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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샤 pacha Feb 28. 2022

글쓰기, 글치기, 글누르기

    번역과 창작


디드로는 1743년 부친의 반대를 무릎쓰고 몰래 결혼한 다음 호구지책으로 영어 텍스트 번역을 통해 문학계에 데뷔한다. 괴테, 쉴레겔(August Schlegel) 같은 독일 낭만주의 작가나 프랑스의 낭만주의 작가 네르발도 마찬가지다. 이 작가들한테는 번역 작업이 창조 활동의 밑거름이 된다. 여담이지만 19세기 초까지 독일 작가들은 프랑스의 고전 작가들을 우러러 떠받들었다. 그만큼 유럽에서 당시 프랑스어와 프랑스 문학의 위세는 대단했다.


여러 언어를 통달한 괴테는 처음 호메로스의 작품을 5개 언어로 발췌 번역한 바 있다. 그 이후에도 영어 텍스트나 이탈리아어 텍스트의 번역과 함께 라신의 비극 [이피제니Iphigénie](1674)와 볼테르의 비극 [마호멧 Mahomet](1742)을 번역한다. 쉴레겔은 단테와 세르반테스의 작품을 번역한다. 


독일어 실력이 초보자인 네르발은 갓 스무 살이 되는 1828년 괴테의 [파우스트]를 번역한다. 네르발은 초판 번역을 두 번 더 손을 보아 출판한다. 두 번째는 운문으로 된 몇 대목을 산문으로 바꾼다. 세 번째는 두 번째 판본에서 운문시 부분을 더 수정한다. 낭만주의 작가들, 고티에, 뒤마, 위고 등은 네르발의 번역을 높이 평가하고, 베를리오즈는 네르발의 [파우스트] 번역본을 바탕으로 1829년 [파우스트의 여덟 장면]을 작곡한다. 1838년 괴테와의 대담을 출판한 책에서 에커만(Eckermann)은 괴테가 네르발의 번역을 높이 사면서 "독일어로 [파우스트]를 읽고 싶지 않다. 그런데 프랑스어판에서는 모든 게 신선하고 새롭고 에스프리가 되살아난다."하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밝힌다. 지금까지 프랑스어로된 [파우스트] 번역판은 총 83편에 이른다. 초기 번역이지만 네르발의 번역본은 유명세가 여전하다. 


작가가 되려면 번역부터 하고 볼 일이다. 너무 지나친 억측인가 ? 나도 번역한 책이 딱 한 권 있는데...


    협업과 다시 쓰기(collaboration et récriture)


엄청난 양의 작품을 남긴 작가를 볼 때면 어떻게 저 많은 양의 원고를 손으로 썼을까 하는 의문이 들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물론 뒤마(Alexandre Dumas)처럼 대필작가(nègre, 네르발도 한때 그의 네그르였다)를 여럿 거느리고 대량 제작한 경우도 있다. 아예, "뒤마와 일동들"이라는 표현을 쓴다. 오귀스트 마케(Auguste Maquet)가 우선 자료를 찾아 초벌 쓰기를 하면 뒤마는 거기에다 살을 붙여 서너 배 늘이는 식이었다.

  

옛날에는 원고를 여러 부 만드려면 원고를 베끼는 사람이 필요하였다. 빅토르 위고의 영원한 뮤즈 쥘리에트(Juliette Drouot)는 위고의 원고를 정서하는 일을 많이 맡았다. 쥘리에트는 어딜 가나 위고의 뒤를 그림자처럼 따라 다녔다. 위고의 여인이 되기 전 쥘리에트는 조각가 프라디에(James Pradier)의 모델이자 정부였다. 그 뒤 쥘리에트는 연극배우로서 무대에서 성공을 거두지 못하지만 위고의 연인으로 유명세를 타게 되었다. 바캉스 갈 때 부인 몰래 쥘리에트와 둘이 떠나지만 집에 부친 편지에는 위고는 늘 솔로다. 대표적인 경우가 1840년 쥘리에트와 둘이 다닌 라인강변 여행을 간 경우다. 편지형식을 띤 여행기 [라인강](1845)에서 여행자 화자는 늘 혼자다. 바캉스 간 곳에서 원고 정리(정서)를 도맡아한다. 영국령 게르네세섬의 유배 시절인 1864년 쥘리에트는 위고의 집에서 몇 발짝 떨어진 오트빌 페어리(Hauteville Fairy)에 이웃으로 그림자처럼 산다. 그런데 위고와 쥘리에트는 거의 붙어살다시피 하면서도 50년 동안 2만여 통의 편지를 주고받았다. 적당한 거리 유지는 정을 유지하는데 필수요건이다 ! 파리의 보쥬광장에 있는 빅토르 위고의 집 도서관에 가면 그들의 편지가 사랑의 퇴적물처럼 서가를 꽉 채우고 있다.


