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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샤 pacha Feb 26. 2022

통금의 기원과 변천사

중세의 규칙에서 코로나 방역까지

    통금의 기원


 세계적인 방역 모범국가인 한국이 철저한 검사와 추적 그리고 검역과 격리를 통해 코로나와 힘겨운 투쟁을 벌이는 반면, 21세기 서유럽에서 코로나 시대에 가장 각광받는 최고의 방역은 통금과 감금이다. 통행금지의 기원은 멀리 중세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통행금지(프랑스어로 couvre-feu, 영어로 curfew)는 군사적인 목적과 평화적인 목적 둘 다 있다. 


 14세기에서 18세기에 이르기까지 해가 지고 뜰 때까지 통금은 서유럽 도시에서는 일반화된 규칙이었다. 야간에 거리 조명이 널리 퍼지기 전에는 해가 지면 성당이나 수도원에서 종을 울려 청동제 뚜껑으로 벽난로를 덮게 하였다. 집 안을 덥히는 유일한 수단이 벽난로인데 온기를 유지하려고 밤 동안 서서히 타도록 놓아두었다가 나무로 지은 집이 많던 시절 화재가 자주 일어났다. 이런 위험을 줄이기 위해 종소리와 함께 벽난로는 물론 등불과 촛불도 끄게 하였다. 처음 couvre-feu라는 말은 통행금지보다는 글자 그대로 모든 "불을 덮는다(끈다)"는 뜻이었다. 소등과 통금을 알리는 저녁 종소리는 낮(일하는 시간)과 밤(쉬는 시간)을 뚜렷이 구분하는 역할도 하였다. 이 종소리와 함께 일손을 멈추고 집으로 들어가 잠자리에 들어야 한다는 뜻이다.

 

 전쟁 때 통행금지는 반란을 막기 위한 치안유지 수단으로 이용되었다. 영국(Grande Bretagne, Great Britain)을 정복한 윌리엄 공(프랑스식으로는 노르망디 공작 정복자 기욤)이 1068년 반란을 잠재울 목적으로 앵글로색슨인들한테 통행금지를 실시하였다. 정복자 기욤은 노르망디 지역에서도 치안을 위해 통금을 실시하였다. 그 결과 저녁 8시 이후(계절에 따라 차이가 난다.)에는 어떤 이동이나 불빛도 허용하지 않았다. 오늘날도 프랑스에서는 열 개가량의 코뮌(프랑스의 최소 행정 단위)에서 이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예를 들어 노르망디의 퐁 오드메르에는 매일 밤 열 시가 되면 통금 종을 울린다.


 마찬가지로 페스트 같은 대규모 전염병이 돌 때 이동을 막고 사람들이 모이지 못하도록 방역을 위해 통금을 실시하였다. 통금을 실시하면 집안에 틀어박혀 지내야 하기 때문에 사실상 감금(confinement, lockdown)이 된다. 감금은 범죄인을 체포하여 감옥에 억류시키는 행위를 내포하는 말이라 어감이 그리 좋지 않다. 감금 조치가 실시된 지 일 년이 지나면서 감금 조치보다 어감이 완화된 제한 조치라는 용어를 많이 쓴다. 어쨌거나 통금과 감금은 전염병에 대한 치료가 아니라 행정적인 조치로 이동을 제한하여 전염병 전파를 억제하는데 주목적이 있다. 


 페스트 환자가 발생하면 대문에 붉은 십자가를 칠하고 집 앞에 보초를 세워 자신의 집에 감금시키거나 격리 전문병원으로 옮겨 감금시켰다. 12-13세기에 걸쳐 유럽에 많이 퍼졌던 나병환자들을 따로 격리시킨 나병원이나 유태인 집단 거주지역으로 만든 게토 역시 일종의 감금이다. 코로나 위기 중 외국에서 한국으로 입국하는 사람한테 강제하는 2주간 격리도 일종의 감금 조치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유럽에서는 통금을 통해 주로 야간에 적용하던 감금이 코로나와 함께 전 국민을 상대로 주간에도 실시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감금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 평화적 목적도 군사적 목적도 아닌 보건 위기에 대처하기 위한 변종 감금인가?



