르담 대성당 앞마당에 유럽연합을 꿈꾼 샤를마뉴 대제의 동상은 화재를 무사히 비껴갔다.


 위고는 프랑스 북동부, 라인강변 지역과 스위스 쪽을 여행하고 [라인강 Le Rhin](1841)이라는 여행기를 남긴다. 그는 부인한테 혼자 여행한다고 분명히 밝히지만 실제로는 영원한 뮤즈인 쥘리에트(Juliette Drouet)와 늘 함께 여행한다. 또 1838, 1839, 1840년 각기 세 차례에 걸친 여행을 39통의 편지 형식으로 이어진 하나의 여행으로 묶고 마지막에 긴 결론을 붙인다. 여행지의 전설이나 유적 그리고 역사에 치중하는 "과거에 대한 몽상"적인 이야기로 채워지는 편지와 달리 « 결론 »에서 위고는 유럽 건설을 위한 역사적 지정학적 분석을 한다. 위고는 근본적으로 계몽주의적인 생각을 가지고 유럽 문명 중심에 기독교 중심의 이데올로기를 가진 인물이다. 인류가 필요에 따라 이동해서 서로 섞여 사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인데 위고는 유럽 대륙에 이민족이 들어오는 것을 아주 경계하였다. 위고에 따르면 국가는 같은 땅에서 생각을 공유하고 같은 언어를 쓰며 살아가는 공동체이다. 그런데 아주 오래된 과거의 사실이나 인물을 평가할 때 오늘의 시각으로만 옳다 그르다 하는 오류를 범해서는 안된다. 어쨌든 위고는 오늘날 유럽연합의 밑그림을 구체적으로 그려본 인물임에는 틀림없다.

  

 위고의 결론을 따라가 보자. 신성로마제국 시절 독일은 마치 유럽을 반영하듯 유럽 심장부를 차지한다. 17세기 중반 독일 제국은 98개의 국가가 황제의 발아래 층층이 모여있는데 유럽의 모든 정치형태가 다 나타난다. 꼭대기에 대공국인 오스트리아와 왕국인 보헤미아 같은 세습 주권국, 선출제이거나 종신제인 주권국가들 그리고 공화국인 70개의 자유도시들이 있다. 세기를 거듭하면서 이런 국가들은 아주 여러 개로 교묘하게 합쳐지기도 하고 잘라지기도 하면서 마침내 "한 조각의 금은 세공품 같은" 대륙을 형성하였다. 반면 "알프스 저편"의 이탈리아는 신성로마제국보다 덜 짜인 나라였다. 독일보다 더 작고 덜 강력한 이탈리아는 태양 덕분에 경계심이 많고 수선스럽고 활동적이다. 이탈리아의 도시국가들은 이해관계가 뒤얽혀 서로 끊지도 풀지도 못한다. 그래서 하나가 전체를 상대로 전체가 하나를 상대로 끊임없이 경쟁을 하고 음모를 꾸민다.

 

 위고는 17세기 중반 25개 국가로 나누어졌던 유럽의 정치 지형을 살핀 다음 당시 2대 초강국이던 터키와 에스파냐가 유럽에 위협 국가라고 본다. 터키는 무력을 동원하여 전쟁으로 정복하는 국가의 전형이고, 에스파냐는 무력에다 상업과 책략으로 정복하는 나라이다. 터키 제국의 경우 술탄이 정치, 군사, 종교 세 분야 모두 손아귀에 거머쥐고 밀실 독재정치를 하기 때문에 왕궁 안에서는 고관들 사이에 끊임없는 음모가 꾸며지고 민초들은 계속해서 봉기를 일으킨다. 또 무력으로 정복한 나라들의 통치에서 폭력적인 압제가 너무 지나치다. 또한 이슬람교는 지성과 성찰이 부족해서 운명론과 맹신으로 흐른다. 에스파냐 제국은 왕, 성직자, 귀족이 모든 부를 차지해서 가진 게 아무것도 없는 비참한 하층민들은 조직적인 도독질을 하기에 이른다. 당시 에스파냐로 갈 때면 도둑한테 줄 돈주머니를 따로 준비했을 정도이다! 신대륙의 정복지 통치자들은 너무 가혹하고 탐욕스럽다. 종교재판에서 관용이 전혀 없다. 해상무역에 바탕을 둔 본국과 식민지 사이에 결속력이 약해 제국은 산산조각이 난다. 결국 두 강대국은 지배층의 골 깊은 이기주의에다 폭력적이고 부도덕한 정치로 말미암아 국가로서 통일감을 찾지 못하고 터키는 추락하고 거기에 돈에 눈먼 타락한 상업주의가 합쳐진 에스파냐가 강대국의 지위에서 밀려난다.

 

 위고는 19세기 중반의 유럽 정치 지형을 17세기와 비교 분석한다. 17세기 12개이던 왕국은 19세기에 17개로 늘어났고, 5개이던 선출 군주국은 하나로 줄어들었다. 그리고 8개의 공화국은 하나로 줄었다. 그런데 독일 연방은 17세기 때와 마찬가지로 유럽의 축소판을 보여준다.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가 독립적인 막강한 세습 왕국이고, 또 17세기 때 6개의 주요 연방 주권국(바바리아, 부르템베르크, 삭스, 하노버, 헤세, 바덴)은 앞의 네 대공국이 왕국으로 뒤의 영주국과 총독국이 대공국으로 바뀌었다. 17세기 70개였던 자유 도시는 4개(프랑크푸르트, 함부르크, 루벡, 브레멘)로 줄어들었다. 반면 프랑스는 절대왕정에서 시민 군주제가 되었다. 독일 연방에서 오스트리아는 구체제 왕국을 대표하고, 신생 프로이센은 독일의 미래를 보여주는 새로운 군주국이다. 한편 프랑스는 과거와 미래를 동시에 담고 있는 왕정이다. 그래서 프랑스가 과거 현재 미래를 잇는 교차점이 된다.