샹마르탱(Charles-Emile Callande de Champmartin :1797-1883), 1827년께의 쥘리에트. 샹마르탱은 들라크루아의 동창생이자 친구로 초상화가로 유명했다. 

쥘리에트는 1833년 포르트 생마르탱(Porte Saint-Martin) 극장에서 위고의 드라마 [뤼크레스 보르자 Lucrece Borgia]로 연극에 데뷔한다.


미술에서는 아틀리에의 공동제작이 널리 알려져 있다. 조각은 협업작업이 대부분이다. 회화에서도 제자나 협력자와 함께 작업하는 수가 많다. 대표적인 화가는 바로크의 대가일 뿐 아니라 서양 회화사에서 살아서도 죽어서도 엄청난 영예를 누리는 루벤스다. 루벤스는 협력자로 자신의 실력에 버금가는 시나이더스와 요르단스 그리고 반 다이크를 고용했다. 로댕도 협력자로 마이욜과 부르델, 폼퐁(Pompon) 같은 뛰어난 조각가를 협력자로 썼다. 


스탕달, 위고, 발자크, 네르발 같이 이미 발표된 자료를 무더기로 베끼는 기법을 쓰기도 한다. 그야말로 표절이라고 할 수 있을 작품이 적지 않다. 출처를 밝히면서 인용 형식을 따르기도 하지만 심지어 자신이 쓴 부분보다 인용 분량이 더 많은 작품도 있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란 없다. 걸작품이라는 것도 늘 그 모델이 있기 마련. 네르발은 [소금 밀매꾼들 Les Faux Saulniers]에서 아이러니한 톤으로 "희한한 이야기"의 원류로 거슬러 올라간다. 누구의 이야기는 누구의 이야기를 모방했고, 누구를 모방한 이야기는 또 누구의 이야기를 모방했는데... 계속 거슬러 올라가면 그 원천은 호메로스의 [오딧세이]다. 이 유머 넘치는 수사법과 내용 또한 선배 작가 노디에한테서 빌어온다.

 

 인용하든 베끼든 탁월한 작가의 손을 거치면 원작에 새 바람을 불어넣으면서 한층 수준 높은 새 작품으로 탈바꿈한다. 스탕달의 [이탈리아 연대기 Chroniques italiennes], 라마르틴의 [동방여행 Voyage en Orient], 위고의 [라인강 Le Rhin], 네르발의 [소금 밀매꾼들] 등이 대표적이다. 특히 여행기는 먼저 나온 여행기를 바탕으로 씌어져서 여행지 정보라든가 그 곳에 얽힌 일화가 되풀이 되는 수가 많다. 그래서 여행기에 유독 "이야기 속의 이야기"가 많이 끼어든다. 발표순으로 샤토브리앙의 [파리에서 예루살렘까지의 여정 Itinéraire de Paris à Jérusalem](1811), 라마르틴의 [동방여행](1835)이나 네르발의 [동방여행](1851)은 먼저 나온 여행기를 언급하거나 같은 일화를 재탕 삼탕으로 끼워넣는다. 대표적으로 레바논의 드뤼드교도들이 사는 지역에서 족장, 예언자, 마법사로 군림했던 레이디 스탄호프(Lady Stanhope : 1776-1839)에 얽힌 일화다.



