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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산 May 31. 2024

추억수첩 1

백수광부

백수광부


      

  수업 시간에 학생들에게 공무도하가를 가르칠 기회가 있었다. 사실 가르친다기보다는 생각을 나눈다는 편이 더 옳은 표현일 것이다. 지금은 인터넷 자료만 뒤지면 공무도하가를 친절하고도 자세하게 설명해 놓고 있다. 공무도하가는 처음부터 강렬한 메시지를 던진다.     


공무도하(公無渡河) 임이여, 그 강을 건너지 마오     


  왜 강을 건너지 마라고 하는가. 그 강은 삶과 죽음의 경계선이다. 그 경계선을 넘어가는 순간 죽음으로 건너가기 때문이다. 학생들에게 우리 주번에서 볼 수 있는 경계선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게 했다. 먼저 주차선이 나왔다. 주차선을 어길 때 발생하는 폐해를 많이 받기 때문인지 모두 동의하는 분위기다. 주행선, 삼팔선이 나오고 인터넷을 찾아본 녀석들이 경계선 성격 장애, 경계선 지능 장애라는 말을 찾아낸다. 경계선은 나눔을 의미하지만 정확하게 무엇을 가를 수 있을까 하는 회의도 들었지만 무지개를 빨주노초파남보로 가르듯 언어는 대상을 분절하는 특성을 지니기 때문에 이런 경계 나눔이 가능하다. 학생들은 경계선에 관한 인식을 잘 알고 있었다. 이 사회에는 넘어서는 안 될 선이 있다는 것을 본인도 모르게 체득하고 있는 셈이다. 

   

  민규가 손을 들고 ‘금기’라는 단어를 외친다. 갑자기 생각이 났다는 표정이다. 그렇다. 경계선은 금기와 연관이 지을 수 있다. 칠판에 경계선-주차선, 주행선, 삼팔선을 쓰고 다음으로 그 밑에 금기를 쓴다. 금기는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의미하고 흔히 터부(taboo)라고 말한다. 종교적, 관습적인 것으로 나뉜다. 나는 묻는다. 경계는 깨질 수 있을까? 녀석들이 머뭇너뭇 하면서도 깨질 수 있다고 말한다. 그래 경계선은 깨질 수 있다. 경계를 만든 이도 인간이기 때문이고 이를 깰 수 있는 이도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가 자각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경계에 갇혀 살아가게 될 것이다.

 “선생님 그것이 패러다임 아닌가요?”

빙고, 나는 ‘패러다임’을 생각한 녀석의 얼굴을 본다. 평소에 진지한 학습 태도를 견지하고 있는 진형이다. 우리는 패러다임(paradigm)속에서 살아간다. 한 시대의 사람들의 견해나 사고를 근본적으로 규정하고 있는 인식의 체계다. 그런데 이 패러다임도 깨지고 변화한다. 인간이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공무도하가는 경계를 넘어간다. 공무도하가는 패러다임을 깨뜨리고 있는가?  

   

공경도하(公竟渡河) 임은 마침내 강을 건너는구료     


  임이 삶의 패러다임을 깨뜨리고 죽음의 패러다임을 넘어가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강을 건너는 임(白首狂夫: 머리가 하얗게 센 미친 남자)은 기존의 패러다임을 깨뜨리는 인물이다. 맨정신으로는 깨뜨리지 못해 미친 상태가 되어야 틀을 깨뜨리는 것일까. 선생님, 백수광부는 천재인가요? 천재들은 다 미쳤다고 하잖아요. 시대를 잘못 태어날 수도 있고. 완이의 말을 ‘미쳤다는 것과 천재’를 결합시킨 생각이 대견하다. 한 사회의 패러다임은 그 사회의 패러다임을 깨뜨려는 자를 쉽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오히려 배척하고 공격하는 것을 서슴지 않는다. 한 사회의 패러다임이 바뀌기까지는 ‘피’로 상징되는 많은 희생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미투 운동이 그 한 예다. 미투 운동은 희생이 있었지만 우리 사회의 패러다임을 변화시키는데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한다. 정민 교수의 ‘미쳐야 미친다’는 책에서 보면 어느 수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그 분야에 미쳐야 한다는 대목이 나온다. 백수 광부가 천재라면 어느 한 분야에 미쳐 있던 천재이지 않을까. 아이들의 상상력이 불을 튀긴다.     


