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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샤 pacha Mar 20. 2022

마르세유 페스트 4

방역과 처방

    페스트 방역 대책


 마르세유에 페스트가 발생했을 때 프로방스 지방 도시들은 생선 가게에서 물을 썩히거나 집 안에 오물을 쌓아 두는 것을 금지하는 초보 단계의 예방책을 동원하였다. 우선 이렇게 하여 상업을 보호하려고 애썼다.


 잠시 도매상인 루의 페스트 예방책을 살펴보자. 감염된 사람이나 물건과 접촉을 피하고 집안에 꽁꽁 틀어박히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집 안으로 들어오는 출입문 앞에 유리 방벽을 설치하고 물통, 식초병, 향료함을 놓아두어야 한다. 집 안에 사람을 절대 들어오게 해서는 안 된다. 어쩔 수 없이 사람을 들여보낼 때는 옷을 벗게 하여 의사한테 페스트 증세가 없는지 확인하고 나체로 맞아들이며 모든 옷은 며칠 동안 물에 담갔다가 며칠 햇볕을 쬐게 한다. 이렇게 집 안에 들어온 사람은 따로 떨어진 아파트에 머물게 해야 하고, 다른 사람과 접촉해서도 방에서 나와서도 아무것도 만져서도 안 된다.


 고양이를 바깥으로 내보내지 않기가 힘들기 때문에 죽여야 하고 개는 매어놓아야 한다. 프랑스 왕가에서 내린 지침에는 방역선 안팎 십 리 안의 개와 고양이를 모두 죽이라고 되어 있다.


 생필품 이외는 집안으로 들여서는 안 된다. 식료품을 들여놓을 때는 물에 헹구고, 때에 따라 식초에 담가야 한다. 철제, 목제, 광주리, 끈, 유리나 도자기 제품은 위험하지 않지만 실내로 들여놓기 전에 물에 휑궈야 한다. 이런 물건들을 만진 사람의 땀이나 때를 두려워해서였다. 삼으로 꼰 줄은 반드시 피해야 한다. 될 수 있으면 비단 천이나 모직물을 쓰지 말라고 하면서 어쩔 수 없이 쓸 경우 두어 번 물에 담가둔 다음 바람을 쐬어 바싹 말릴 것을 권한다. 특히 견직물은 물에 담그면 상하니까 오랫동안 바람을 쐬게 해야 한다. 모자며 구두 그리고 향료에 상할 위험이 없는 것들은 모두 향료함을 통과시켜야 한다. 종이나 편지 뭉치가 두툼하면 향료함 통과로는 충분하지 않아 금속제처럼 식초에 잘 담가야 한다. 이렇게 할 때 늘 집게를 써야 한다.

 

 따뜻한 빵은 위험하고 차가운 빵은 아무 위험이 없다. 빵을 집게로 집어 그물에 넣고 몇 시간 동안 매달아 두었다가 만져야 한다.


 면직물은 반드시 피해야 하며 비단옷을 입고 방수포를 걸치도록 해야 한다. 사람과 접촉하지 말아야 하며 면이나 모직 그리고 삼으로 만든 천 조각을 밟지 말아야 한다. 여러 사람과 말해야 할 때는 두 사람 사이에 향로를 두어야 한다. 깨끗한 리넨 제품을 써고 목욕을 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공기 오염으로 페스트가 생겼다는 의사들(특히 몽펠리에서 초빙한 의사들)의 처방보다 경험에 바탕을 둔 민간요법이 훨씬 더 효과적이었다.


 페스트가 프로방스 전역으로 번지자 1720년 9월 14일 프랑스 왕실은 프로방스 지방 전체에 봉쇄 조치를 내렸다. 이례적으로 프랑스 왕국 병력의 4분의 1을 프로방스 지방 봉쇄에 투입하였다. 왕실에서 내린 조치 가운데 편지 배달과 수거는 마르세유 성밖 지역에서 하게 하였다. 방역선과 서른 걸음 떨어진 지점에서 편지 꾸러미를 던지면 보초 분대장의 통제 아래 식초에 담근 집게로 끌어모았다. 제노바에서는 마르세유에서 도착한 편지들은 모조리 불태웠다. 