    옛 파리의 통금


 예컨대 15세기 어떤 겨울 파리의 평범한 밤 풍경을 떠올려보자. 


 "해가 떨어지면 성당과 수도원에서 저녁 기도 종소리가 울려 퍼진다. 오후 네 시에서 다섯 시 사이다. 사람들은 일손을 멈추고 집으로 돌아간다. 몇몇은 성 밖 술집에서 꾸물꾸물한다. 집 없는 거지들은 가까스로 점포 아래에 거처를 마련한다. 노트르담 성당에서 만도의 종소리가 울린다. 마지막으로 구멍가게들이 문 닫을 때다. 저녁 일곱 시. 통금시간으로 계절 따라 바뀐다. 대부분 사람들은 문을 꼭꼭 걸어 잠그고 집안에 틀어박힌다. 저녁 아홉 시를 알리는 소르본 대학의 큰 종이 울려도 몇몇 대학생은 (…) 늑장을 부리며 술에 취해 소란을 피우고 출입문이나 대문을 부수려 든다. 얼마 더 지나면 초롱을 든 하인 둘이 아픈 주인을 위해 외과의사를 찾아서 잰걸음으로 나아간다. 멀리 야경 궁수들이 이따금 지나간다."[1]


  예외적으로 하짓날 환희의 불놀이 축제 때처럼 통금이 없는 날이 있었다.


 그렇다면 야간 통제는 어떻게 이루어졌나. 18세기까지 통제 장치는 초보적이고 느슨하였다. 성문을 닫고 간선도로를 가로막는 체인을 설치하거나 창문에 쇠창살을 쳤다. 또 동업 조합에 노동 시간의 준수나 주점에 영업 시간의 제한을 지시하는 정도였다. 야경꾼들은 소등을 준수하는지 감시하고 거리를 순찰 돌며 통제를 하고 주정뱅이들을 내쫓는 임무를 맡았다. 어둠이 내리고 통금이 실시되면 거리를 이동하는 것이 완전히 금지된다고 생각하면 잘못이다. 대신 이동할 때는 충분한 사유가 필요하였다. 종부 성사를 위해 사제를 부르러 간다든지, 임박한 출산을 위해 산파를 찾으러 간다든지, 아니면 주인의 허락을 받고 노동 시간을 넘겨 밤늦게까지 일하는 등의 경우였다. 밤에 예외적으로 통행하는 사람들은 손에 초롱을 들고 소리를 질러 자신들이 이동한다는 사실을 알려야 했다. 초롱 없이 무기를 숨겨 이동하는 사람은 경계의 대상이었다. 주인의 가구를 몰래 빼들고 야반도주하는 가난한 세입자도 요주의 인물이었다. 당시 통금 조치는 적은 인력으로 야간 순찰에 대처하는 수단이기도 하였다. 동업 조합에서 야경은 의무였다. 중세 말 인구 이십 만이던 파리는 왕가 소속의 보병 순경 40명에 기마 순경 20명뿐이었다. 게다가 이 야경꾼들은 그다지 소용이 없었다. 이들은 순찰을 도는 대신 걸핏하면 잠들어버리거나 카드놀이나 하고 또 불한당들한테 매수되기 일쑤였으니...


          

[1] Arnaud Exbalin, « Le couvre-feu permanent : une histoire longue du confinement nocturne », The Conversation, 14 janvier 2021.



