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8시쯤 출동 벨이 울렸다. 여학생이 숨을 제대로 못 쉬고 있다는 신고였다. 출동 중에 전화를 걸어 현장 상황을 들어보니 '과호흡(주로 정신적 스트레스로 체내의 이산화탄소가 과도하게 배출되어 생기는 호흡곤란)' 증상인 듯했다. 어떤 이유로 감당할 수 없는 정도의 스트레스를 받은 학생에게 갑작스러운 호흡곤란이 왔을 거라고 짐작하며 출동했다.
현장에 도착해보니 학생은 울면서 힘겹게 호흡을 하고 있었다. 해줄 수 있는 건 '호흡 조절'과 '감정 조절'이었다. 호흡 조절은 상황 정리와 감정 조절이 가능해야 비로소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아직 상황 파악이 되지 않은 우리로써는, 혹시나 부모님이 원인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부모님을 다른 방으로 모시고 들어갔다. 그리고 천천히 호흡하도록 유도했다. 구급대원이지만 낯선 사람들이 3명이나 지켜보고 있는 것이 여학생에게는 부담스러울 수도 있다는 생각에 같이 출동했던 대원들을 물러나게 했고, 나와 여학생은 조용히 있을 수 있게 되었다. 한결 편해진 듯한 표정을 보인 학생은 호흡이 점점 편안해지고 눈물이 잦아드는 게 보였다. 대화가 가능하게 되었을 때, 나는 학생이 갑작스럽게 과다한 스트레스를 받을 수 있는 원인을 몇 가지 추측해서 물어보았다. 다행히 부모님이 그 원인은 아니었다. 친구사이가 틀어져서 학교에서 친구를 보는 것이 너무 부담스럽다고 했다. 학교 가기 전날 저녁부터 스트레스를 받기 시작했고, 아침이 되니 스트레스가 극에 달했다고 한다. 그러더니 갑자기 숨이 가팔라졌다고 했다. 친구와 어떤 오해가 생겼고, 자존심 때문에 그 오해를 방치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고 자신이 가장 친하다고 생각한 그 친구와는 이제 인사도 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 친구는 주변에 친구가 많았지만 자신은 그 친구가 없으면 학교에서 거의 혼자서 지내야 한다고 했다.
난 학생을 진정시킨 후 학생의 부모님에게 오늘은 학교를 좀 쉬게 하고, 맛있는 것도 먹고, 학생이 마음속에 있는 말을 할 때까지 좀 기다려주시라고 말씀드리고 현장을 벗어났다.
학창 시절에는 학교가 그들에게는 세상 전부인 듯 느껴진다. 그래서 교실 내에서의 친구들과의 조그마한 관계가 그들에게는 신기루처럼 커 보이고, 그 관계가 틀어지면 세상이 무너진 거 같은 느낌이 든다. 난 성인이 되었지만 그 여학생 나이 때의 내가 친구들 사이의 문제로 어떤 일을 겪었었는지 또렷하게 기억이 난다. 거의 20년이 지난 일임에도 이렇게 기억이 난다는 건 그때의 내가 얼마나 짙은 고뇌를 느꼈었는지를 반증해 주는 거 같기도 하다. 사회에 나가서도 우리는 대인관계를 끊을 수가 없다. 사람과의 관계는 속세를 떠나서 혼자 산에 들어가든지 또는 섬에 들어가서 살지 않고서는 죽을 때까지 지속된다. 그러한 관계는 인간에게 있어서는 양날의 검인 듯하다. 사람 때문에 힘들고, 사람 때문에 힘을 얻기 때문이다. 하지만최근 뉴스나 책 등을 보면 대인 관계로부터 받는 스트레스가 대인관계가 주는 힘보다 더 큰 듯하다. 대부분 F.I.R.E족의 경제적 조기 퇴직의 이유도 인간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피하기 위함도 큰 몫을 하는 듯하다.
나 또한 직장생활을 14~15년째 하고 있지만 사람 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쉽게 피할 수가 없다. 그리고 여전히 쉽게 적응이 되지 않는다. 사람으로부터 받는 정신적 고통은 일순간 날카로운 도구로 찌르는 것 같은 고통을 주기도 하고, 약의 중독처럼 서서히 사람을 무너뜨리기도 한다.
후자의 정신적 힘듦은 서서히 시작되어서 조금씩 조금씩 나를 갉아먹는다. 상대방에 대한 원망으로 시작되어서 결국 그 원망이 나를 향하게 된다. 그 시점이 되면 조금씩 조금씩 스스로를 망가뜨리게 되는 것이다.
어른들도 컨트롤이 쉽지 않은 대인관계인데 예민한 사춘기 애들에게는 얼마나 더 크게 그 고통이 다가왔을지는 충분히 예상이 되고도 남는다.
짧은 인생이지만 살아보니 '다 내 맘 같지 않더라'라는 말이 와닿는 순간이 일 년에 몇 번씩은 있었던 거 같다.
