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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샤 pacha Mar 19. 2022

마르세유 페스트 3

죽은 도시 마르세유

    봉쇄당한 마르세유


 7월 15일 자 프랑스와 유럽의 항구로 보내는 공문에서 마르세유 행정관들은 마르세유 검역소만 감염이 되었다고 밝히면서 그렇지만 검역증을 지참하지 않은 마르세유발 선박에 대해 경계를 하라고 알린다. 곧바로 주변 항구 도시들이 조치를 취한다. 마르세유발 선박에 대한 통제 조치(검역증 검사나 입항 금지)를 내린다. 프레쥐스, 앙티브, 아를… 프랑스의 도시들만 아니었다. 마르세유와 해상 교역이 잦은 외국 도시들도 바로 마르세유에 대해 봉쇄 조치(인적 물적 통제와 격리, 선박의 입항 금지와 검역)를 내렸다. 니스, 모나코, 제노바, 베네치아…  


 7월 31일 엑스의 프로방스 의회는 마르세유 봉쇄를 포고한다. 프로방스 도시들은 마르세유와 모든 교역을 중지시키고 마르세유 주민이 엑스를 비롯한 프로방스 지역으로 오는 것을 금지시킨다. 운송업자의 왕래와 상품 운송 역시 금지된다. 이미 엑스로 피신해 있던 마르세유 주민은 추방된다. 프로방스 지역에서 엑스로 오거나 엑스를 떠날 때 위생 증명서를 소지하도록 한다. 이 증명서에는 출발지의 보건 상태, 성명, 주거지, 키, 나이, 머리색, 출발일과 시간, 하인과 짐바리 동물의 숫자가 기재된다. 마지막으로 마르세유 출신의 유태인들은 속죄양으로 추방된다.

 

 그렇지만 마르세유의 성문의 폐쇄로는 페스트의 전파를 막을 수 없다. 마르세유 성밖 주민과 그 바깥 농촌 주민과의 내왕을 자유롭게 내버려 두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미 성안 주민들이 성밖 변두리로 피신해 있었기에 성안만 봉쇄해 보아야 아무 효과가 없다. 이런 봉쇄 조치로는 너무 모자라서 프로방스 의회는 8월과 9월에 추가 포고령을 발표한다. 마르세유 주변의 소도시들도 엑스와 비슷한 조치(외지인들과 거지들의 추방)를 취한다. 그런데 이런 수칙들이 엄격하게 지켜지지 않는다. 게다가 각 도시별로 마르세유 봉쇄 규칙들이 들쭉날쭉 이어서 그다지 큰 효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방역선을 치고 검문소에 보초를 세우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사람과 물품이 몰래 불법으로 이동하고 유통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반면 프로방스의 여러 도시들이 마르세유를 고립시킨 것과 마찬가지로, 약간의 시차를 두고 8월 초 프로방스 주변 지방 콩타 브네생, 랑그도크, 도피네도 프로방스에 대해 봉쇄 조치를 취하였다. 9월 초까지 툴루즈, 루시옹, 디종, 브장송 의회도 엑스 의회의 봉쇄 조치를 뒤따른다. 프랑스 북부의 항구인 생말로나 르아브르 항구에서는 마르세유 쪽에서 온 배에 선적된 상품을 불태웠다. 심지어 1721년 3월 29일 툴롱에서 출발한 상선을 2개월 간 정화를 거치고도 6월 22일 생말로 항구에서 상품(쌀, 비누, 기름)과 함께 불지르기도 했다. 세트에서 출발하여 덩케르크에 도착한 어떤 배는 당국의 완강한 거절로 58일 기다렸다가 되돌아가기도 했다. 프랑스의 대서양 쪽 항구 도시 라로셸에서도 승무원이 마르세유 출신이라고 제노바에서 출발한 배를 마르세유 페스트가 터지기 전에 출발했는데도 입항 거절한다. 에스파냐는 프랑스의 지중해 연안과 교역을 중지시켰다. 영국도 지중해 쪽에서 도착하는 모든 선박에 대해 검역 조치를 내렸다. 네덜란드도 마르세유에서 출항한 배를 되돌려 보낸다. 모로코도 마르세유에서 도착한 배의 입항을 거절한다.


