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발적인 전염과 급작스러운 사망
은근슬쩍 시작되어 활화산처럼 폭발한다
전염병은 구시가지로 번져 6월 20일 처음 가난한 동네의 벨타블길에서 마리 도플랑이라는 50대 말 여자 한 명이 입술에 검은 딱지가 지면서 몇 시간 안에 죽었다. 첫 사망자가 발생하고 1주일 뒤 6월 28일 팔레 광장에서 고열로 45세의 미셀 크레스프라는 재단사가 희생되었다. 남편이 죽은 이튿날 친정으로 피신했던 38세의 그의 부인 안 뒤랑 역시 죽었다. 그리고 사흘 뒤 7월 1일 역시 에셸길의 가난한 동네에서 두 여자가 죽는데, 한 명은 검은 딱지가 지는 증세로 다른 한 명은 멍울이 생기면서 죽었다. 그리고 이 지역에서 집집마다 환자들이 죽어갔다.
가난한 동네부터 전염병이 돌았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이런 까닭인지 의사들은 페스트에 대해 영양분을 충분히 섭취할 것이라는 엉터리 처방을 쓴다. 아예 페스트는 신사들이 걸리는 병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의 병이라고 치부하였다. 페스트가 전염이 아닌 공기 오염에서 온다고 본 의사들(특히 몽펠리에에서 초빙된 의사들)처럼 보건국 검역관들도 다 이렇게 판단하였다. 페스트는 몹시 가난하여 음식물을 제대로 먹지 못해 영양실조에 걸린 사람들이 주로 걸리는 병이라고 생각하였다. 페스트가 사회계층을 선택해서 공격하지 않지만 결과적으로 희생자들은 대부분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마르세유 전체 희생자 5만 중 최상류층의 사망자는 천 명을 넘지 않았다. 더군다나 살아남은 가난한 사람들은 페스트가 끝난 다음 페스트 기간 동안 차용한 비용을 갚아야 했다.
페스트의 원인은 전혀 몰랐지만 드러나는 증세는 자세하게 알려져 있었다. 마르세유 페스트의 경우 여러 정황을 참조해 볼 때 림프샘종 패혈성 페스트이다. 특히 동방을 다녀온 사람이라면 퀭하게 고정된 시선에서 빛이 번득여서 멀리서도 페스트 환자를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고 한다.
7월 9일 장갈랑길에 사는 열서넛의 죽어가는 환자를 검진한 페소넬이라는 의사 부자는 "페스트입니다."하고 행정관들한테 보고하였다. 이튿날 이 아이는 죽고 그 누이가 병에 걸렸다. 바로 이 집 대문 앞에 보초를 배치하였다. 제1행정관 무스티에는 일반인들이 동요할까 보아 밤에 앵피르므리의 짐꾼을 불러다가 사망자와 환자를 집 바깥으로 끌어내려 들것으로 격리병원으로 운반시켰다. 그다음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게 하면서 보초들과 함께 무스티에는 이 집의 모든 가족을 다 격리병원으로 옮기는데 대동하였다. 그는 되돌아와서 이 집 대문을 회와 모레로 밀폐하도록 지시하였다. 이 집 가족은 아무도 살아남지 못했다. 시신은 생석회로 된 관에 넣어 매장하였다.
7월 10일 같은 길에서 부아이얄(세이드에서 하의 검역증을 받고 도착한 가브리엘 선장 배의 승객)이라는 남자가 정상적인 검역 기간보다 5-6일 앞당겨 앵피르므리에서 나온 지 며칠 되지 않아 겨드랑이에 혹이 생겨 죽었다. 이 경우도 마찬가지로 격리병원에서 생석회 관에 넣어 매장하였다. 그리고 이 사람과 접촉한 모든 사람들을 격리시켰다. 그 집 역시 밀폐되었다.
