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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샤 pacha Mar 05. 2022

잃어버린 소리를 찾아서 1

지난 시절 좋아하던 팝송을 들으며 난 무척 행복해진다. 잊어버린 노래를 되찾고 그 시절을 떠올리는 일이 참 좋다. 노랫가락은 귀를 울리고 뇌리로 파고들어 가슴 한 구석을 적시며 손가락 끝까지 떨리는 전율을 일으킨다.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면 가슴 저리게 슬퍼지기도 가슴 뭉클한 감동을 느끼기도 한다. 이런 감동은 약 기운 퍼지듯 가슴을 뒤덮고 흘러넘쳐 뇌로 올라가 눈물까지 나게 한다.


공연 현장에서 느끼는 감동은 훨씬 직접적이라 흥분과 열광의 도가니가 되면서 실신하기도 한다. 록이나 헤비메탈 그룹의 공연 뮤직비디오를 보면 극성팬들은 신들린 듯 몸을 흔들고 귀청 찢어지도록 비명을 질러댄다. 청중이 지르는 괴성이 음악 소리를 먹어버린다. 이 괴성보다 더한 찬사가 어디 있겠는가! 감동을 주체할 길 없어 눈물을 펑펑 쏟고 무언가를 마구 흔들어대며 머리를 쥐어뜯고 옷을 벗어젖힌다. 몸을 부르르르 떨며 경기를 일으킨다.


비틀즈의 실황 뮤직 비디오를 보면 광적인 십대 팬들의 괴성은 가히 폭발적이다. 매미처럼 쉴 새 없이 울어대거나 제트기 날아가는 굉음을 낸다. 실황 가운데서도 특히 1964년 멜버른(Melbourne), 할리우드 보울(Hollywood Bowl), 워싱턴의 콜리세움(Coliseum), 1965년 뉴욕의 쉬어 스타디움(Shea stadium)의 공연 비디오를 보라. 춤추는 것만으로 북받치는 감정을 어찌할 수 없다. 넋나간 상태로 신들린 듯 손뼉을 치며 머리를 도리도리 흔든다. 너무 기쁜 나머지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발작적으로 팔을 흔들며 소리를 지르고 눈물을 펑펑 흘린다. 잠시도 엉덩이를 의자에 댈 수 없다. 좁은 자리에서도 펄쩍펄쩍 뛰어오른다. 그래도 어찌할 수 없어 무대로 돌진한다.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 나머지 경기를 일으키고 발작증세를 보이며 실신한다. 새로운 감성을 담아내는 에너지 넘치는 비틀즈의 연주와 노래에 화답하는 용솟음치는 환호성은 그 무엇으로도 잠재울 수 없다. 청중들은 담배나 술보다 마약을 하고 싶어 진다. 몸과 마음으로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이게 바로 소리가 주는 매력이다.


해마다 유월에 열리는 가렌느(La Garenne Colombes : 파리 서북쪽에 있는 작은 도시)의 축제날 볼테르 길과 시장터를 가득 메운 벼룩시장에서 잊어버린 옛날 물건들이 여기저기 불쑥불쑥 솟아났다. 벼룩시장에 가면 내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을 수 있을까? 그런데 좋아하는 음악을 들을 때면 이젠 희미하게 잊힌 과거가 거짓말처럼 되살아난다. 굳이 프루스트의 마들렌 일화에 견줄 필요는 없다. 이것은 청각보다 미각이 불러일으키는 무의식적 기억 현상이다. 네르발은 [실비 Sylvie]에서 "시골의 꽃다발 축제"라는 짤막한 신문 광고를 보고는 한 밤중에 파리 팔레 루아얄에서 마차를 타고 고향 마을 발루아(Valois)의 축제와 얽힌 과거로 바로 되돌아간다. 


"나는 여태 들고 있던 신문을 심드렁하게 훑어보았다. 그리고는 다음 두 줄을 읽게 되었다. 시골의 꽃다발 축제. 내일, 상리스의 궁사들이 루아지 궁사들한테 꽃다발을 반환할 예정. 극히 간략한 이 말을 접하자 아주 새로운 감흥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되살아났다. 그것은 아주 오래전에 잊혀버린 이 지방에 얽힌 추억이고 젊은 시절 참가했던 소박한 축제의 어슴푸레한 울림이었다". 


이건 읽기에서 촉발되는 무의식적 기억이다. 그보다는 네르발이 [소금 밀매꾼들]에서 상리스 대성당의 종소리를 듣고 루소를 떠올리는 것과 같다. 


"내가 상리스에 도착했을 때 축제가 한창이었다. 루소가 그렇게도 좋아한 멀리서 울려 퍼지는 종소리가 사방에서 울려왔다, (…)". 


이렇게 소리가 불러일으키는 환기는 참 희한하다.