 마르세유 봉쇄는 2년 반 지속되었다. 마르세유 성안에는 2개 연대 병력이 치안을 맡았다. 성안은 소구역으로 더 잘게 나누었다. 병사들이 동네별로 거리별로 전염병과 주민들을 감시하고 통제하였다. 페스트 발생 전 성안에서 경찰 업무를 맡은 인력은 전체 146명쯤이었다. 페스트로 보건 업무가 폭증하자 잠정적으로 경찰인력을 300명 정도 충원하였다. 경찰은 생활하는데 꼭 필요한 최일선의 노동자들이며 의사들과 협력하였다. 강제 노역형을 당한 마르세유 갤리선 조선소의 도형수들도 차출되어 가장 험한 일을 맡았다. 그들은 경찰의 감독을 받으면서 소독을 하고 시체를 치우고 묻었다. 성밖 지역도 성안과 비슷하게 대책반이 조직되었다. 


 감금 조치 중인 위기 기간에 이동하려면 위생 증명서를 가지고 다녀야 했다. 위생 증명서는 페스트에 감염되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검역증으로 관할 지역의 신부나 경찰서장이 발행하였다. 초등학교며 중급학교, 성당과 모든 회합 장소를 포함한 공공장소를 폐쇄하였다. 페스트 환자가 있는 집은 붉은 십자가로 따로 표시하였다. 감염자들은 먼저 경찰이 관리하여 자택에 격리되어 음식물을 배급받다가 그다음에 페스트 전문병원으로 이송되었다.


 페스트가 잠잠해지자 1721년 1월-9월에 걸쳐 시 당국에서 도시를 소독하고 환자 수와 사망자 수를 집계하고 살아남은 시민 수를 조사하였다. 더 위급한 일처리도 인력이 부족한 판인데 대부분 서민들은 세례명으로 이름만 불렀기 때문에 사망자 파악이 아주 힘들었다. 위험한 부류로 분류된 사람들은 특별 감시를 받았다. 예컨대 직업상 고물장수, 시체 운반과 매장을 맡은 역할로 인해 도형수, 이동성으로 말미암아 외국인 그리고 사회적으로 멸시받는 창녀와 유태인 등이다. 보건 규칙을 어기는 사람들한테 가해지는 형벌이 점점 강화되어 채찍질에서 말뚝에 매다는 형벌, 도형에서 사형에 이르기까지 다 포함되었다. 방역선을 넘는 경우가 사형에 해당했는데 실제 사형에 처해진 공문서는 남아 있지 않다. 상선에 대한 검역과 마찬가지로 방역선에 대한 통제도 규정대로 지켜지지 않는다. 실제 유지라든가 친구 사이면 쉽게 검문소를 통과하여 방역선을 넘을 수 있었다. 프로방스에서 랑그도크 지방으로 전염을 막기 위하여 백 킬로에 걸쳐 벽으로 둘러친 호를 만들고 군대가 감시했지만 그 지방 농부들은 방역선을 넘어 매일 제분소를 다녀왔다.



    페스트 처방


 1720년 8월 9일부터 10월 4일까지 성안에는 페스트 전문병원과 이 병원 부속의 요양원과 격리소를 합쳐 총 6개 기관이 갖추어진다. 그해 가을 포화 상태에 이른 다른 병원에 대비하기 위해 성밖에 마이 병원을 급하게 지었다. 이 병원은 주로 성밖 주민들을 수용하였다. 사망률을 보면 성밖의 마이 병원의 경우 1720년 12월에 92%에 이르렀다. 성안의 샤리테 병원은 1720년 10월부터 1721년 2월까지 평균 54%를 보였다.


 병원의 치료는 그다지 효과가 없었다. 독소를 제거한다고 처방한 구토제나 하제 그리고 사혈이나 림프샘종 제거 같은 치료는 환자들의 죽음만 앞당길 뿐 아무 효험도 보이지 않았다. 외과적 수술 치료를 새로 실험하고 병의 원인을 더 잘 밝혀내기 위해 시체 부검도 시도하였다. 의사들은 환자를 죽음으로 몰고갈뿐인 극단적인 수술 치료는 피하였다.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림프샘종 수술을 금지하였다. 대신 육류를 충분히 섭취하게 한다든가 구토제, 안티몬, 포타슘, 시럽 등을 섞어 만든 테리아카 같은 약 처방을 하였다. 


 위기에는 사기꾼도 판친다. 엉터리 약장수의 특효약이 셀 수 없이 많았다. 두꺼비 가루를 가슴에 바르거나 독사의 심장과 허파로 만든 환약을 복용하는 것이 가장 흔했다! 결국 식초 소독 같은 민간요법과 방수포 복장이 의사의 처방보다 훨씬 나았다. 일부 환자들은 완치되었다는 몇몇 증언을 보면 병을 앓고 나서 면역 체계가 생기지 않았나 짐작해볼 수 있다.