에셸길과 가까운 프레쇠르 광장의 헌 옷 장수 졸리 가족도 같은 증세로 전부 죽었다. 오라투아르길의 여자 재봉사 부쉬는 병에 걸리지만 용케 벗어났다. 하지만 그녀의 부모는 다 죽었다. 이 길에서 시카르 의사(아들)는 검은 딱지가 지고 굵은 멍울이 생기면서 악성 열병에 걸린 환자들을 여럿 접했다. 그 이튿날 이들은 죽고 이 길이나 바로 옆 길에서 같은 증세의 환자들을 목격하였다. 7월 18일 시카르 의사(아들)는 행정관들한테 페스트라고 보고하였다. 그런데 행정관들은 부종 외과의사한테 물어보겠다고 대답하였다. 부종은 환자와 멀찍이 떨어져 검진하고는 "기생충 열"이라고 진단하였다. 같은 동네에서 마찬가지 증세의 환자들을 여럿 왕진한 시카르 의사는 더 이상 행정관들한테 자신의 의견을 밝히지 않기로 하였다.
1720년 마르세유에 페스트가 발생했을 때 시 당국은 공식적으로 페스트라고 발표하기까지 한 달 이상 끌었다. 환자수가 가파르게 늘어나는데도 직접 페스트라고 하지 않고 "악성 열병" 또는 "페스트성 열병"이라고 얼버무렸다. 시체를 부검한 격리병원 의사들도 공식적으로 페스트라는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 고열에 피부가 검게 변하고 굵은 멍울이 지는데도 의사들은 어처구니없이 가난한 사람들이 제대로 영양섭취를 못해 나타나는 단순한 열병이라고 여겼다. 행정관들도 "페스트에 걸렸다."하고 말은 하면서도 지금까지 일어난 경우는 전염으로 인한 발병이 아니고 우발적인 사례라고 여겼다. 더군다나 도시 바깥에 위치한 앵피르므리 격리병원을 완전히 외부와 단절시키면 도시 전체가 보호되지 않을까 하는 위험천만의 판단을 하였다. 7월 15일 자 섭정 앞으로 보낸 공문에서 행정관들은 마르세유가 페스트에 걸리지 않았다고 프랑스와 유럽에 알리기 위해 시내와 철저하게 차단된 격리병원에서만 감염이 있을 뿐 시내는 전염병에서 안전하다고 보고한다. 7월 21일 자 섭정한테 보낸 보고에서도 마찬가지로 "우리 도시는 아무 일도 없습니다. 아무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1]하고 밝힌다. 7월 23일 하루 동안 14명의 환자들이 죽고 또 여러 명이 병에 걸렸는데도 그 이튿날 행정관들은 "16일 전부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2]고 밝힌다. 이렇게 많은 희생자가 나오자 행정관들은 여론에 떠밀려 다시 한번 부종과 페소넬한테 자문을 구했다. 부종은 영양실조로 인한 악성 열병이라고 답하고, 페소넬은 명백하게 페스트라고 진단 내렸다.
첫 희생자가 나타나고 한 달 이상 지난 7월 26일 마침내 당국자들은 페스트에 감염된 것처럼 환자들을 앵피르므리로 보내거나 즉시 자택에 감금 조치한다. 이튿날 환자 가운데 여덟 명이 죽는다. 이날 밤 제1행정관 무스티에는 격리병원의 일꾼들을 동원하여 시체들을 격리병원으로 운반시키고 생석회관에 넣어 매장한다. 이미 때는 늦어도 너무 늦었다.
7월 28일에서야 시청에서 처음 의사들과 외과의사들이 대책 모임을 갖는다. 여기서도 의견은 둘로 갈린다. 한쪽에서는 확실히 페스트라고 진단 내리는가 하면, 다른 쪽에서는 가난해서 생긴 페스트성 열병이라고 주장한다. 아무튼 행정관들은 다양한 의견은 존중할 테지만 현재 모든 병은 페스트라고 덧붙인다.
7월 29일 벨쟁스 주교가 소집한 성직자 회의에서도 병의 심각성을 인정한다. 생마르탱 신부는 성체의 빵과 성유를 줄 때 2,6미터 길이의 집게와 막대기를 사용할 것을 제안한다. 또 수도사나 수녀를 수도원에서 내보낼 수 있도록 허용한다. 행정당국과 합의하여 기도 행렬 행사를 중지한다.
7월 말 여건이 되는 시민들의 도피행이 줄을 잇는다. 아니면 생빅토르 수도원처럼 외부와 완전히 연락을 끊는다. 도망가거나 아니면 틀어박힌다. 31일 당국은 3천 명에 이르는 외지인 거지들한테 24시간 이내에 도시를 떠날 것을 명령한다. 아니면 샤리테 병원에 감금시켰다. 같은 날 프로방스 의회는 마르세유에 대해 봉쇄조치를 내린다.