    ***


 언제부터인가 샤프가 나오면서 연필을 덜 쓰게 되었다. 연필깎기가 생기자 칼로 연필을 다듬는 일도 추억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있다. 요즘 아이들은 칼로 연필을 깎는다는 사실조차 모른다. 나는 고등학교 시절까지 연필을 참 많이도 깎았다. 연필용 칼로 연필심을 둘러싸는 연한 향나무를 깎고 새카만 흑연 연필심을 끝이 뾰족하게 다듬었다. 뭉툭해지면 곧 바로 발그스레한 속살을 깎고 새까만 심을 갈았다. 못 쓰는 종이에 대고 칼로 심을 갈고 깎은 다음 흑연 가루를 바로 버려야 했다. 연필 깎는 일은 공부의 신성한 준비운동이었다. 대학생이 되면서 주로 볼펜과 만년필을 쓰면서 연필로 쓰는 일이 거의 사라졌다. 종이 위에 연필로 글을 쓸 때 사각사각하는 소리는 듣기 나쁘지 않다. 반면 좋은 자판이 나오기 전까지 컴퓨터 자판치는 소리는 몹시 귀에 거슬렸다. 화면을 눌러 쓰면서 자판칠 때처럼 소음이 나지 않아 좋다. 컴퓨터를 쓰기 시작하면서는 필기도구로 글 쓰는 일은 현격히 줄었다. 색이 나오면서 글자가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자판을 두들기면 기계적으로 가지런히 글자가 튀어나온다. 허트러짐이 없는 네모 반듯한 글씨가 귀신 같이 나타난다. 그렇지만 컴퓨터나 스마트폰 같은 기기가 있어야 하고 반드시 전원이 필요하다.


갈대끝을 날카롭게 깎은 칼람(calame)이라는 도구로 점토판에다 새발자국처럼 콕콕 찌르고 찍 그은 메소포타미아 지방의 쐐기문자, 붓이나 끌로 그림 그리듯 조각 하듯 모양새를 낸 이집트와 중국의 상형문자는 다 나름대로 조형미가 뛰어나다. 한글 역시 조형성이 뛰어난 글자임에 틀림없다. 수고본 책을 보면 로마자도 화려한 장식체는 글자 그 자체로도 모양새가 그럴 듯하다. 그림 그리듯 휘갈긴 초서체의 아랍 글씨를 보면 저걸 보고 어떻게 글을 읽을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먼저 생긴다. 지렁이가 제멋대로 그린 해독불가능한 지도 같다.


온갖 언어에 관심이 많던 괴테 선생님은 오리엔트쪽 시에 관심이 많아 아랍어 초서 쓰는 것까지 연습했다! 점토판에 파피루스에 양피지에 나무에 돌에 글씨를 썼다. 화강암에 글자를 파서 새기기도 했다. 참 놀랍게도 인류가 가장 먼저 사용한 점토판 자료가 그 뒤에 나온 파피루스나 양피지 보다 훨씬 많이 남아 있다는 사실이다. 현재 점토판 자료는 50만 개 가량 남아 있다. 점토판이 물에 젖으면 꽝이지만 불에 익으면 영원히 살아남는다! 점토판을 태블릿이라고 부르지 않는가?

 

새기는 행위는 알림과 동시에 남기는 행위다. 서구 언어에서 "쓰다"의 어원은 "칼로 나무에 새기다."에서 왔다. 글자의 발명은 문명의 시작이었다. 글자를 쓰기 전에는 말과 손짓으로 의사소통을 했듯이 글자의 사용은 손짓 소통과 연관이 있다. 사람들이 무리지어 도시를 만들고 생활이 복잡해지면서 규칙을 만든다. 생산량이 늘어나면서 계산하고 통계를 내려고 숫자를 사용하기 시작한다. 법규를 만들어 문자로 기록하고 통치수단으로 이용한다.