    스토커 잡는 야경꾼


 범죄자를 잡는 방범대원 이야기는 [데카메론]에도 등장한다. 아흐레째 첫 번째 이야기에서 피스토이아의 미모에 우아한 과부가 끈질기게 추근대는 두 남자를 현명하게 따돌리는 이야기이다. 보카치오가 이야기에서 밝히고 있지는 않지만 묘하게 과부 집안은 교황을 옹호하는 겔프파이고, 정치적 이유로 피렌체에서 추방되어 이 도시로 온 두 남자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지지하는 기벨린파였다. 그런데 같은 여자를 사모하는 두 남자는 서로 모르는 사이다. 과부는 이 도시에서 험상궂고 무섭기로 소문난 스칸나디오라는 사람이 죽어 매장된 시체를 이용할 묘수를 찾아낸다. 스칸나디오는 귀족 출신이기는 해도 최악의 인물로 악명이 높았다. 살았을 때 그 생김새가 얼마나 기이하고 흉측했던지 한번 보기만 해도 누구라도 겁이 나서 덜덜 떨었다. 


 과부는 두 사람한테 하녀를 보내 이루어내지 못할 일을 시키기로 꾸민다. 한 사람은 밤이 이슥해지면 그날 아침 매장한 스칸나디오의 무덤에 들어가 시체의 수의를 벗겨 입고 시체 노릇을 맡고, 또 한 사람은 자정 무렵 무덤에 들어가 이 시체를 메고 과부의 집으로 무사히 오면 그들의 사랑을 받아주겠다. 그런데 두 사람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아무 소리도 내어서는 안 된다. 이 조건을 수락하면 좋고 그렇지 않으면 앞으로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말고 전갈이나 심부름꾼을 보내서도 안 된다. 


 두 사람 모두 "마님이 원한다면 무덤이 아니라 지옥에라도 들어가겠노라!"라고 호기롭게 답한다. 실은 자칫 잘못하다가 자신한테 닥칠지도 모로는 온갖 위험(예를 들어 시체가 된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과부 가족들한테 눈을 후벼 파이고 이를 뽑히고 손이 잘리는 고문을 당할 수도 있고, 다른 사람은 시체를 꺼내 어깨에 메고 가다 야경한테 들켜 마법사로 몰려 화형 당할지 모른다.)을 떠올리며 두 사람 다 겁에 질려 포기할까 하다가도 과부의 사랑을 얻을 수 있다는 희망에 용기를 얻어 무모하게 달려든다.


 어쨌거나 과부가 내건 조건대로 두 사람 다 충실하게 임무를 수행하기 시작한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를 만큼 어두운 밤길이 하도 깜깜해서 (시체를 멘 사람은) 길가를 따라 설치된 벤치에 시체를 이쪽저쪽 연신 부딪히게 하였다". 


 그런데 둘이 과부의 집 앞까지 도착했을 때 과부는 하녀와 함께 창가에서 정말 한 사람이 시킨 대로 시체를 메고 오는지 살피고 있었다. 바로 이 순간 추방자를 체포할 셈으로 이 거리에 잠복 중이던 시 소속 야경꾼들이 발자국 소리가 들리자 난데없이 초롱을 흔들며 방패와 창을 들고 나타난다. 방범대원한테 가장 중요한 장비는 불빛이다! 야경꾼을 보자마자 시체를 멘 사람은 시체를 떨군 채 달아나고 움직이기에 거추장스러운 수의를 걸친 사람도 얼른 몸을 일으켜 도망친다. 


 과부는 야경꾼이 흔드는 불빛으로 두 남자가 자신이 시킨 대로 임무를 수행하는 것을 확인한다. 이들의 무모함에 혀를 내두르면서도 과부는 시체를 내던지고 달아나는 모습을 목격하고는 한참 웃지 않을 수 없다. 한편 과부는 두 남자가 자신이 시킨 대로 하는 것으로 보아 자신을 끔찍하게 좋아한다는 사실도 확인한다. 시체를 멘 사람은 야경꾼이 물러간 뒤 중단된 임무를 완수하려고 문제의 현장으로 되돌아와 보아야 소용없다. 시체도 야경꾼을 피해 달아나버리고 없으니까. 