타하이사(墮河而死) 물에 빠져 죽으니      


  허무해요, 가 먼저 들려온다. 죽음은 끝과 연결되니 죽음 이후에는 희망이 없어 보인다. 패러다임을 변화시키고 무너뜨리기 위해 시도했던 많은 이들이 ‘미친 과학자, 미친 철학자, 미친 화가, 미친 연구자, 미친 교수’ 등으로 매도당해 죽음을 맞이하기도 했으니 이런 반응은 별로 놀랍지 않다. “영웅이 아닐까요?” 어?, 죽을 줄 알면서도 물러서지 않잖아요. 죽음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는 용기를 지닌 사람 같습니다. 오, 새로운 해석이다. 아까, 패러다임을 말한 진형이다. 패배했지만 패배하지 않은 정신이라면 이런 경우일 것이다. 죽었지만 그 죽음이 더 큰 의미를 지닌 용기로 새롭게 해석된다. 잘못된 금기, 잘못된 패러다임에 목숨을 걸고 도전하고 깨고, 새로운 변화를 일으키는 주체가 백수광부라는 말이다. 죽음이 죽음을 넘어 오히려 새로운 용기와 변화의 희망을 주는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백수광부는 그냥 미친 사람에서 금기에 도전하는 용기 있는 자로 뒤바뀐다.      


당내공하(當奈公何) 이 내 임을 어찌할꼬     


  ‘한탄하고 슬퍼한다’가 직접적인 반응이다. 체념이라고 아이들은 답한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니까요. 그런 백수광부의 도전을 이것으로 끝인가요? 백수광부의 처가 백수광부를 따라서 강에 뛰어들잖아요? 그렇지. 그럼, 우리에게도 도전의식을 부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너희들도 백수광부처럼 어느 하나에 미쳐서 잘못된 패러다임을 깨뜨려라, 이런 메시지로 읽을 수 있지 않을까요. 멋진 해석이다.  다른 녀석들도 고개를 끄덕인다. 그 때 한 녀석이 손을 든다. 왜? 마지막 대사를 백수광부가 한 대사로 생각하면 어떨까요? 임을 꼭 백수광부가 아니라 백수광부가 자신의 처를 ‘임’으로 부릴 수도 있잖아요. 내가 죽으니 이제 혼자 남은 불쌍한 나의 처는 어찌할꼬? 로 말이죠. 어? 생각하니 제법 그럴 듯하다. 하지만 공‘公’이 백수광부를 가리키고 있으니 이 해석은 인정하기 어렵다. 어렵하고 할지언정 이런 생각을 한 녀석이 대견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이야기를 소설로 만들면 백수광부를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놓고 써도 좋을 것 같은데요. 패러다임을 말한 진형이다. 제 생각에는 “백수광부의 처를 3인칭 관찰자로 하면 상황을 잘 그려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자신의 실력을 숨기고 있던 반장이 한 마디 한다. 어느 시점을 사용해도 좋은 소설이 될 것 같다. 소설이 조금 무리다 싶어 나는 수필을 써 보자고 한다. 백수광부가 되어서, 혹은 백수광부의 처가 되어서 오늘 나왔던 내용을 가지고 써 보면 다양한 내용이 나올 것 같다. 아니다. 오늘 나오지 않은 이야기도 괜찮다고 말한다. 수업은 끝났지만 칠판을 다시 보니 여운이 남는다. 금기와 패러다임, 미친다과 미친다. 아이러니 등의 단어가 눈에 띈다. 


 “선생님, 아쉬워요, 수업 50분이라는 패러다임을 깰 수는 없을까요?”

 어? 왜 안 되겠어? 일단 백수광부가 되어보자. 왜 수업이 50분으로 정해졌는지부터 알아봐야지. 미쳐야 미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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