 마르세유 도시 전체에 통금 조치가 내려졌다. 성문을 걸어 잠그고 성밖에 장벽을 설치하여 주변 도시들과 고립시켰다. 성밖을 에워싸는 89개의 검문소를 설치하여 60킬로에 이르는 방역선을 만들었다. 페스트가 마르세유에서 백 킬로 떨어진 오랑주까지 번지자 콩타 브네생(Comtat Venaissin : 교황령에 속한 지역으로 오늘날 보클뤼즈 도에 해당한다.)을 격리시키는 36킬로에 이르는 "페스트 장벽"을 건설한다. 육로나 해상으로 보급되는 식료품 공급을 중앙 통제하기 위해 8월 6일 성밖에 세 개의 시장을 설치하고 그 이후 일곱 개를 더 만들었다. 시장에 보초들을 배치하여 거래 중 개인들 간에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도록 감시하였다. 8, 9, 10월 동안 가난한 사람들과 일자리를 잃어 수입이 없는 사람들 3500여 명한테 매일 한 사람당 800g의 빵과 200g의 육류를 무상 지급하였다. 한 가지 주목할 점은 규칙을 어긴 사람들한테 거두어들인 벌금은 그 지역의 가난한 사람들한테 할당하였다는 사실이다.


 사태가 점점 더 심각해지자 프로방스 지방의 도시들이 자체로 위기 관리 능력이 없다고 판단하였다. 이례적으로 프랑스 왕실이 직접 나서서 페스트 관리를 위해 전권을 가진 군사 지휘관을 각 도시별로 임명하였다. 마르세유의 경우 1720년 9월 3일 랑즈롱을 사령관으로 임명하였다. 그는 이미 마르세유 도형수선 함대장을 맡고 있던 인물로 마르세유의 민간인과 주둔 병사 둘 다 지휘하였다. 재난 비상사태가 선포된 상태에서 기존의 행정관들은 해임되지 않고 군사 지휘관의 명령 아래 질병 관리에 협력하였다. 랑즈롱 사령관은 무질서(특히 무단 가택 침입과 노략질)를 회복하기 위해 야간 통금령을 내렸다. 저녁 9시 이후 외출을 금지하고 어쩔 수 없이 외출할 때는 반드시 횃불을 들게 하였다. 공공장소를 폐쇄하고 술집을 닫게 하였다. 보초를 세우고 규칙적으로 순찰을 돌게 하였다.



    시체 치우는 일이 가장 급하다


 8월 말이면 페스트는 항구와 갤리선 조선소를 통해 구시가지와 따로 떨어진 신시가지까지 점령한다. 페스트를 피해 피신해 온 몇 사람이 안전했던 이 지역을 전염시켜서이다. 이제 온 거리가 7-8천을 헤아리는 시체로 가득 찬다. 살아남은 사람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갈고리와 끈을 써서 자신의 집에서 되도록 멀리 시체를 끌어 옮긴다. 시체에 달려든 개들이 뜯어먹어 훼손된 시신을 질질 끌고 다닌다. 낮에는 쥐 죽은 듯 고요하다가 밤이면 개들의 울부짖는 소리만 울려 퍼진다. 시체 썩는 냄새와 온갖 오물의 악취가 뒤섞여 이런 오염된 공기만 마셔도 전염될 지경에 이른다.


 절정에 이른 8월 15일-9월 15일 한 동안은 하루 사망자가 천 명을 웃돌면서 기존의 도시 체제가 통제 불가능한 상황으로 치닫는다. 당시 마르세유의 고등 검사장이며 시 위원회 대변인인 크루아상트의 심각한 상황 묘사를 보면, "어느 쪽으로 눈길을 돌리더라도 길이란 길은 양쪽 모두 썩은 시체들끼리 서로 뒤엉긴 채 잔뜩 널브러져 흉측하고 끔찍해서 차마 볼 수가 없었다"[1]. 그다음 벌어지는 상황은 이미 여러 곳에서 묘사된 장면이 되풀이된다. "빈 집은 노략질을 당하고 죽어가는 사람은 살해당하며 식료품은 품귀현상이 일어나고 물가는 치솟는다. 징발당한 농부와 노무자는 시체를 운반하고 무덤 구덩이 파는 일을 거부한다"[2]. 대신 투입된 도형수들은 나흘 만에 죽거나 도망친다.