 이튿날 아침 스칸나디오의 묘지가 열려 있고 그 안에 시신이 없는 것을 발견한 온 피스토이아 사람들은 요란스레 떠들어댄다. 시체 노릇을 한 사람이 시신을 묘혈  깊숙이 처박아버린 줄도 모르고 심지어 바보들은 마귀들이 가져갔다고 믿는다. 두 남자는 각자 임무 완수는 못했어도 거의 시킨 대로 이행했다며 정상을 참작해서 사랑을 받아달라고 간청하지만 과부는 딱 잘라 거절한다[1]. 뜻하지 않게 출현한 야경꾼 덕분에 과부는 자신한테 단단히 반한 두 남자를 기막히게 따돌린다.


        

[1] 이야기를 들은 [데카메론]의 청중들은 과부의 교묘한 술수는 높이 사면서도 두 남자의 무모한 행위는 사랑이라기보다는 정신 나간 짓거리로 여긴다.



    야외 조명의 변천사


 오늘날 생각하면 별것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18세기 들어와 가로등이 설치되어 불 밝혀진 파리의 밤거리를 산책하는 것은 그야말로 놀라운 일이었다. 18-19세기에 걸쳐 점진적으로 확산된 거리 조명은 인간생활에서 야간 활동이라는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온다. 17세기 말에 파리와 런던에 가로등의 전신인 초롱이 처음 설치되었다. 18세기 초에는 암스테르담과 브뤼셀이, 1770년대에 주네브와 마드리드가, 1790년대에 멕시코 그리고 19세기 초 보스턴, 뉴욕, 뉴올리언즈에 가로등이 설치되었다.


 사실 프랑스에서 가로등 설치는 그 형태가 변하면서 오랜 시간에 걸쳐 진행되었다. 처음에 촛불이었다가 그다음 기름불 초롱으로 바뀌고, 1835년부터는 가스불 가로등이 되었다. 그리고 1880년 이후 전깃불 가로등이 본격적으로 설치되었다. 파리에는 1667년 루이 14세의 명으로 3천여 개의 초롱이 설치되었다.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는 1789년 파리에는 가로등이 7천 개 정도 있었다. 파리의 중심 지역에만 주로 설치되었다고 보면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다. 


 그렇지만 거리 조명을 두고 모든 사람들이 환영한 것은 아니었다. 아무 소용 없이 왜 거리를 불 밝히나? 오히려 밤에 범죄를 조장하는 게  아닌가? 이런 불평들이 쏟아져 나왔다. 가로등을 설치하고 연료를 공급하며 불을 켜고 끄는 일은 비용이 많이 들어서 자치 도시로서는 생필품에 대한 세금을 올리는 결과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공공 조명 시간과 공간이 점차 확대되면서 알게 모르게 밤 시간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일어난다. 전통적으로 밤은 캄캄한 어둠으로 두려움을 불러일으키고 늑대인간, 마법사, 귀신이 우글거리는 야만적이고 신비한 공간이며 모든 반대파가 몸을 숨기기에 좋은 시간이었다. 오랫동안 신학자와 귀신 학자한테는 밤은 악마적이고 법학자한테는 범죄적이었다. 밤에 가로등이 일반화되면서 낮 동안의 표준과 가치의 지표가 허물어졌다. 이리하여 밤은 비생산적인 자유와 불경스러운 쾌락을 부추기고 불법적인 폭력과 음모의 온상으로 여겨졌다.



    가로등과 밤 문화


 가스 가로등의 확산과 함께 통금이 서서히 사라지면서 19세기 초반 본격적으로 야행성 시대의 막이 오른다. 먼저 칠월 왕정(1830-1848) 때 소수의 엘리트들과 댄디들이 우아한 야간 생활을 칭송하면서 야행성이 유행한다. 극소수의 진정한 야행성 부류, 즉 사교계나 화류계 또는 보헤미안적인 생활을 즐기는 무리들이 무위를 주장하며 밤 생활을 즐긴다. 제2제정(1852-1870) 시절에 이르면 새로운 도시 정비와 가스 조명의 보급, 간선 상업 도로의 개발과 함께 야행성은 무도회나 가장무도회가 유행하면서 서민층한테까지 퍼져나간다. "파리의 잠은 반어법이다. 진정한 파리지앵은 잠을 자지 않는다. 자더라도 거의 자지 않는다!" 1867년에 나온 파리 여행 안내서가 파리 사람들의 특징을 이렇게 꼬집어 소개한다.