그 뒤로도 인류의 위대한 발명, 가령 인쇄술의 발명은 인간생활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인쇄술이 지식의 보급을 대중화 민주화하기에 이른다. 필사본 책을 가진 자만이 지식을 독점하던 시대가 끝나고 대량 생산이 쉬운 인쇄물을 통해 지식의 보급과 전달이 한결 빨라진다. 인간을 새로 발견했다는 르네상스 시절쯤 이야기다. 중세까지 수도원의 수도사들이 하던 가장 중요한 일과는 책을 베껴 수고본을 만드는 일이었다. 인쇄술이 나오기 전에는 어쩌면 수도원이 지식과 정보를 독점했을 수도 있다. 가끔 대중들한테 비밀이 퍼져나가지 않도록 책을 감금하거나 금서로 묶기도 했다. 움베르토 에코는 이런 주제로 [장미의 이름]이란 소설을 쓴다. 로마 카톨릭에서 인정하지 않는 외경이 여럿 있다. 자기네 교리에 어긋나면 가차없이 이단으로 몰아부친다.


인쇄술이 생겨나기 전에는 손으로 쓰고 그려 책을 만들었다. 책은 지식이나 정보를 담은 소중한 도구이기 이전에 아름다운 물건이었다. 형형색색으로 글씨를 쓰고 금박이며 번쩍이는 원색조의 삽화가 들어간 책은 분명 하나의 예술품에 가깝다. 샹티이성에 가면 오말 공작이 수집한 아름다운 책들을 볼 수 있다. 그의 멋진 서재를 보고 나서 책이 읽기 위한 것만이 아님을 깨달았다. 네르발의 [소금 밀매꾼들]에는 희귀본 고서 수집가 이야기가 몇 번 나온다. 책을 목숨처럼 지키는 도서관 사서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자신이 원하는 희귀본을 구하려는 책수집가 이야기다. 둘다 책 수집가인 둘도 없는 친구 사이에 문제의 책을 놓고 실랑이가 벌어진다. 친구의 서재에서 자신이 원하는 책을 보자 수집가는 환장하듯 달겨든다. 친구한테 자신이 가진 희귀본에다 제법 웃돈을 얹어 제의하지만 책 주인은 절대 내놓지 않는다. 결국 책 주인이 죽은 다음 경매를 통해 그 책을 손에 넣게 된다. 노디에의 마지막 소설 [프란치스쿠스 콜룸나]의 외부 이야기도 프란체스코 콜로나의 [폴리필리의 꿈] 초판본을 찾아 헤매는 고서 수집가 이야기이다.


나름 화면을 눌러 쓰는 장점도 많다. 필기도구를 통해 색이 칠해져야 문자가 되는 것보다 힘이 덜 든다. 잘못 쓴 글자나 오타도 쉽게 고쳐쓸 수 있다. 장소도 훨씬 덜 차지한다. 아니 장소랄 것도 없다. 종이도 필요없고 펼쳐둘 자리도 필요없다. 그저 스마트폰만 쥐면 언제 어디서든 글을 쓸 수 있다. 순서대로 쓰지 않고 아무 데나 끼워넣을 수도 있다.


출판사에서 교정쇄가 오면 발자크는 예를 들어 자전적인 [루이 랑베르 Louis Lambert]의 경우 열 번씩이나 내용을 고치고 추가하여 늘이는 작가였다. 반면 플로베르는 교정쇄에서 자신이 쓴 글을 계속해서 줄여 출판사로 보냈다. 원고를 늘이든 빼든 출판될 때까지 또는 다시 출판될 때도 수없이 고쳤다는 것은 분명하다. 좋은 판본의 고전문학 텍스트를 보면 너저분하다 할 정도로 이본이 주석에 많이 달려 있다. 이본이 많다는 것은 그 만큼 많이 고쳐 썼다는 뜻이다. 달리 보면 텍스트는 완성되어 고착된 게 아니라 늘 미완의 상태로 변화한다. 또 시대가 바뀌면 같은 텍스트를 받아들이는 방식도 바뀌어서 텍스트는 언제나 미완성이다.