 

 14세기부터 18세기에 이르기까지 공포의 대상이던 페스트나 19세기에 유럽을 강타한 콜레라에 대한 처방을 보면 별 차이가 없다. 전염병에 대해 정확한 병인을 알지 못한 의사들은 그저 "마음을 즐겁게 하고 맛있고 좋은 음식을 충분히 섭취할 것"이라는 일반화된 처방을 내렸다.

 

 마르세유 페스트 때 기분을 좋게 하는 방법으로 바이올린과 북 연주를 추천하였다. 페스트에 대한 약 처방이라고는 120 가지에 이르는 온갖 향초를 독사의 살과 섞어 만든 아무 효과도 없고 오히려 약이 아니라 독이 되는 엉터리 약장수 처방이 고작이었다. 약초의 열거와 시럽이나 고약을 만드는 방법을 보면 귀신과 놀아난다고 애꿎게 화형 시킨 마법사의 치료법과 하나 다를 것도 없다. 페스트의 치료에 관한 한 실제 동네의 개업의나 마을의 사제, 돌팔이 의사와 마법사의 차이가 거의 없었다. 마찬가지로 의학에서 나온 치료법과 돌팔이 의사의 상상력에 나온 것과 차이가 없었다. 특히 시골에서는 비전문가인 돌팔이 의사, 마법사, 사제가 치료를 담당하였다.


 페스트가 여전히 공기의 악취에서 생긴다고 보았기 때문에 페스트 예방과 방역에 방향제를 널리 이용하였다. 방향제는 공기와 몸에 결핍된 요소를 공급하는 것으로 보았다. 16세기에는 냄새가 나지 않는 치료제는 지탄을 받기도 하였다. 심지어 나쁜 냄새까지 페스트의 독을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유황, 안티몬, 화약, 송진, 비소 같은 악취를 내는 유독 물질을 사용하였다. 만드는데 돈만 많이 들고 효과는 전혀 없던 방향제는 페스트가 사라지면서 동시에 의료 분야에서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 



    행동 양식


 많은 종교인들이 장례식을 제대로 치르려고 했지만 전염의 위험 때문에 불가능하였다. 결국 아무 의례도 없이 페스트로 죽은 환자의 시체를 공동 묘혈에 마구 집어던졌다. 지로 신부의 일기에는 가족이 공동 묘혈에 매장되는 것을 안타까워 한 나머지 감염의 위험을 무릅쓰고 부모나 부인의 시신을 가까운 공동묘지까지 메고 가는 사례도 나온다.


 이런 엄청난 재앙을 겪으면서 사람들은 공포에 사로잡혀 좌절하거나 극단적으로 머리가 돌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이런 극한 상황에서도 죽어가는 환자를 끝까지 헌신적으로 돌본 나머지 자신이 감염되어 죽는 사례도 일어났다. 많은 사람들이 전염병을 피해 자신의 직책을 버리고 무책임하게 도시를 빠져나갔다. 부르주아, 유력인사, 성당의 참사원, 귀족, 경찰서장, 도매상인, 의사, 변호사, 검사장, 공증인 등이 신도, 책임, 사업, 환자나 고객을 버리고 도망갔다. 다른 한편 소수지만 몇몇 유지들과 행정관료, 법관, 공무원들은 도시에 남아 자신의 자리를 지켰다. 이기주의와 이타주의, 영웅적인 행동과 비굴한 행동 사이의 중간은 있을 수 없었다. 


 의사와 성직자는 물론이고 어린 자원 봉사자(열둘에서 스무 살에 해당하는 지원자가 열 명 가량  있었다.), 간호사며 간병인, 환자 이송하는 사람들이 무더기로 죽어나갔다. 교구 신부와 재속 신부를 합쳐 총 1300명에 이르는 마르세유의 성직자 중 약 250여 명이 희생되었다. 그렇지만 마르세유의 경제권을 휘두르는 도매상인 삼백 여명 가운데 페스트 희생자는 단 세 사람뿐이었다. 그들은 페스트로 사업이며 재산 증식에 지장을 받지 않았다. 결국 짧은 시간에 엄청난 희생자를 낸 마르세유 페스트는 심리적 타격에 비해 경제적 피해는 크지 않았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감금 상황에서 사람들은 서서히 조직적으로 행동하기 시작했다. 성당이 폐쇄되자 초기에 몇몇 신부들은 야외에서 계속 설교를 하였다. 벨쟁스 주교는 기도 행렬이나 공동 기도를 조직했지만 나중에 시에서 전염의 우려 때문에 이런 행사를 금지시켰다.