 심지어 인공조명의 확산에 힘입어 야만적이고 범죄적인 밤 시간을 끝장낼 양으로 밤을 정복하고 나아가 밤을 없애려고 하기에 이른다. 다른 한편 19세기 중반 "밤은 미래가 없다."는 예견처럼 어둠을 몰아내면서 밤의 신비로움이 사라진다. 대신 인공과 낮의 확실성이 전제적으로 지배할 것이라는 불안감이 스며든다. 이렇게 레티프의 [파리의 밤]이나 으젠 쉬의 [파리의 미스테리](1842-1843), 네르발의 [시월의 밤](1852), 위고의 [레미제라블](1862)에 그려진 비밀스럽고 신비한 파리의 밤은 전설 속으로 사라진다.


 당시 가스 가로등[1]이 보편화되었다 치더라도 가로등의 설치는 좋은 동네와 가난한 동네가 공평하지 않았다. 부르주아 계층한테 유해하다고 여겨지는 공해 시설과 함께 중심부에서 주변부로 밀려난 빈민층들한테 밤은 여전히 어두웠다. 가로등의 확산은 밤이 정직한 개인을 폭행하고 봉기를 준비하는 데 유리하다고 본 부르주아 계층의 요구를 반영한 것이었다. 반란을 일으키는 민중들은 가로등을 부수고 도시를 점거하였다. 바리케이드 쳐진 밤에는 어두운 거리에 횃불만이 가물거렸다.


 왕정복고(1814-1830) 시절 레스토랑과 극장은 밤 11시에 닫아야 했다. 그렇지만 더 늦게 닫는 것도 허용되었다. 제2제정 시절인 1860년대가 되면 밤 12시 반은 쉽게 넘겼다. 일반 가정집들이 잠에 빠져들고 몇몇 카바레와 도박장이 희미한 빛 속으로 파묻혀 들어가도 파리의 중앙 시장 레알만은 연중 내내 밤새도록 불 밝혔다. 이런 식으로 통금은 조금씩 느슨해져 갔다.


 19세기 들어와 야간 조명이 확산되고 극장이나 산책 또는 술집 등의 야간 여가활동이 연장됨에 따라 야경꾼의 임무도 공공장소에서 일어나는 만취나 소란, 고함, 오물 투척 같은 문란한 행위에 초점이 맞춰진다. 왕정복고와 칠월왕정까지 네 개의 서로 다른 부서가 협조하지 않고 통일성 없이 치안 유지를 맡는다. 야간 순찰을 돌다가 주도권 다툼으로 더군다나 야경꾼들끼리 서로 충돌하는 웃지 못할 일까지 벌어진다. 제2제정 들어오면서 경찰이 주도권을 가지고 담당 구역을 좁게 분할하여 조직적으로 통제하게 된다. 바로 여기에서 합리적 통제를 내세우는 경찰국가의 모델이 비롯한다.


 아주 부유한 상류층이 아닌 사람이 해진 다음 거리에 나와 있으면 의심받기 마련이었다. 1815년에서 1848년 사이 야간 체포자의 60%는 밤거리를 배회하는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노동자가 저녁 아홉 시 이후 바깥에 있다는 것은 이튿날 일을 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하루 12시간 일하던 시절이라 아침 일찍 일어날 수밖에 없었으니까. 파리의 밤거리를 배회하는 노동자는 위험한 부류로 취급받았다. 왕정복고와 칠월왕정 시절 밤새도록 이 동네 저 동네를 옮겨 다니며 오물과 쓰레기를 뒤지면서 잠든 도시를 떠도는 넝마주이는 비밀스러운 밤 생활의 산 증인이었다. 1845년 인구 백만의 파리인들 가운데 노숙자가 3만 정도를 헤아렸다. 이들은 다리 밑이나 채석장 또는 레알의 카바레에서 잠을 잤다. 제2제정 들어와 잠재적인 불만 세력으로 간주된 넝마주이는 변두리로 밀려나 더욱 가난해졌다. 도시를 현대적으로 재정비하면서 오물수거나 청소는 새벽에 일하는 직업 청소부가 조직적으로 도맡게 되었다.


