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만나 인사를 나누고 집을 보여주는 그 순간부터 나와 손님의 관계는 시작된다. 가족들과 함께 오는 사람들도 꽤 있으니 간혹 어린 자녀를 데리고 올 때면 나는 매물 안내 대신 Nanny가 되어야 할 때도 있다. 아이들은 수영장이나 놀이터를 보면 본능적으로 뛰어다니고 싶고, 부모들은 애들 쫓느라 정신이 없으니 좀 더 집중해서 집을 고르라는 배려 차원에서 부모를 대신해 아이들과 놀아주는 것이다.
덥고 습한 싱가포르에서 낮시간에 집을 보러 다닐 때면 더위에 지친 3-4세의 아이들은 이동 중에 잠이 들기 마련이고 잠든 아이를 차 안에 혼자 둘 수 없으니 부모 대신 아기와 차에 남아있다거나, 애들 손을 잡고 걸어 다니거나, 어른들은 집을 보게 하고 아이와 수영장 근처에 놀아주기도 한다. 다행히 나는 아이들을 좋아하니 이런 건 전혀 귀챦지가 않다. 돌아다니다가 부모님 손 뿌리치고 내 손을 잡으려고 뻗쳐오는 고사리 같은 손을 볼 때면 심쿵할 정도랄까. 그래, 여기까지는 괜찮다. 간혹 내 품에서 아기가 잠이 들어서 옴짝달싹 못하는 꼼짝 마 신세가 되거나, 물놀이받아주다 내 옷이 흠뻑 젖은 채로 다음 약속 장소로 이동해야 하게 된다한들 아직 친절해질 수 있다. 그들(아이들)이 기대한 게 아닌 내 선택이니까.
내가 손님에게 조금 덜 친절해지고 싶은 순간이 가끔 있는데 본인들 스스로도 충분히 해결할 수 있을 성
싶은 것, 실제 내 업무와 크게 상관없는 것 들을 시도 때도 없이 물어올 때이다.
분명 모두가 물리적인 어른인데 Nanny 가 되어 하나하나 챙겨야 하나 싶은 기분이 든달까
"(에어컨이 원인인 것 같은데) 천장이며 벽이며 곰팡이가 슬었습니다. 주말에 청소를 해도 되나요?"
"콘도 안에 자전거를 세워둘 곳이 있을까요? 위치는 어디 있을까요?"
"전기세가 너무 많이 나옵니다. SP(싱가포르 파워의 약자)에 물어봐주실 수 있나요?"
"조명에 리모컨이 있나요?"
"세탁기 매뉴얼은 있는데 이해가 안 돼서요. 언제 저희 집에 들러서 설명해주실 수 있나요?"부터
'부엌 환풍기의 필터를 인터넷에서 주문했는데 교체 방법을 모르겠어요.
저는 XX일, XX일 몇 시에 가능합니다 확인 부탁드립니다'
'우편함이 잠기지 않아서 교체를 해야 할 것 같은데, 사람 부르려니 돈이 너무 많이 드네요.
혹시 교체해주실 수 있나요? XX일 XX시경이면 집에 있을 것 같습니다.'
등 심지어 부탁도 아닌 '마치 우리가 당연히 해야 할 것같이' 말하는 사람들도 개중에는 존재한다.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덕분에 나는 필터교체나 우편함 열쇠를 교체하는 법을 터득하게 되기도한다.
물론 그들로서는 나에게 '(본인들 기준의) 그저 작고 소소한 친절'을 기대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해외도 모르고, 이것저것 할 줄도 모르고, 난 모르니까'로 일관하며 '모름'을 앞세우고
생각도 못했던(?) 친절 베풀기 위해 본분에 충실해야 할 시간, 밥 먹을 시간마저 쪼개야 하는 나에게
'그깟 작은 친절 하나 베풀어주지 못하냐'며 되려 빈정 상해하거나 불만을 토로해올 때면 정말이지
'모르는 게 자랑도 아니고, 제 할 일 다 제쳐두고 도울 수가 없어서요' 내지는
'싱가포르 N연차면 좀 더 적응하셔도 되지 않을까요' 하고 되받아치고 싶어 진다.
그렇다, 같은 사이즈라 해도 받을 때는 작게 느껴지고, 내가 베풀어야 할 때는 크게 느껴지는 게
사람 마음이다.
손님들이 몰라서 그런 거라고 스스로에게 되뇌며 도와주려고 하다가도 문득
'그냥 아래층에 내려가서 자전거 어디다 세우는지 찾아보면 되지 않나..?'
'본인 집 청소해도 되는지를 왜 나한테 묻.. 지..?'
'영어라 모르겠으면 번역기를 써야지 싱가포르에 수입되는 모든 세탁기의 사용법을.. 설마 내가
다 알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나에게도 영어는 외국어인데..?!'같은 의문이 훅 치고 올라올 때면
그들이 기대하는 부동산/중개인이라는 건 대체 뭐하는 존재 인가 싶은 현타가 오기도 한다.
그런 과정을 반복하며 깨닫게 된 게 있다면-
모든 사람이 모든 걸 본인이 할 줄 알아야 한다고, (적어도) 알고는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모든 사람이 웬만한 건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서비스의 내용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 채 본인들의 기대치로 요구를 해오는 경우가 꽤 많다 는 것이다.
세입자 입주당일 : 의자와 커피테이블 조립했던 어느날 일부 가구 판매 사이트는 제품 외에도 배달비와 제품 조립비가 추가로 청구되기도 한다.
집주인은 조립비 부담을 거부하고, 세입자는 조립을 할 생각이 없으면 당연한 듯 책임은 중개인에게 전가되기 일쑤다. 물론 중개인의 할 일도 책임도 아니나 밤새 책임소재 운운하기보단 Nanny 됬다셈치고 해결하는 게 건강에 이롭다. 그렇게 우리는 '왜 이걸 직접 해볼 생각은 못하는 걸까?' '조립된 완제품을 전달해야 한다는 개념이 없나? 거참 신기하네..'하며 집주인 중개인과 머리 맞대고 가구 조립을 하기도 한다.
많은 사람을 만나 이런 집주인도 있고, 저런 세입자도 있다는 걸 인식할 뿐 중개인 역시 그들을 모두 이해하는 것은 아니란 건 사람들은 잘 모른다.
*집을 계약할 때 중개수수료를 임대인/인차인 양쪽으로부터 받을 수 없게 되어있는 싱가포르에서는
경우에 따라 한건의 계약에 두 명 혹은 그 이상의 중개인이 연계되기도 한다. 손님이 빌려주는 쪽이면 집주인 측 중개인이 되고 세를 들어 사는 사람이 손님이라면 세입자 측 중개인이 되는 것이다. 즉, 중개인의 손님이 누구인가에 따라 중개인 측의 입장이 결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