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한 직장 동료와 드라이브를 하던 날, 우리는 자연스럽게 반려동물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동료는 사랑하던 강아지 율이를 병으로 떠나보냈고, 나 역시 자취생활을 처음 시작하던 스무 살 여름, 처음 키웠던 고양이 레이를 떠나보낸 경험이 있었다.
레이는 급성 심부전증을 앓았다. 병원에 데려갔을 땐 이미 늦은 상태였다. 하루하루, 내가 도착할 때까지 조금만 더 버텨주기를 바랐다. 하지만 레이는 영상통화를 한 그날 밤, 새벽을 넘기지 못하고 고양이별로 먼 여행을 떠났다. 사랑하는 반려동물을 떠나보낸 기억은, 우리 대화의 중심이 되었다.
"계장님은 율이랑 같은 품종으로 한 마리 더 키울 생각은 없으세요?"
"전혀요. 율이는 저와 가족에게 너무 큰 의미였어요. 대체할 수 없는 존재인 것 같아요. 아직 율이를 완전히 보내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는 것 같고요."
"율이가 많이 아프게 떠났다고 하셨잖아요. 안락사는 생각 안 해보셨어요?"
"율이가 마지막 순간, 코랑 눈에서 피를 쏟으며 갔어요. 그래도 안락사는 생각 안 했어요.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데, 동물은 아무리 아파도 마지막 순간에 주인 곁에서 눈을 감는 게 더 행복하다는 이야기를 들었거든요. 아버지는 안락사를 이야기하셨지만, 어머니랑 저는 극구 반대했어요."
"그렇구나…"
그 대화를 나눈 후, 나는 자연스럽게 죽음에 대한 생각을 꺼내기 시작했다.
사람은 태어나는 순간을 선택할 수 없지만, 죽음에 대해서는 준비할 수 있다. 나는 그것이 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작은 배려이자, 마지막으로 허락한 자유라고 생각한다.
주변에서 자살로 세상을 떠난 분을 애도하며, 나는 죽음과 자살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그중 하나는 나이가 지긋한 배우가 자신의 안치될 공간을 미리 준비하고, 가족들에게 당부의 말을 전하는 이야기였다. 그는 "언제 올지 모르는 죽음을 피할 수 없다면,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맞이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나는 한 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사람이 평생 동안 가장 많은 의료비를 지출하는 시기는 죽기 몇 개월 전부터 임종까지의 기간이라는 것.
현대 사회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병상에서 생을 마감한다. 호스와 기계에 연결된 채, 알지도 못할 약물을 투여받으며,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로.
나는 존엄사에 대해 긍정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현재 함께하는 반려동물이 죽음에 가까워졌을 때, 그가 병으로 극심한 고통을 겪고 있다면, 나는 의사와 충분히 상담한 후 안락사를 선택할 것이다.
물론, 나 역시도 한국에서는 아직 존엄사가 허용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언젠가 내가 죽음을 맞이할 시점에는, 존엄사가 허용될 수도 있지 않을까—그런 작은 기대를 품어본다.
나는 아직 내 죽음을 깊이 고민할 나이가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죽음을 두려워하기보다는, 최소한 어떤 방식으로 맞이할 것인지는 생각해볼 가치가 있지 않을까.
나는 연명치료를 받지 않을 것이다. 연명치료가 필요하다는 것은, 이미 내 몸이 더 이상 스스로의 생명을 유지할 수 없다는 뜻이다. 나는 그저 누워서, 아무 의지도 없이, 의료기기 속에서 생을 마감하고 싶지 않다.
그리고 내 죽음 이후에도, 나는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기억되길 바란다.
나는 수목장도, 납골당도 원하지 않는다. 대신, 아버지가 관리하시는 우리 동네 가장 높은 곳—풍력발전 단지에 뿌려지기를 바란다. 그곳은 내가 어릴 때부터 보아왔던 곳이고, 내가 자연을 사랑했기 때문이다.
어느 것도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인생이지만, 죽음 이후만큼은 가족과 친구들이 내 마지막 바람을 들어주지 않을까. 인간은 어쩌면 죽음을 맞이하고 나서야 비로소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아갈 기회를 얻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하루하루를 착실하게 살아가며 죽어가는 우리 모두는, 인생에 한 번쯤 "나는 어떤 죽음을 맞이하고 싶은가"에 대해 고민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