 밤이 불 밝혀지는 곳에 축제가 몰린다. 18세기 말부터 왕정복고 시절 그리고 칠월왕정 초반까지 반세기 동안 유흥과 상업의 중심지는 팔레 루아얄 궁과 그에 딸린 갤러리였다. 1781년 재건되어 새로 선보인 팔레 루아얄은 정원을 둘러싸는 1층에 180개의 아케이드를 만들고 188개의 조명등을 설치하여 180개의 각종 부티크가 문을 연다. 처음 레스토랑[2]과 도박장이 들어선 팔레 루아얄은 "파리에서 볼 수 있는 모든 것이 다 있는" 곳이며 "파리가 프랑스의 수도라면 팔레 루아얄은 파리의 수도"였다. 각종 카페와 극장들이 자리 잡은 팔레 루아얄은 또한 도박과 매춘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파리에 들러는 외국인이나 지방 사람들이 반드시 거쳐가는 파리 관광의 일번지였다. 그러다가 1830년 매춘부의 호객행위가 금지되고 1836년 도박장이 폐쇄되면서 유흥의 중심은 가스 가로등이 설치된 불바르로 옮겨간다.


 불바르는 1670년 샤를 5세의 성벽을 허문 자리에 생겨난 대로로 가로수가 이 열로 심어진 산책로였다. 오늘날 마들렌 성당에서 바스티유 광장까지 5킬로에 이르는 큰 길로 극장을 비롯 각종 공연장이 집중적으로 자리 잡았다. 17세기 중후반이 배경인 로베르 샬의 소설 « 데프랑과 실비의 이야기 »에서 데프랑이 실비한테 사랑이 막 불타오르는 즈음 9월 어느 저녁 열아홉 살 실비가 또래 여자 셋과 어울려 불바르의 풀밭에 앉아 당시 유행한 룰리의 오페라 [페르세포네](1680)에 나오는 연가를 부르는 장면이 나온다. 데프랑이 실비의 출생 비밀을 폭로하는 익명의 편지를 받게 되는 1월 어느 날, 자정 가까운 시각에 실비의 집을 나서는데 땅과 하늘도 분간할 수 없는 캄캄한 밤이었다. 


 "하인이 나한테 횃불을 갖다 주었지만 바람에 꺼져버렸다. 불 켜진 가로등은 하나도 없었다. 나는 더듬거리며 걸어갔다." 


 실비의 집은 불바르 생앙투안(오늘날 바스티유 광장) 가까이 있고 데프랑은 불바르에서 멀지 않은 마레에 살고 있다[3]. 17세기 말 이미 파리 시내는 가로등의 원조였던 초롱이 얼마만큼 설치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세기 중반 가스 가로등이 일반화되고 눈부시게 불 밝혀진 진열창과 간판이며 휘황찬란한 장식 조명으로 빛나는 파리는 "빛의 도시"라는 별명이 붙는다.

 19세기 초 식사도 하고 음료를 마시면서 악기 연주에 맞춘 연가나 샹송을 들을 수 있고 오페라의 발췌 소품도 볼 수 있는 카페 콩세르가 생겨나 19세기 후반에 성행하면서 밤 문화가 절정에 이른다[4]. 현대성을 잘 구현한 인상주의 화가 마네는 카바레나 카페 콩세르의 장면을 스냅 사진처럼 잘 잡아낸다. 19세기 후반 유흥의 중심도 불바르에서 몽마르트르 지역으로 이동한다. 카페 콩세르는 19세기 말 규모가 크고 서커스가 포함된 종합 스펙터클을 선보이는 뮤직홀[5]과 그 무렵 탄생한 영화관에 자리를 물려준다.