어떤 타이밍을 놓치면 나를 둘러싼 어떤 것에도 변명과 설명이 힘들어진다. 사람은 타인의 일에는 관대하지만 스스로 에게는 성균관 유학생들처럼 엄격하다. 도덕적이어야 하며, 좋은 사람이어야 하고, 밝은 사람이어야 한다. 또 누군가의 부탁을 거절하는 방법을 모른다. 그래서 내가 조금이라도 나의 진심 어린 말을 쏟아내면,
'굳이 왜 지금 와서 저런 말을 하는 거지?', '별것도 아닌데 왜 저러는 거야?'
라고 타인이 생각할 것이라고 짐작한다. 마음이 힘들어지면 조금씩 나를 둘러싼 세상은 좁아진다. 그래서 시야마저 좁아진다. 그렇게 좌우가 보이지 않는 좁은 세상에 갇히게 된다. 나를 둘러싼 모든 세상이 나의 잘못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느낌이 든다. 스스로를 그의 생각에 가두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저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드물다. 나 또한 누군가가 어렵게 어떤 말을 꺼내면
'그동안 맘고생 많이 했겠다.'의 생각이 먼저 떠오른다. '왜 저렇게 소심해?'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사람은 그렇게 생각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느 정도 세상을 경험해보면 사소한 것들이 사람을 다치게 한다는 것쯤은 자연스레 알게 된다. 혹여나 누군가의 마음에 상처를 내는 일들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심지어 자신이 그러고 있다는 것을 인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어떤 종류의 사람을 만나든지 애써 나의 마음을 다른 사람들의 생각에 맞춰 숨길 필요는 없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은 갑작스럽게 자신을 비난하는 말을 듣거나 황당한 말을 들으면 그 뒤에 할 말이 순간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동안 만났던 많은 사람들이 그런 이야기를 했다.
'누군가랑 대화하는데 할 말이 생각이 나지 않더라'라고
그리고 그 상황이 끝난 후에
'내가 왜 그런 소릴 듣고 있었지?" 또는 ' 아 그렇게 받아칠걸'하며 하지 못했던 유수와 같은 말들이 머릿속을 맴돈다. 상대방의 말을 얼마든지 받아낼 만한 상황이었거나, 그렇게 비난을 들을만한 일들이 아니었다는 것을 늦게 깨닫는 것이다.
하지만 또 나에게 뭐라 했던 그 사람의 얼굴을 보고 생각해 냈던 그 말을 돌려줄 용기가 나지 않는다. 아마 다시 또 비슷한 소리를 들으면 또 할 말이 없어질 거 같다는 두려움 때문일 것이다.
난 누군가와의 마찰도 그들이 나에게 건네는 일종의 대화라고 생각한다.
대화를 하는데 상대방을 굳이 이길 이유도, 그리고 상대방을 욕보일 필요도 없는 것이다.
상대방이 흥분을 하고 있으면 흥분 가라앉히라고 말해보고,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에 대해 물어보자
또는 상대방이 차분하게 말을 하고 있으면, 그의 말에 귀를 기울여보고, 그의 말이 다 끝나고 나의 생각을 천천히 말해보자. 급함은 차분함으로 흥분은 냉정함으로 대처해야 한다. 차분함은 사실로 다루면 될 일이다.
그래서 내가 아니었음을 깨닫는다면 그걸로 된 것이다. 오해를 푼 것이고, 인정하면 된다.
누군가와의 대화가 껄끄럽게 끝났다고 해서 그 사람과의 관계가 끝난 것이 아니며,
설령 그렇게 끝난 대화를 끝으로 사이가 나아지지 않는다면, 그 관계는 큰 의미가 없는 관계다. 직장에서든 밖의 관계에서든 말이다. 우린 살면서 수없이 많은 사람을 만나고, 그중에서 진정한 인연은 큰 노력 없이도 맺어진다. 그 지나가는 인연 때문에 감정을 태우지 말자. 나의 감정은 소중한 사람들을 위해 남겨두자.
사람과의 관계는 중요하다. 하지만 중요한 무언가를 잡기 위해 하는 노력은 그것을 오히려 더 멀어지게 할 수도 있다. 모든 관계는 힘을 빼야 하는 거 같다. 지나친 관심도, 지나친 경계도, 선입견도 누군가에 대한 벽을 만드는 공사의 시작인 것이다.
자주 나를 돌아보는 습관을 가지자 그러면 내가 객관적으로 보일 것이다. 그리고 '확신의 힘'을 기르자.
'확신의 힘'을 기른다면 자존감이 올라갈 것이다.
다만 '확신의 힘'은 꽤나 복잡한 것이기 때문에 잘 키워야 한다.
'확신의 힘'을 잘못된 방향으로 키운다면 고집이 센 사람, 독단적인 사람, 남의 말을 듣지 않는 사람 등 온갖 좋지 않은 수식어를 다 달고 살 수도 있다. 하지만 제대로만 키운다면 다른 수식어는 필요 없이 자존감이 높은 사람이 될 수 있다. 자존감이 높은 사람을 본 적이 있다면, 그가 얼마나 부러운 사람인지는 알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