 가족 간에 이웃 간에 사회적인 관계는 끊어지지 않고 유지되었다. 위기 상황에서는 서로 돕는 것이 가장 슬기로운 대처 방식이다. 이동이 제한되고 또 집에 감금되어도 감염을 피하면서도 인간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갖가지 수법들이 나왔다. 문간이나 창문가에서 서로 떨어진 채로 이야기를 나누고 식초를 대량 뿌려 살균하였다. 가까운 사람끼리 지역이 서로 달라 떨어져 있어도 서신 교환을 통해 관계를 유지하였다. 이 끔찍한 재난에도 삶은 계속되었다.


 1720년 11월부터 사람들이 조심스레 바깥으로 외출하기 시작하였다. 인근 시골로 피신하였던 시민들이 콧수염이나 턱수염을 길게 기르고 장애물 치우는데 필요한 기다란 생로크(Saint-Roch : 페스트의 수호성인) 막대기를 쥐고서 하나둘씩 마르세유로 되돌아오기 시작하였다. 페스트 시기의 유니폼인 초 칠한 방수포 복장을 더 이상 입지 않았다. 10월 중순부터 보잘것없어도 지역적으로 소규모 상거래가 다시 이루어졌다. 가게들도 하나둘씩 열렸다. 수공업자들이 다시 일하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무엇보다 희망적인 것은 항구에서 일이 시작된 것이었다. 11월 중순 겨울 식량 공급을 위해 동방으로 떠날 상선이 출범 준비를 하고 고기잡이가 재개되었다.


 정상적인 삶으로 되돌아가는 또 다른 징표는 11월 초부터 미친 듯이 치르는 혼례였다. 대부분 홀아비와 과부의 결혼이었다. 남편의 사망 증명서가 없는데도 과부한테 부고장을 주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 결과 여자들이 이런 혼란기를 틈타 남편을 다른 지방에 두고도 결혼하는 사례가 적지 않았다. 심지어 페스트가 일어나고 세 번씩 남편을 이용한 여자들도 있었다[1]. 또 남녀 할 것 없이 전례가 없는 광기에 사로잡혀 인생의 중대사를 하루 만에 결정짓고 곧바로 육체관계를 맺었다. 페스트 전 기간 동안 교구별로 꼬박꼬박 기록되지 않았지만 전염병의 영향으로 "미친 듯이 혼례를 치른" 것과 발맞추어 전염병이 극심한 직후 (육체관계가 건강에 해롭다는 의학적 마술적 종교적 처방으로 말미암아 출산율이 일시적으로 눈에 띄게 떨어졌다고 해석할 수 있다.)를 제외하면 출산율이 눈에 띄게 올라갔다. 당시 통계를 보면 페스트 이전 일 년간 결혼식 횟수가 740건인데 1472건으로 늘어났다.


          

[1] 이런 관찰을 기록한 사람이 남자임을 고려해야 한다.



    반전과 결말


 1720년 8-12월의 절정기를 넘기고 1721년 9월부터 페스트는 잠복중이었다. 막 프랑스의 다른 지역들이 프로방스 지방의 상품을 다시 받아들이고 이탈리아 리보르노가 마르세유발 선박들의 입항을 허용한 시점이었다. 이제는 전염병이 사라졌다고 본 1722년  4월 초 여전히 감금 조치가 내려진 상태에서 다시 첫 사망자가 발생하여 8월 초까지 총 174명이 사망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1720년과 달리 5월 9일부터 신속하게 봉쇄 조치와 감금 조치가 취해지고, 5월 21일에는 60킬로에 초소 89개가 설치된 방역선이 쳐진다. 이번에는 장교 31명, 병사 332명, 농부 281명이 협력하여 철저하게 격리 조치를 실행한다. 항구 앞바다에서도 모든 배의 접근을 막기 위해 순찰선 한 척이 감시를 한다. 랑즈롱 사령관이 되돌아온 6월 27일 마르세유는 또다시 모든 곳으로부터 봉쇄가 된다. 8월 초 마르세유 주민의 반은 근교 시골로 피신하고 남은 부르주아들은 집안에 틀어박힌다. 8월 초부터 더 이상 사망자가 나오지 않지만 공포에서 벗어나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였다. 10월 초까지 당국은 철저한 방역조치를 취한다. 마르세유는 완전 해방이 되려면 한참 더 기다려야 한다.