 밤 문화의 성행과 함께 통금이 사라졌다가 1870년 프로이센의 파리 점령 때 갑자기 되살아났다.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 때도 파리에 통금이 실시되었다. 특히 나치 치하의 2차 대전 때는 어둠을 틈타 통금을 뚫고 목숨을 건 레지스탕스가 일어났다. 르네 클레망 감독의 1966년 개봉된 영화 [파리는 불타고 있는가?]에서 1944년 8월 2차 대전 말 통금하의 파리에서 벌어지는 레지스탕스 활동가의 활약상이 박진감 넘치게 펼쳐진다.


          

[1] 1837년에 202개, 1847년에는 8600개가 설치되었다.

[2]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레스토랑의 개념이 처음 도입된다. 각자 자리를 차지하고 메뉴판을 보고 주문하는 시스템이다.

[3] 마레는 자서전적인 요소가 많은 작가 로베르 샬이 태어난 동네(현재의 54 rue de Saintonge)이기도 하다.

[4] 1900년 전후하여 밤 노동자가 2백5십 만을 헤아렸다. 오늘날은 6십 만으로 줄어들었다.

[5] 1886년에 폴리 베르제르, 1889년에 물랭 루주, 1893년에 올랭피아가 문연다.



    한국의 통금


 한국은 현대에 들어와서도 통금이 실시되었다. 그것도 무려 37년간이나! 1982년 1월 5일에서야 통금이 해제되었다. 1945년 9월 8일 미군정청 하지 사령관의 군정포고 1호로 자정에서 새벽 4시까지 야간 통행금지가 선포되었다. 그런데 6.25를 거치면서 전시 상황이라는 명목 아래 뚜렷한 이유 없이 통금을 계속 유지하였다.


 신문이나 블로그에서 묘사된 당시의 통금 분위기를 한번 살펴보자.


 "오후 10시가 되면 청소년 귀가를 위한 사랑의 종소리가 라디오에서 울렸고 선도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청소년 여러분! 밤이 깊었습니다. 사랑하는 가족들이 기다리는 가정으로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자정 20분 전(23시 40분)과 자정(24시)에 사이렌이 정확히 1분간 시민들의 귀를 경각으로 몰고 갔다."


 "자정 사이렌이 울리고 나면 도시의 거리나 골목에서는 촌극이 시작됐다. 손에 방망이를 쥐고 단속하는 방범대원과 귀가를 못한 사람들과 숨바꼭질이 벌어졌다. 도망가는 자와 호루라기를 불며 쫓는 자와의 달리기 시합은 마치 촌극에 가까운 광경들이었다. 통행금지를 위반・적발되면 가까운 파출소나 경찰서에 인계돼 통금해제 때까지 하룻밤 유치장 신세를 져야 했다".

 

 "밤 12시만 되면 매일 어김없이 울려 퍼지던 사이렌 소리와 함께 적막에 휩싸이는 거리. 이 소리만 들리면 술 취한 행인도, 몰래 데이트하던 커플도, 아무튼 거리의 사람이란 사람들은 모두 화들짝 놀란 가슴으로 뛰기 시작했다. 걸리면 누구든지 바로 철창 안에 갇힌 채로 하룻밤을 꼬박 새워야 했으니까." 


 방범대원이 도둑 같은 범죄자를 잡는 것이 아니라 통금을 어긴 범칙자를 잡는다는 것은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과거를 회고하는 시점으로 통금을 바라보아서 그런지 통금 상황을 "촌극"이라고 희화화시켰지만 실제 개인의 시간을 구속하고 신체를 구금한 무지막지한 폭력이었다. 반공 이데올로기 이외의 또 다른 뚜렷한 명분 없이 통금을 유지하면서 경찰력을 동원하여 시위를 진압하듯 전 국민을 감시하고 처벌하였다.


 그런데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고 여겼던 통금이 코로나와 함께 귀신 같이 되살아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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