 책임자들이 다 도피한 마르세유에 단 네 명의 행정관들이 도시 전체를 통치하였다. 에스텔, 무스티에, 디외데, 오디마르. 실질적이라기보다는 명목상의 시장 피유 후작의 관할 아래 네 명의 행정관들이 도시의 모든 행정을 도맡았다. 이들은 페스트를 무릅쓰고 과감하고 차분하게 행동하였다. 도망가지 않고 남아 이들을 도와 협력하는 사람은 정말 소수였다.


 가장 시급한 문제는 온 거리를 메우고 나뒹굴며 썩어가는 시체를 치우는 일이었다. 시체 운반 수레도 부족하지만 정작 가장 큰 문제는 수레를 몰고 시체를 치울 일꾼이 모자랐다. 몇 안 되는 자원자들이 금세 페스트의 희생자로 사라지자 아무도 이 일을 맡겠다고 나서지 않았다. 시체 운반을 하던 거지들도 다 죽었다. 일당을 15리브르로 올려도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1721년 물가가 올라서 일반 노동자의 일당이 1리브르로 월 수입이 25리브르였다. 몽펠리에에서 초빙된 의사는 숙식을 포함 모든 편의 시설을 제공받고도 월급 1000리브르, 외과의사는 500리브르를 받았다. 대상인은 월 수입이 4000리브르 수준이었다. 


 일하다가 금세 죽을 게 뻔한 줄 알면서 누가 선뜻 나서겠는가? 결국 행정관들은 갤리선 도형수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페스트에서 살아남으면 석방한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결국 그들도 이 일을 하다가 총 262명이 희생되었다. 이들을 감독하는 장교나 병사들이 있지만 감시가 허술해서 도형수들은 버려진 집들을 노략질하고 죽어가는 사람을 죽이는가 하면, 아직 목숨이 붙어 있는 사람도 수레에 집어던져 산 채로 공동 묘혈에 매장하였다. 또 그들은 기회를 엿보아 슬쩍 사라졌다. 저녁 출석을 부를 때면 도형수들은 서로 대신 대답을 해서 숫자 차이를 속였다. 어떤 도형수가 변장을 하여 사라지면 동료들이 시체에다 그 도형수의 옷을 입히는 술수를 부려 감독관의 눈을 속였다. 어쩔 수 없이 매일 무스티에 행정관은 말을 타고 직접 시체를 치우는 현장에서 도형수 장의 일꾼들을 감독할 수밖에 없었다.

 

 1720년 9월 루라는 도매상은 이렇게 쓴다. "제빵업자의 사분의 삼은 죽었고 남은 사람의 반은 병에 걸려서, 성한 제빵업자가 기껏 삼 만쯤 남은 사람들의 입에 들어갈 빵을 공급하기에도 부족하게 되었다"[3]. 사실 제빵업자가 모자란 데는 페스트를 피해 도망갔기 때문이었다. 도살업자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공급되는 가축이 부족한 게 아니라 육류를 제공할 도살업자가 모자랐다. 도망치거나 페스트로 죽었기 때문이었다. 가축 도살에도 도형수들의 일손이 필요하였다. 결국 마르세유 페스트가 절정에 이른 8월이나 9월 밀이나 땔나무, 가축이 부족한 것은 아니었다. 짐꾼이나 운반인, 제빵사, 도살업자 등 인력이 부족하였다 [4]. 운반 인력 역시 도형수의 일손을 빌렸다.