 마르세유 시민들은 1720년 8-12월과 1722년  5-9월의 각각 5개월 동안은 엄격한 감금 조치와 그 나머지 30개월 동안은 규칙을 지키는 완화된 감금 조치를 겪었다. 마르세유 항구는 30개월 폐쇄되었다. 제조소들은 문을 닫고 교역은 거의 전멸이었다.

 1722년 12월 1일 방역선이 걷히고 시민들은 마르세유 성밖 바깥으로 자유롭게 통행할 수 있게 되었다. 

구시가지 외곽지역과 도형수들까지 포함해서 인구 10만이던 마르세유는 페스트가 물러간 다음 5만으로 줄어들었다. 마르세유를 포함 프로방스 지방에서 12만의 희생자가 나왔다. 프로방스 주민의 3분의 1에 해당한다. 툴롱에서 2만, 아를에서 13000이 희생되었다.

 1723년 5월 프로방스와 봉쇄가 풀리고 프랑스의 나머지 지역과 교역을 재개한다. 

 1723년 9월 4일 3년 만에 군사 사령관이 떠났다.

 마르세유가 봉쇄된 지 3년 반 지난 1724년 초에서야 외국과 교역이 완전 복구되었다. 

 부족한 인력은 주변 지방에서 유입되면서 금방 보충되었고 침체된 경제도 예상보다 훨씬 빨리 회복되었다.



    결론


 페스트의 정체가 밝혀지지 않았기에 피렌체의 흑사병과 그 뒤 370년 지난 마르세유 페스트는 사람들의 행동 양식이나 방역 대책 그리고 치료법 차원에서 크게 변한 게 없다. 그런데 3백 년 전에 일어난 마르세유 페스트와 현재 진행형인 코로나가 시간의 격차로 차이점이 많지만 공통점도 적지 않다. 


 전염병의 발병 원인을 몰라 신의 노여움이라고 생각하는 진단은 지금은 거의 사라졌지만 전염병의 변덕스러운 속성으로 예방보다는 크게 번지고 나서 대책을 세우는 상황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마르세유 페스트 때 자선으로 가난한 사람을 돕기도 했지만 아주 드물었고 시 당국에서 차용을 통해 재난 구조자금을 충당하였다. 코로나 위기에서도 갑부들의 자선은 정말 드물고 주로 국가 차원에서 보조금을 지급한다. 접촉을 금지하고 소독을 하고 집안에 틀어박히며 경찰력을 동원하여 이동을 통제하고 이동할 때 위생 증명서를 구비해야 하는 상황은 지금도 여전하다. 당시에는 환자들만 격리조치를 시켰는데 코로나 위기에서는 전 국민을 감금시키는 일이 일어났다. 마르세유 페스트 때 전염병을 억제하기 위해 마르세유와 프로방스 지방을 봉쇄하였다. 봉쇄 효과는 아니지만 결과적으로는 1720년 페스트는 프로방스와 랑그도크 지방에만 국한된 전염병이었다. 방역 규칙을 감시하는 것은 사람이 하는 일이라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구멍이 뚫리는 수가 많았다. 그래도 3백 년 전 의학적으로 무방비였던 그들은 페스트에 대한 경각심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은 첨단 과학에 대한 맹신은 있어도 전염병에 대한 예방 개념은 별로 없다.



    참고 자료

Beauvieux (F.), « Marseille en quarantaine : la peste de 1720 », l’Histoire, 17 avril 2020.

Carrière (M.), Courdurié (M.), Rebuffat (F.), Marseille ville morte, la peste de 1720, Jeanne Laffitte, 2020.

"Chronique de la peste : 1720", musée d'Histoire de Marseille, extension numérique.

Durand (G.), « Coronavirus : deux archives nous replongent dans le confinement, il y a 300 ans, lors de la dernière épidémie de peste en France », 20 minutes, 26/04/20.

Hildesheimer (F.), La Terreur et la pitié, l’Ancien Régime à l’épreuve de la peste, Publisud, 1990.

Hondelatte Raconte : 1720, la peste de Marseille, Europe1, 23 mai 2020.

« La Provence malade de la peste : la grande épidémie de 1720 », FranceArchives, 20/04/2021.

Ruffié (J.), Sournia (J.-C.), Les épidémies dans l’histore de l’homme, Flammarion,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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