에셸길에 페스트 환자들이 속출한다. 두통, 복통, 고열, 검은 딱지, 굵은 멍울, 사망. 이미 하루 사망자가 40-50명씩 나오기 시작한다.
8월 2일 저녁 9시에 시카르 의사 부자(나중에 이들도 도피한다.)의 조언에 따라 성벽을 따라 광장과 대로마다 그리고 모든 집 앞에다 페스트 전파를 막으려고 정화의 불을 놓았다. 마치 도시 전체가 거대한 불바다가 된 듯 불길이 치솟아 하늘을 붉게 물들였다. 땔나무가 없는 사람들은 가구를 가져오거나 문짝을 떼다가 불을 질렀다. 그 결과 제빵사한테 필요한 땔나무가 모자라게 되었다. 그리고 사흘 내리 오후 다섯 시에 창문을 닫고 전염병 초기에 환자가 입었던 옷이 놓였던 방마다 1온스의 유황을 태웠다. 이미 페스트가 퍼질 대로 퍼진 상태에서 뒤늦게 시 당국은 부랴부랴 방역조치를 취한다. 에셸길을 봉쇄하고 주민들을 감금시킨다. 보초를 세워 감시하고 가난한 사람들과 환자들한테 음식물을 배급한다. 의사와 외과의사한테 진료비를 받지 말 것을 명령한다. 초등학교와 중등학교를 폐교한다. 성당의 지하 묘소와 묘지에 페스트로 죽은 시신의 매장을 금지시킨다. 처음에는 행정관이 참관하여 밤중에 시체를 들것으로 앵피르므리로 운반하다가 8월 5일부터는 대낮에 사제도 동반하지 않은 채 보초가 대동하여 장의 일꾼들이 시체를 운반하였다.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힌 개인들이 목숨을 걸고 도시 탈출을 시도한다. 그렇지만 이미 성문들은 폐쇄되고 성밖 바깥으로 가는 길들도 차단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의 농가로 피신하고 어떤 사람들은 벌판이나 강가에 텐트를 치고 야영을 하였다. 도시를 둘러싼 언덕 꼭대기로 틀어박히는가 하면 동굴 속으로 숨거나 선박으로 피신하기도 하였다.
상거래가 멈춰지고 제조소가 문을 닫으면서 무더기로 생긴 실업자들은 거지가 된다. 게다가 은행 지폐만 넘쳐나고 현금은 나날이 구하기 힘들어진다. 페스트에서 살아나더라도 굶어 죽지 않을까 걱정한다. 페스트가 막 번지기 전 1720년 초반 마르세유에서 밀 공급 부족 사태가 일어났다. 이 사태의 원인은 실제로 밀이 제때 공급되지 않아서가 아니라 금융 위기에 따른 것이었다. 확실한 보증 장치 없이 로가 너무 시대를 앞질러 도입한 은행 지폐 시스템[3]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아 지폐 가치는 떨어지고 물가가 치솟으면서 구매력이 떨어져서 생긴 현상이었다. 재무장관이 된 로가 지폐 사용을 적극 독려하는 정책을 펼치지만 밀 수입업자들은 현금이 아닌 지폐로는 결제할 수 없었다. 시 당국에서도 밀을 구입하여 공급할 때 지폐로 지불해야 하는 강제 상황이 벌어졌다. 프로방스와 랑그도크 지방의 밀 농사 작황이 좋은데도 밀값이 치솟은 탓이다. "은행 지폐는 별로 쓸데없는 돈이었다. 종이 쪽 가지고는 밀도 가축도 기대할 수 없었다. 절대적으로 현금을 보내야만 되었다."하고 8월 8일에 지로 신부가 쓴다.
전염을 막는다고 가구나 환자나 죽은 사람의 헌 옷을 딴 데로 옮기지 못하게 해 보아야 소용없다. 페스트는 인정사정없이 더 넓게 퍼져나간다. 8월 9일이면 들것으로 시체를 운반할 수 없다. 시체 운반용 수레가 등장한다. 이제 하루 사망자가 백 명에 이른다.