또 스마트폰으로 글을 쓰면 남의 방해도 덜 받는다. 남이 글 쓴다는 느낌을 받지 않고 쓸 수가 있다. 저 양반이 문자 메시지를 보내는지 채팅을 하는지 알게 뭐람! 보관도 편리하다. 저장해서 갖고 있거나 이게 불안하면 메일로 보내 보관할 수도 있다. 전달 역시 한결 쉽다. 문자 메시지 메일 소셜 네트워크 등 다양하게 보낼 수 있다.


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우리네 습관도 거기에 맞춰 달라진다. 이젠 나도 자판으로 치는 것 만큼 화면 누르기에 익숙해졌다. 그러고 보면 습관은 참 무섭다. 기술변화에 따라 습관이 달라지고 소비양상이 바뀐다. 이제 문방구가 얼마나 필요하겠나. 서점들이 하나둘씩 자취를 감추 듯 훨씬 전부터 문방구점은 사라져가는 가게다. 언젠가 문방구는 필수품에서 장식품이나 사치품으로 변할지도 모른다. 이미 오래 전에 펜은 본디 쓰임새가 사라지고 그저 장식품처럼 되었다. 중학교 때 로마자 필기체 쓴다고 펜으로 연습하던 때가 아주 오랜 옛날은 아닌데 그렇게 되었다.

 

위고의 집에 전시된 잉크통과 펜

발자크가 쓰던 책상. 호두나무로 만든 16세기적 가구. 정말 소박하다.

"매일 밤 자정에 일어나 여덟 시까지 글을 쓰고, 15분 만에 점심을 먹고는 다섯 시까지 일하고, 저녁을 먹고 잠자리에 듭니다. 그리고 이튿날 다시 일을 시작합니다." 발자크의 집에 전시된 책상.


박물관으로 꾸며진 유명작가의 집을 가면 흔히 볼 수 있는 유품이 필기도구나 책상이다. 깃털펜이나 잉크통은 이제 옛 시절의 골동품으로 구경거리가 되었다. 파리의 보쥬광장 한켠에 있는 빅토르 위고의 집에 가면 위고의 부인 아델이 네 사람의 낭만주의 작가한테 선사받은 잉크통을 볼 수 있다. 라마르틴, 뒤마, 상드, 위고다. 오래 전에 주인의 손길이 닿지 않은 잉크통은 탁자에 화석처럼 달싹 붙어 있다. 뒤마와 위고가 쓰던 펜은 잉크통 앞에 납작 누워 있다. 주인의 손을 떠난 잉크통과 펜은 관람객의 시선도 제대로 끌지 못하는 그저 그렇고 그런 사물로 남았다. 만년필도 비슷한 길을 걷고 있다. 그 보다 나중에 등장한 볼펜은 아직은 제 기능을 잃지 않았다. 샤프의 출현으로 연필도 쓰임새가 많이 쪼그라들었다. 


화면을 눌러 쓰기도 하지만 목소리로도 쓸 수 있다. 예를 들어 [동방견문록]은 마르코 폴로가 감옥에서 말로 이야기한 것을 프로방스어로 옮겨적은 것이다. 이와는 성질이 다르긴 해도 손이 여의치 않으면 말로 글을 기록하면 된다. 글쓰기 도구는 점점 사라져 가고 손가락이나 음성을 통해 바로 글을 만들게 되었다. 화면 누르기는 모래 위나 흙 바닥에 손가락으로 직접 쓰던 방식의 변종이라 할 수 있을까. 한편 자판으로 치거나 화면으로 누르는 글쓰기는 한층 직접적 반사적인 작업이 된다. 필기도구로 손가락이 곱고 팔꿈치가 저리도록 힘들게 쓸 때보다 좋은 생각이 글로 옮겨지기 보다는 즉흥적 감각적인 글이 되기 쉽다. 곰삭은 글이 아니라 자칫 손끝에서 기계적으로 그려지는 얄팍한 생각의 전개가 될까 두렵다. 기술의 진화로 원하는 글씨를 마음대로 화면에 띄우고 인쇄할 수 있게 되었지만 좋은 생각을 글로 옮기는 일은 여전히 애를 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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