 2세기 지나 19세기 중반 유럽이 경계해야 할 두 강대국은 러시아와 영국이다. 쇠약해진 유럽을 떠받칠 수 있는 나라는 독일과 프랑스밖에 없다. "반쯤 쓰러지고 여기저기 깊은 구멍이 숭숭 뚫려버린 늙은 유럽에서 과연 누구가 살아남았나?" 바로 독일과 프랑스이다. "독일이 유럽의 가슴이라면 프랑스는 유럽의 머리"이다. 감정과 사고를 가진 국가, 다시 말해 문명 국가이다. 형성 과정이 똑같은 독일과 프랑스는 유럽 토양에 깊이 뿌리박은 대륙 국가로서 침략 민족들과 섞일 수가 없다. 독일은 유럽에서 북쪽과 동쪽을 차지하고 프랑스는 남쪽과 서쪽을 차지해서 두 나라는 유럽 대륙의 두 핵심을 이룬다. 샤를마뉴 대제가 삭슨족과 노르만족에 대항해 제국을 만든 것이 어렴풋하게 그린 유럽인데 언젠가는 그렇게 될 것이다. 실제 위고는 여정 중에 엑스라샤펠에 있는 샤를마뉴의 무덤을 방문한다(아홉 번째 편지 : 엑스라샤펠-샤를마뉴의 무덤). 루이 14세가 라인강 남쪽으로 프랑스, 에스파냐, 이탈리아를 포함하는 가족 중심의 큰 국가를 형성하기는 했지만 제국치고는 작은 규모였다. 나폴레옹이 발트해에서 라인강을 거쳐 지중해에 이르는 광대한 제국을 만들어 가족과 측근을 중심으로 통치했지만 잠시였다. 19세기 중반 현재 프랑스는 독일과 힘을 합쳐 상업국가인 영국과 맞서야 하고 독일은 프랑스에 기대어 정복 국가인 러시아와 맞서야 한다. 독일과 프랑스의 연합은 영국과 러시아에 제동을 걸어 유럽 평화의 주춧돌이 될 것이다.


 19세기 두 강대국의 위협을 막아내려면 프랑스와 독일의 모태가 된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유럽을 만들어야 한다. 그런데 영국과 러시아는 1815년 빈 회의에서 프랑스를 무력화시키고 프랑스와 프로이센의 경쟁관계를 끌어내기 위해 라인강 이쪽 지방을 포로이센한테 넘겨주었다. 그리고 영국은 독일의 하노버를 차지했다. 유럽 대륙의 평화를 이룩하려면 독일과 프랑스가 진정한 우호 관계를 맺고 같은 목표를 향해 협력해야 한다. 그런데 라인강 이쪽 프랑스 지역을 프로이센이 차지하면서 반감이 생겨났다. 우선 두 나라 사이에 반감을 없애는 게 중요하다. 그러려면 영국은 하노버를 프로이센한테 돌려주고, 프로이센은 지리 역사적으로 프랑스 땅인 "신이 내려준 라인강 좌안"을 프랑스에 돌려주고 동반자로서 프랑스와 힘을 합쳐야 한다. 영국은 유럽 대륙을 넘보지 말고 해상무역에 치중하고, 러시아는 유럽 쪽으로 영토확장을 멈추고 기독교의 횃불을 들고 덜 깨우친 아시아 쪽으로 힘을 쏟아야 한다. 나아가 "인류를 교육시키는 것이 바로 유럽의 임무이다".


 지속적인 평화를 구축하는 데는 두 매체가 필요하다. 교역과 의사소통의 두 가지 수단인 기차와 프랑스어이다. "기차는 빠른 속도를 통해, 프랑스어는 명확성과 (…) 프랑스 문학의 우월성을 통해 세력을 떨치고 있다".

 

 위고는 과거의 성찰을 통해 현재를 진단하고 미래를 예견한다. 그는 오래전부터 유럽 대륙의 터줏대감인 독일과 프랑스 주도로 유럽을 만들어야 한다고 하면서 영국과 러시아를 배제시킨다. 현재 영국이 유럽연합을 탈퇴하는 것을 보면 위고의 예견이 들어맞는가? 이런저런 이유를 내세워 터키가 유럽연합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것도 위고의 생각과 비슷한 맥락인가. 한편 프랑스어가 유럽의 지배적인 언어가 될 거라고 예상한 것과 달리 인터넷의 등장으로 영어의 지배는 확고부동해졌다.

  

1950년 5월 9일 프랑스 외무장관 로베르 슈만이 유렵의 평화 유지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유럽 조직을 제안한다. 석탄과 철강을 공동 생산할 것을 독일과 다른 유럽의 나라들한테 제안한다. 2차 대전이 끝나고 5년 뒤 평화를 구축하기 위해 우선 경제협력을 통해 유럽이 뭉쳐야 한다는 이 선언이 오늘날 유럽연합의 출생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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