 시체 매장할 묘지가 모자라게 되자 8월 8일부터 마르세유 성벽 안팎으로 척탄병들과 인근의 농부들을 동원시켜 공동 묘혈을 파게 하였다. 깊이 2,5미터, 넓이 3,5미터, 길이 5-40미터의 공동 묘혈에 시체를 생석회로 덮고 켜켜이 쌓아 올려 매장하였다. 그런데 흙을 제대로 덮지 않아 시체의 머리나 팔다리가 땅바닥 바깥으로 드러나는 수가 많았다. 행정관들의 지휘 아래 네 개 분대 도형수의 노력으로 일 주일 만에 모든 사람이 죽은 한 동네를 빼고는 대부분 지역에서 시체를 치우고 도시를 소제하게 되었다. 주민들이 거의 다 죽고 몇몇이 살아남은 항구 가까운 가난한 동네인 투레트 광장에는 아무도 선뜻 접근하려 들지 않았다. 리브뇌브 지역을 담당한 로즈 기사가 이 일을 맡겠다고 나섰다. 9월 16일 그는 투레트 광장에서 100명의 도형수들과 40명의 지원병들을 지휘하면서 감염을 무릅쓰고 버려진 지 오래되어 형체를 알아보기 힘든 천여 구의 시체를 치우는데 손수 참가하였다. 이 작업에 참가한 사람들 가운데 생존자는 로즈 기사를 포함하여 단 5명뿐이었다. 이런 까닭에 마르세유의 길 이름과 벨로드롬 스타디움 관중석에 로즈 기사의 이름을 붙인다.

미셸 세르, 투레트의 로즈 기사(1720년 9월 14일)
마르세유 페스트 때의 의사와 위생병 그리고 외과의사의 복장, 석판화, 구마르세유 박물관

 8월 8일부터 앵피르므리가 폭증하는 환자들을 더 이상 받아들일 수 없게 된다. 늘어나는 환자들을 감당할 수 없어 급히 9월에 성밖 변두리에 마이 병원을 새로 짓기 시작한다. 그리고 환자들의 피난처로 성밖 평지에 텐트를 설치한다. 대부분 의사들이 도망갔기 때문에 의사들도 부족하였다. 남아서 진료한 의사들도 방수포 복장을 했지만 페스트를 비껴가지 못한다. 9월 유자격 의사 13명 중 3명만 남게 된다. 외과의사는 한 달 만에 25명이 목숨을 잃고 9월 초 5명만 남는다. 의사 처방이 아무 효과도 없었지만 환자들은 치료를 받지 못하고 버림받았다고 여겼다. 한편 마르세유의 사제들은 대부분 헌신적으로 봉사하였다. 페스트 환자들한테 고해 성사와 종부 성사를 아끼지 않았다. 결국 마르세유 성직자들의 5분의 1에 해당하는 250여 명이 희생되었다. 그 중에 벨쟁스 주교의 영웅적인 행동은 유명하다. 그는 비단 수단을 걸치고 소매를 걷어올린 채 식초에 담근 스펀지를 코에다 붙이고 하인도 없이 온 시내를 누비고 다녔다. 적선을 베풀고 유족을 위로하고 죽어가는 이들의 고해를 들었다. 주교의 측근들이 대부분 희생되었지만 그는 살아남았다. 마르세유의 한 구역에 벨쟁스 주교 이름을 붙이고 19세기 중반 생트마리마죄르 성당 앞에 벨쟁스 주교의 조각상을 설치하였다.


 이제 3만의 희생자를 내었지만 페스트는 공격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길이란 길은 오물이며 감염된 가재도구 죽은 사람의 누더기로 가득 찬다. 이것들을 밟지 않고는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다. 길을 오가는 사람은 거의 없다. 길에는 잡초만이 무성히 자란다. 사람이 살지 않는 집에는 박쥐와 부엉이만 보인다. 음산한 정적만 흐르고 황량한 도시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아무도 없는 듯 지붕 위 굴뚝에서 연기마저 나오지 않는다.


          

[1] Nicolas Picatty de Croissante, Journal abrégé de ce qui s’est passé en la ville de Marseille depuis qu’elle est affligée de la contagion.

[2] Ruffié (J.), Sournia (J.-C.), Les épidémies dans l’histore de l’homme, Flammarion, 1995, p. 121.

[3] Françoise Hildesheimer, La terreur et la pitié, Publisud, 1990, p. 71.