송창식의 « 딩동댕 지난여름 »은 대번에 녹두 골목 어귀의 학사주점 탈의 시절로 되돌려 놓는다. 막걸리와 소주 냄새가 퀴퀴하게 착색된 뭉툭해진 앉은뱅이 나무 탁자를 숟가락으로 두들기며 노래 부르던 그 시절로! 289 종점을 생각하면 지금은 흔적 없이 사라진 신한 다방, 신한 다방의 홍차라고 나를 부르던 사장님이며, 디제이 아가씨와 광장서적, 광장서적 옆 곰돌이가 염주알처럼 엮여 떠오른다. 세월이 한참 흐른 뒤 제 집 드나들 듯했던 신한 다방 쪽으로 우연히 지나쳤다. 시대 흐름에 발맞추어 노래방으로 변해있었다. 그럴듯한 변신이었다. « 하얀 손수건 »은 감기를 끙끙 앓을 때 학교를 결석한 채 카세트로 참 많이 들었다. 감기 앓을 때 라디오에서 자주 흘러나왔던 프로콜 하럼(Procol Harum)의 A whiter shade of pale이나 박인희의 « 방랑자 »도 떠오른다. 일 년에 한 번씩 액땜하듯 꼭 겨울에서 봄으로 갈 즈음 감기로 앓아눕곤 했다. 내가 태어난 무렵이기도 하고 가장 두려워하는 철이기도 하다. 왠지 이 무렵에 죽지 않을까 하는 예감이 든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팝송 가운데 하나가 매리 홉킨의 Those were the days이다. 어떤 곡은 멜로디가 좋아서 어떤 곡은 기타 연주가 훌륭해서 아니면 가수의 목소리가 맘에 들어 좋아하지만 이 곡은 가사 내용이 그럴듯해서이다. 긴장감 넘치는 극적인 곡조도 서정성이 풍부하다. 애조 띤 첼로 반주는 멜랑콜리하다. 이 곡의 작사 작곡은 멜로디의 귀재 폴 매카트니. 매리 홉킨의 또 다른 히트곡인  Goodbye 역시 폴 매카트니의 작사, 작곡(원곡은 러시아 민요라고 한다.)이다. 파리의 메트로에서 이 노래를 들을 때면 참 묘한 감정이 북받쳐 오르곤 한다. 꼭 내 얘기 같잖아!


나이가 훌쩍 들어 오랜만에 젊은 시절의 친구를 단골 술집에서 다시 만난다. 외모는 다 변했어도 젊은 시절의 원대한 꿈은 여전히 진행형인 친구가 그 옛날 자신만만하게 온 세상이 제 것인 양 법석치던 시절과 하나 변함없이 술집 문을 밀치고 들어온다. 그 옛날의 원대한 꿈은 이뤄지지 않았지만 우린 늙고 말았네! 


울고 웃고 지지고 볶고 그저 그렇게 사라지는 게 보통사람의 삶. 나중에 알았지만 인생을 달관한 듯한 가사를 부른 가수는 젊디 젊은 열여덜의 아가씨였다.


하긴 알고 있던 곡만 듣는 것은 아니다. 같은 가수나 그룹의 몰랐던 노래를 새로 좋아하기도 한다. 예전엔 그다지 좋아하지 않던 그룹의 진면모를 재발견하기도 한다. 그 가운데 하나가 스콜피언스이다. 무엇보다 스콜피언스의 단순성이 맘에 든다. 리듬과 멜로디가 단순한데다 반복적이어서 귀에 쉽게 다가온다. 가사 또한 무척 단순하고 반복적이다. 게다가 멜로디는 감미롭고 발랄하며 경쾌하다. 하긴 이런 특징들은 대중음악에 공통된 속성이기도 하다.


무슨 까닭인지 나이들수록 점점 단순한 것을 더 좋아한다. 그림에서도 단순한 형태에 단순한 선을 보이는 호퍼나 리히텐스타인의 작품이나 기하학적이며 단순한 선과 원색으로 구현된 몬드리안의 추상화가 좋다. 문학작품에서 실험성이 강하고 기법이 복잡하며 모던한 작품을 무턱대고 뒤좇던 시절이 있었다. 조이스와 프루스트는 지금도 여전히 좋아하는 작가다. 이제는 단순한 이야기 구조에 소영웅적 주인공이 등장하는 스탕달의 작품을 좋아한다. 정열의 화신 줄리앙 소렐([적과 흑]의 주인공)이나 파브리스 델동고([파르므의 수도원]의 주인공) 같은 인물이 좋다. 용솟음치는 정열을 억누를 길 없어 죽음에 이르지만 넘을 수 없는 현실의 장벽에도 아랑곳 않고 돈키호테처럼 무모하게 적과 맞서 싸우다 실패하는 소영웅이 마음에 든다. 영웅이 사라진 시절 영웅을 꿈꾸다 비극적인 최후를 맞는 실패한 소영웅 이야기 말이다. 


