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싱가포르에 온 손님이랑 집을 보러 갈 때 빼먹지 않고 설명하는 몇 가지가 있는데
그중에 하나가 'Minor Repair(마이너 리페어) 조항이다. 이곳에 살면서 반드시 한번 정도는 겪고 넘어가야 하는 과정이지만, 본인들이 살던 나라와 조건/규정이 다르기에 한국어/일어로 만든 책자를 나눠주고 아무리 설명해도 납득 못하는 사람들도 꽤 있다. 특히나 해외가 처음인 사람들은 받아들이기까지 시간이 더 걸리기도 한다.
Fair wear and tear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낙후된 것을 말한다
Fair wear and tear is damage to the property caused by normal ageing and generally includes reasonable and ordinary use of the premises by the tenant. Reasonable and ordinary use would mean the deterioration in the condition of the premises and its fixtures and appliances from normal usage of them
Minor Repair
전구 등 소모품부터 시작해 하수구 막힘, 누수, 변기, 보일러, 가전제품의 고장 등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자연 낙후/노화로 인해 발생하는 수리는 세입자가 건당 $200(한화 20만 원 정도)을 지불해야 한다. 이는 어디까지나 평균 가격일 뿐 최소$150~$350까지 협상/개개의 계약에 따라 금액이 다르다. 예를 들어 방의 조명과 거실의 조명(전구)이 나갔을 경우 두 군데 이므로 2건으로 간주되어 마이너 리페어 한도액은 $400이 된다. 이는 곧 조명 2군데 고치는데 400불 미만일 경우 전액 세입자 부담이 된다는 뜻이다. 실제 수리 금액이 한도액을 초과할 경우 집주인한테 (사전에 통보하고) 승인만 받는 다면 총액이 얼마가 됐던 나머지 차액은 집주인이 부담하게 된다라는 것이 주요 골자이다
(점검) 출장비 시간당 16만 2700원
삼성 LG 등 이제는 세계적인 브랜드가 되어 버린 한국 가전은 싱가포르에서도 가격이 좀 비싼 편에 해당한다. 저렴한 듣보잡 브랜드들도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지만 중요한 건 이 나라에서는 모든 게 '수입'이라는 것. 직접 제조되는 제품이 없기에 고장이 나면 기술적인 면에도 한계가 있고, 땅값 비싼 이 나라에서 부품 재고 창고를 갖는 경우도 많지 않으니 수리를 해야 할 경우 한국에서 처럼 빠르고 속 시원한 대응을 기대하기란 쉽지 않다. 한 예로 가격은 다소 올라가지만 잔고장 없이 오래 쓸 수 있다 알려진 독일 제품. 싱가포르의 조건에 사용이 적합하지 않아 간혹 세탁세제만 잘못 써도 고장이 나기도 한다. 높은 습도 기온 덕에 민감해지는 걸까.
M사 제품의 경우 업자 출장비만 시간당 $165(대략 한화 16만 2700원)
기본 제품 자체도 비싸지만 부품 가격 또한 만만치 않아 양문형 도어 냉장고 일 경우 고무패킹이 헐거워져도 부품만 바꿀 수 없고, 패킹 포함 문 한쪽 바꿀라치면 약 $2000 정도이다. 그뿐인가. 만약 부품 재고가 싱가포르에 없다 치면 '독일에서 부품 수입해서 들어오는데 대략 2주에서 3 개월 걸릴 거야'라고 시크한 대답이 돌아온다. (코로나 직후 국경이 닫혔을 땐 반년 혹은 그 이상 걸릴 거라는 경우도 있었다!)
평균기온 30도인 나라에서 '냉장고 없이 3개월은 말이 안 되지! 그럼 그 사이에는 어쩌라고?!' 싶지만 이런 일은 생각 외로 자주 일어나기도 한다. 대안으로 새로운 제품으로 교체한다 해도 주문에서 배달까지 최소 3일
기존에 쓰던 고장 난 제품 폐기는 업자를 따로 부르거나 추가 비용도 내야 하고, 빌트인 가전일 경우 기존 것과 딱 치수가 맞아떨어지는 게 가령 '수입 중지된 모델'이라는 등 사이즈가 맞는 걸 찾지 못해 헤매게 되다면..? 최소 일주일간 냉장고 없이 말 그대로 "다~이 래~!(Die Leh~)"가 된다.
***'죽을지도 몰라 라는 싱글리쉬
냉장고안 선반에 금이 가도록 가득가득 채워쓰신 손님대신 선반3개교체하는데 350불(한화 34만원) 그나마도 배달시키면 추가되기에 직접 가서 픽업하고 $150을 아껴 이 가격인 것이다.