[4] 다른 직종에 비해 쥐를 많이 끌어들이는 제빵사, 푸주한, 각 뜨는 사람의 희생이 컸다. 반면 쥐가 싫어하는 소리를 많이 내는 주물 제조업자, 대장장이, 통 제조공은 감염을 많이 비껴갔다.



    페스트는 이렇게 물러간다


 마침내 9월 중순 사망률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더 이상 올라 설 정상이 없다는 듯 페스트는 내리막길로 내려온다. 그러다가 9월 25일부터 사망자가 다시 늘어 하루 사망자가 4백 명에 이른다. 10월 초에는 2백 명 선이다가 중순에 가까워지면 50명 대로 뚝 떨어진다. 새로 감염되는 사람은 줄고 감염되어도 증세가 경미해서 "하루 이틀 열이 났다가 열이 사라지고 땀을 흠뻑 흘린 다음 회복되었다"[1].


 10월 15일 하루 사망자는 100명 정도이다가 18-20일에는 20명으로 떨어진다. 24일에 아마도 차가운 미스트랄(남프랑스 지방에서 북 또는 북서에서 지중해 쪽으로 부는 건조하고 차가운 바람) 때문인지 100명으로 다시 올라갔다가 금방 20명 대로 내려온다. 구시가지에서 새로운 감염자가 나오지 않아 전염병이 끝났다고 지레짐작한다. 11월 6-15일 사이에 사망자가 다시 50명까지 올라간다. 이게 페스트의 마지막 공격이었다. 그다음엔 하루에 많아야 두 명에서 여섯 명밖에 나오지 않는다. 그러다가 12월 중순에 감염자가 다시 늘고 재발되기도 하지만 회복되는 사람이 많은 것을 보면 페스트의 독성이 약해지고 면역이 생겼다고 볼 수 있다. 12월 말이면 하루 감염자가 서너 명쯤 생기지만 다 회복한다. 페스트가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지만 공포스러운 시기는 이렇게 막을 내린다. 


 1721년 1월 페스트 환자에 할당된 병원 부서가 사라진다. 페스트 전문 병원들도 하나둘씩 닫기 시작한다. 10월 27일에 콩발레상 병원, 12월 1일에 리브뇌브 병원이 닫는다. 1721년 2월에는 샤리테 병원도 더 이상 페스트 전문병원이 아니다. 마지막까지 환자를 수용했던 마이 병원은 1721년 7월에 해체된다. 


 이와 발맞추어 도시 정화가 이루어진다. 1720년 10월에는 적어도 거리에 버려진 시체는 치워진다. 청소를 하고 소독을 한다. 거리에 버려진 가재도구와 누더기를 불태우고 잡초를 제거한다. 광장이며 대로 그리고 항구를 소독한다. 감염된 가옥의 가구를 끓는 물로 소독하고 집안에 향료나 화약을 피우고 벽은 식초로 닦아낸다. 1721년 1월 8일에 시작한 가옥 정화는 100명이 투입되어 무려 6개월 걸려 끝난다.


 서서히 마르세유는 정상을 되찾는다. 마르세유가 되살아난다. 1720년 10월 20일 랑즈롱 사령관의 명령으로 그동안 금지되었던 저녁을 알리는 종소리를 다시 울린다. 그리고 사람들이 다시 바깥으로 나다니기 시작한다. 1721년에 들어서면서 장례식을 정상으로 치른다. 페스트 사망자 운반 수레가 아니라 보통 병으로 죽은 사람의 시신을 끌고 가는 예전의 영구차가 다시 선보인다. 1721년 8월 19일 마지막 페스트 환자가 입원한다. 그 이튿날 폐쇄되었던 성당들이 다시 문 연다.


 다른 한편 1720년 가을부터 페스트는 바로 주변 프로방스와 콩타 브네생 그리고 옆 지방인 랑그도크로 퍼져나갔다. 1721년 2월 페스트는 프로방스 지방 전체로 다 번졌다. 그렇지만 페스트의 변덕스러운 속성으로 어떤 지역은 희생자가 많이 나오고 다른 지역은 피해가 덜했다.


          

[1] 위의 책, p. 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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