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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국적 Aug 19. 2023

Training Fleas(훈련된 벼룩들)

집안 곳곳 세팅된 '지구촌 살리기'

집 보러 다니며 발품을 팔 때 챙겨봐야 할 곳들이 있다면 뭐가 있을까? 방향? 수압? 소음이나 낙후정도? 채광? 주변 환경? 무엇이 됐든 결론적으로 본인에게 맞는지 아닌지를 확인하는 것이 정답일 것이다. 그와 별개로 콘도 군데를 돌아다니다 보면 '싱가포르는 대략 집들이 이렇구나'라고 이미 어느 정도 비슷비슷하게 짜여 있는 설정값(default/디폴트 값)들이 있다. 물론 이곳의 환경이나 문화를 반영한 것이기도 하지만, 싱가포르 정부의 지향하는 바가 설계에 반영되어 있는 것들이라면 이해가 될까? 당신이 놓쳤을 수도 있는 작은 차이들, 그 이면에 있는 큰 그림이 대략 어떤 것인지 몇 가지 소개해 볼까 한다.




1. 절수를 위한 장치들


   - 싱크대 크기가 우리나라보다 훨씬 작다.

   - 세탁기가 대부분 드럼세탁기 타입이다(Top load 타입보다 드럼세탁기가 물을 훨씬 적게 사용한다)

   - 부엌/샤워기/수도꼭지 안에 절수용 필터내장

   - 식기세척기가 있는 곳이 별로 없다

   - 욕조가 점차 사라지고 샤워부스만 있다

   - 화장실변기는 대/소 버튼이 나뉘어있다

   - 세탁기 타입을 바꾸거나, 식기세척기를 추가 설치하기에는 공간이 부족하거나 배관공사가 필요한 곳이 대부분이다.

컵 몇개 쌓아두면 꽉찰것 같은 싱크대, 2구짜리 가스렌지, 빌트인으로 설계된 가전들
콘도에 따라서는 (맨오른쪽) 커피머신, 스티머,오븐등이 들어가 있거나 세탁기와 건조기가 2단으로 쌓여있는 곳도 있다

싱가포르는 옆나라인 말레이시아에서 물을 수입해 쓴다. 따라서 공항이나 쇼핑몰등에서도 흔히 목격할 수 있는 것이 화장실 변기의 대/소 버튼이나 수도꼭지가 센서타입 혹은 일정시간만 나올 수 있는 버튼 형식으로 되어있다. 이는 모두 절수를 유도하기 위한 장치들이다.

당연히 집(콘도)에도 해당된다. 집주인이야 마음에 안 들면 돈 많이 들여 레노베이션하면 그만이지만 임대해서 사용하는 세입자는 그대로 인도받아 사니 실상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다. 그렇다면 이 모든 설계는 사람들이 식기세척기를 덜 사용하는 추세여서? 빌트인이 유행이니까? 아니다. 유심히 살펴보면 집안 곳곳에 기승전 절수(물을 아끼기)를 위한 설계가 되어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모두가 수도세가 적게 나올까? 욕조가 없어도 여전히  물을 콸콸 나오도록 계속 틀어놔야 하는 사람들도 있기 마련, 꼭 그렇지는 않다. 다만 매일 욕조에 물을 채웠다가 버리는 것과 샤워하는 (내내 물을 틀어놓는다 한들) 것과는 사용량의 기준점부터가 달라지지 않겠는가



2. 배기량 조절을 위한 장치들


   - 부엌 환풍기는 외부로 연결되어있지 않다

      (환풍기는 싱크대 주변 열을 식힐 수 있으나 냄새나 연기가 외부로 빠지지 않는다)

   - 욕실 환풍기는 크기가 작거나 없으면 창문이 설치되어 있는 경우도 많다



3. 전기누전/화재방지를 위한 장치들


   - 욕실에는 대부분 전기 콘센트가 없다. (헤어드라이어나 면도기는 방에서 쓴다;;)

   - 집안내 모든 콘센트에 on/off 스위치가 있다

   - 누전이나 과부하가 생기면 바로 두꺼비집이 내려간다(전기 차단)

   - 가스레인지 보다 인덕션(IH)이나 열선이 늘어났다

   - 가전제품(특히 부엌) 에는 스위치로 꺼둘 수 있도록 되어있다.

모양이 다른 콘센트, 부엌의 스위치들

이밖에는 기후가 더우니 요리를 하는 횟수가 적어지고, 식량을 쟁여놓지 않기에 냉장고 사이즈가 우리나라 대비 작은 편이다. (쟁여놔야 식자재는 금방 상하기 마련이고, 자주 요리하기 힘든 맞벌이 부부도 많고, 손쉽고 저렴하게 사 먹는 호커 등 주변에 많다 등등 이유는 많다) 냉장고를 큰 것으로 바꾸려 해도 빌트인으로 딱 맞게 짜인 틀 안에서 같은 사이즈인 냉장고 내부 용량만 늘리는 게 쉽지는 않다.




한국에서 신혼살림으로 21Kg짜리 세탁기를 살까 한다길래 '업소용이야?! 아니면 이불 빨래를 매일해?' 하고 깜짝 놀라자 '언니, 한국에서 요즘 25kg짜리도 흔해'라는 말을 들었다(실은 약간 충격이긴 했다)

물론 한국은 싱가포르 보다 크다. 그러나 모든 집이 다 큰 것은 아니다. 콘도의 경우 싱가포르는 10kg 정도만 돼도 대용량 세탁기에 속한다. 물론 더 큰 세탁기도 판매하고 있긴 하나 미친듯한 가격이거나, 공간의 제약등 걸림돌이 많아 선뜻 구매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

예로 신축콘도의 경우 작게는 5kg부터 평균적으로 7-8kg 용량의 세탁기가 들어가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한국에서 쓰던 25킬로 용량 세탁기를 싱가포르에 가져왔다 한들 배치할 곳이 여의치 않아 애를 먹거나 이곳에 정해진 세팅대로 받아들이게 될 테니 정부의 빅픽쳐/의도 대로 갈 확률이 높을 것이다. 살기 좋은 지구촌을 위해 모두가 조금씩 양보해야 하는 것들(?)을 정책에 반영, 실천하게끔 유도하는 설계가 바람직하다는 것에는 매우 동의한다. 심지어 이 환경에 사는 것이 익숙해져 딱히 큰 용량을 원하지 않게 된다/불편함을 느끼지 못한 다는 점에서 교묘하게 스마트하네 싶기도 하다. 다만 의도치 않게 '병 속에 갇히는 벼룩'이 되는 것 같은 이 느낌이 명확하게 설명이 어렵다는 것뿐

벼룩효과?
점프능력이 뛰어난 벼룩을 일정 높이에 가뒀다가 일정시간 후 (마음껏 뛸 수 있게) 뚜껑을 열어도 두어도 실제 능력만큼 뛰지 못하고 정해진 높이를 넘지 못하는 것. 즉 길들여진 대로 제한을 두게 되어 본인의 역량을 스스로 제한하게 됨을 일컬음. 영어로 The Fleas effect 은 벼룩에 물린 후 나타나는 증상으로, Training fleas라는 표현이 가까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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