집주인이 초과금액에 대해 지불하기로 하고 바로 새로 주문했으나 배송업체 사정으로 늦어진다 할지언정 집주인은 할 도리를 한 걸로 간주되어 계약위반이 되지는 않는다. 배송업자의 일정까지 집주인이 책임질 수 있는 범위는 아니기에 도리가 없다. 양측 계약자 간 할 도리를 다했다는데 제삼자인 중개인이 나서서 해줄 수 있는 일이라고는 기껏해야 '매우, 최선을 다해' 집주인 중개인을 쪼아대고 중개인은 집주인을, 집주인은 배송업체를 재촉하는 것이 전부이다.
한화 20만 원짜리 워터 히터 (온수기) 스위치 커버 사정이 이렇다 보니 계약서상의 수리비 관련 조항은 '특약'으로서 추가하지 않고 애초에 계약서마다 필수로 들어가 있는 조항이다. 만약 이런 조항이 없이 수리비용의 부담비율을 그때그때 정하기로 되어있고, 수리비가 $2000 정도 나왔다면, 5:5로 낸다 해도 $1000을 세입자가 내야 한다. 오히려 $200로 정해져 있기에 총 수리비용이 천이든 이천이든 세입자는 일정 금액만 부담하면 되는 것이고, 결론적으로는 세입자를 보호하기 위한 조항으로 볼 수 있다. 물론. 의도는 보호 차원이라고 하나 세입자 입장에서 가능하다면 지불거부하고 싶은 가격인 건 사실이다.
한국에는 민법으로 정해져 있는 내용이 있다. '수익에 필요한 상태'라는 게 잘 이해는 안 가지만
민법 제623조
임대인의 의무를 말하는 내용으로 임대인은 목적물(어떤 행위의 목표가 되는 물건)을 임차인에게 인도한 다음 계약을 존속 기간에 사용하거나 수익에 필요한 상태를 유지할 의무를 지게 된다.
법적으로 집주인은 세입자가 지내는데 '불편함 없이 정상적인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라는 게 전제라 고한다.
위와 같은 민법의 내용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던 사람이 전혀 다른 룰이 적용되는 싱가포르에서 문제가 생기면 매번 '이런 건 집주인이 당연히 해줘야 하는 거 아닌가요?' 하게 되는 건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대부분의 싱가포리언들은 자가일 경우 모든 걸 부담하거나, 임대일 경우 마이너 리페어 금액 이상이 아니고서는 집주인에게 얘기도 안 하고 알아서 고치는 2가지 선택지 밖에 가져본 적이 없다. 임대계약에서도 '당연히 집주인이' 같은 발상을 갖기는 어려운 그들로선 '집주인이 가서 일부러 고장 낸 것도 아니고, 노후/낙후로 인해 고장 난 건데 왜 그게 당연하게 집주인 부담이냐'라고 물어오거나, 심지어 '네 손님(임대인)은 집주인한테 왜 이렇게 바라는 게 많냐', '세입자 관리 제대로 해라'등 항의 아닌 항의를 듣기도 한다.
임대인/ 임차인도 수리에 대해서는 어느 쪽도 부담하기 싫어하는 입장이다 보니 가운데서 누군가는 공정하게 판단할 수 있어야 하는데 수리업체, 전문가의 숫자가 늘면 늘수록 공통된 의견은커녕 저마다 다른 의견이 나와서 사용상 과실인지 아닌지 명확히 나뉘지 않는 경우도 많다. 우리나라에선 시시비비를 가려줄 믿을만한 전문성 겸비한 수리업체 도 있고, 정해진 법대로 이행하느냐 마느냐의 문제에, 판결 사례까지 참고할 수 있는데 비해 이곳에서는 서로 다른 인식을 갖고 있는 데다 언어문제까지 추가되니 행여라도 이런 문제가 생긴다면 돈은 돈대로 뜯기고, 마음의 상처를 입는 건 피하기가 힘들다.
단 이 모든 것은 살면서 발생하는 자연/정상적인 낙후(Fair Wear and Tear)에 해당할 경우이고, 고의적까지는 아니어도 일부 세입자의 과실이나 관리소홀로 판단되면 마이너리페어도 적용이 안된다.
결론적으로는 안타까운 얘기지만 두 달 월세(2년 계약의 경우)에 해당하는 보증금을 쥐고 있는 집주인이 강하게 주장을 해오면 조그마한 흠집이 생겨도 몇천 불이 휙 날아갈 수도 있는 얘기가 되고 마는 것이다. 입주하고 첫 한 달은 보증기간(Grace Period, 1 month Warranty)이 있어 수리가 필요한 곳은 집주인 부담으로 수리를 하지만, 두 번째 달 이후에 발생한 거의 대부분의 수리는 마이너 리페어에 해당한다. 따라서 마이너리페어에 해당하는 조항이 무엇이 있는지 계약서 사인 전에 꼼꼼히 살펴볼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