8월 15일 몽펠리에에서 파견된 세 명의 의사들(섭정이 환자를 검진하고 진단하도록 몽펠리에 의대의 시쿠아노와 베르니 의사 그리고 외과의사 술리에를 보낸다.)[4]이 페스트라고 진단을 내려지만 시 당국은 3일 지나 "전염적인 악성 열병"이라고 발표한다.
이제 모든 환자나 시체를 앵피르므리에 다 받아들일 수 없다. 시체를 거리에 내다 버리기 시작한다. 온 가게들이 닫히면서 생선이나 고기를 점점 구하기 힘들어진다. 감염되어 죽을지도 모른 채 극빈층들은 시에서 나눠 준 지폐를 들고 빵 가게 앞에 벌떼처럼 몰려든다.
여건이 되는 사람들이 페스트를 피해 모두 달아난 마르세유는 황량해진다. 가게며 주택, 성당이며 수도원도 다 닫힌다. 광장은 텅텅 비고 길에는 가난한 사람들의 신음소리만 들린다. 항구도 폐쇄되었다. 이제 하루 사망자가 3백 명을 헤아린다.
더 이상 장례식도 정상적으로 치를 수 없다. 시신은 빈자와 부자의 구분 없이 수레에 실려와 공동 묘혈에 던져진다. 시체를 운반할 수레도 수레를 끌고 갈 장의 일꾼도 부족해지자 집안에서 시신을 썩힐 수 없어 밤에 시체를 길바닥에 마구 내다 버린다. 떠날 만한 사람들이 다 떠난 시내에는 하층민들만 남아 있다. 당국에서는 노략질이나 도둑질, 나아가 봉기를 막기 위해 가난한 사람들한테 생필품을 나눠준다. 집 안에서 누군가 증세를 보이기만 하면 환자를 버리고 각자 짐보따리를 싸들고 저마다 피난처를 찾아 집을 버리고 도망간다. 가족들도 두려운 나머지 거리를 두어서 외딴 방에 따로 버려진 환자는 보살핌을 받지 못한다. 목숨을 부지하려고 그저 침대가에 놓아준 물을 스스로 끌어다 마시고 방문 앞에 갖다 둔 수프를 제 손으로 찾아 먹어야 한다. 그리고 쓸쓸히 홀로 죽어간다. 아무도 돌보아 줄 사람이 없으니까 돈이 있어도 아무 소용없다. 죽음의 공포 앞에서는 가족 간의 유대마저 끊어진다. 길에서 신음하며 죽어가는 사람은 지나가는 사람한테 아무 관심을 끌지 못한다. 사람들은 전염이 될까 두려워 우선 환자를 피하고 본다. 이제 하루에 5백 명이 죽는다.
페스트는 구시가지 전역으로 퍼지면서 철저하게 격리된 갤리선이며 수도원까지 침투한다. 이제 더 이상 마르세유 시내에서는 피신할 데가 없다. 그저 신의 자비를 빌며 죽음을 기다릴 수밖에 없다. 페스트에 몰리고 가족한테 쫓기어 환자들이 수백 명씩 거리로 광장으로 몰려든다. 이제 거리는 환자들로 뒤덮인다. 길에서도 자리가 없어서 서로 몸에 몸을 맞대고 눕는다. 어떤 사람들은 병원으로 가기 전에 죽고 어떤 사람들은 병원으로 가다가 죽는다. 운이 좋아 병원에 들어가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집에서처럼 병원에서도 보살핌을 받지 못하고 내버려져 죽음을 맞는다. 병실을 차지한 극소수를 빼면 나머지는 아무런 도움이나 편의시설도 제공받지 못한다. 밤이면 성당 앞마당이나 광장 그리고 거리를 따라서 환자들이 널브러진 그 위에다 시체를 내던진다. 절망에 빠진 환자들은 장의 일꾼한테 자신들도 수레에 싣고 가달라고 애원한다. 매트나 매트리스, 이불 그리고 누더기 옷가지를 태우면서 악취가 온 도시에 퍼진다. 이제 하루에 천 명씩 죽어간다.
[1] 같은 책, p. 60.
[2] 같은 책.
[3] 자세한 정황을 알아보려면 "코로나 시대의 경제생활'을 보라.
[4] 중세 때부터 몽펠리에 의대는 파리 의대와 함께 프랑스 최고로 알려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