돈키호테가 최초의 근대적인 주인공인 까닭은 바로 이런 면모를 맨 처음 드러낸 인물이어서이다. 현실 감각이라고는 전혀 없이 중세 시절의 전설적인 기사를 꿈꾸다 현실을 파악하지 못해 울지 못할 희비극이 벌어진다. 그리스의 신들은 못난이신 뛰어난 팬플룻 주자인 팬에서 계보가 끊어진다. 신이 영웅이 까마득한 그 옛날에 없어진지도 모르고 이상형을 좇아가는 시대착오적인 우리의 쪼그라던 소아적 영웅은 그 어디에도 발붙일 곳이 없다. 그저 외롭게 비극을 희극적으로 연기하다 파멸의 길을 걷는다. 


이젠 하다 못해 소영웅적 주인공도 찾아보기 힘들다. “우리의 일그러진 영웅” 쪽으로 추락해버렸다. 영웅 모방도 못하고 그저 으스대거나 깝죽대는 주먹 수준으로. 그래도 우리 시대는 끊임없이 람보처럼 초능력을 갖춘 영웅을 만들어낸다. 왜소해져버린 자신의 옛 모습을 되찾고 싶은 욕망이 그런 식으로 드러난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완벽하고 이상적인 몸에 초능력을 갖춘 신들이 현대판으로 다시 나타난다. 사람들은 늘 따르고 의지할 대리인이 필요하다. 그게 신이고 영웅이며 구세주이다.


무엇보다 스콜피언스가 새로 좋아진 것은 가수의 목소리 덕분이다. 고음까지 쉽게 올라가는 멜랑콜리한 음색은 매력이 넘친다. 음색이 맑고 따뜻하며 경쾌하고 정열적이다. 이 모든 요소보다 내가 반하는 것은 남유럽 사람 특유의 목소리에서 나는 금속성이다. 물론 스콜피언스의 가수 클라우스 마이네는 독일 사람이다. 이 금속성엔 차가움이 아니라 태양 같은 뜨거움이 배어 있다. 이를테면 이탈리아 가수 움베르토 토치, 토토 쿠투뇨, 에로스 라마조티의 목소리를 들어보라. 무슨 말인지 쉽게 이해가리라. 클라우스 마이네의 음색은 한편 맑고 가벼우며, 다른 한편 태양열에 후끈 달아오른 금속 표면이 내뿜는 끈적함이 스며 있다. 그의 노래를 들으면 삶의 환희가 느껴진다. 그 용솟음치는 힘과 금속성의 열기에서 아드레날린이 무한정 분비될 것 같다. 


나도 모르게 피카소의 [해변으로 내닫는 두 여인](1922, 파리 피카소 미술관)가 겹쳐 떠오른다. 이미지를 통해 보면 두 여인이 화면을 압도해서 큰 그림처럼 보이지만 아주 조그맣다(32,5 * 41,1 cm). 뭉게구름이 바다와 맞붙어 푸른 기운을 서로 주고 받는 해변 언덕을 혈기왕성한 두 연인이 욕망의 전차처럼 거세게 달려간다. 손을 맞잡고 바람에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젖가슴을 출렁이며 해변 향해 내달린다. 저 용솟음치는 에너지는 드넓고 넉넉한 바다가 아니면 도저히 포용할 수 없다. 온 몸의 열기가 사방으로 퍼져 온 세상이 후끈 달아오를 듯하다.


요즘 집을 나서 역으로 가며 스콜피언스를 즐겨 듣는다. 아침에 스콜피언스를 들으면 마음이 상쾌해지고 기분이 한결 좋아진다. Always somewhere, Holiday, Living for tomorrow, Still loving you... 


어떤 록 그룹의 경우 사운드에 비해 가수의 가창력이 못 미치는가 하면, 반대로 가수는 훌륭한데 연주가 못 따라가는 경우도 있다. 말할 것도 없이 둘 다 완벽한 조화를 이룬 전설적인 록 그룹들이 대중들의 우상이 된다. 나도 이런 불세출의 록 그룹을 좋아한다.


둘 다 너무 완벽한 ‘퀸’이 있다. 신이 내린 가창력을 자랑하는 프레디 머큐리의 보컬과 퀸의 사운드는 너무도 완벽하게 어우러져 털끝만치도 흠잡을 데가 없다. 유일한 흠이라면 이런 완벽성 때문에 흠잡을 데가 없다는 게 흠이라면 지나친 찬사일까. 이런 완벽한 조화에서 컴퓨터로 연주한 듯한 뭔지 모를 기계적인 느낌이 묻어난다고 하면 너무 큰 기대 때문일까. 폴리포닉한 완벽한 화음, 기타와 드럼, 피아노의 적당한 무게감에도 난 어쩔 수 없는 인공성을 느낀다. 이래서 퀸에 무조건 빠져들지 않는다. Bohemian rhapsody, Crazy little thing called love, Don't stop me now, Love of my 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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