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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산 Jun 02. 2024

우빠남

    

  나는 우상에 잘 빠지는 남자다. 우상은 맹목적인 인기를 끌거나, 숭배되는 대상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니 우상은 내가 경외하는 대상이다. 성경은 우상을 섬기지 말라고 했으나 나는 곧잘 우상에 빠져드는 마음 약한 남자다. 꽃에 빠져들고 노을에 빠져들고 사람들의 이야기에 빠져든다. 나의 어릴 적에는 아버지에게 빠져들었다. 아버지의 힘과 남자다움이 나를 끌어당겼다. 아버지 다음으로 나의 우상이 되었던 사람은 이웃집에 살던 덕환이 형이었다. 덕환이 형은 수학과 주판, 암기 등 못하는 공부가 없었다. 

    이런 내가 우상에 부정적인 생각일 지니게 된 것은 전상국 작가의 ‘우상의 눈물’을 읽고 난 뒤다. 학교에서 물리적 폭력으로 신화적 존재가 된 기표는 결국 자신을 둘러싼 위선적이고 폭력적인 상황을 견디지 못하고 도망간다. 우상이 바닥으로 굴러떨어지는 모습을 보는 것은 마음이 불편이다. 왠지 나도 바닥으로 굴러떨어지는 기분이다. 

   진리의 길로 들어서기 위해서는 네 가지 우상의 오류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말한 사람은 프랜시스 베이컨이다. 극장의 우상, 동굴의 우상, 종족의 우상, 시장의 우상이 그것이다. ‘극장의 우상’은 극장 무대 위 공연에서 권위 있는 자가 애기 울음소리를 고양이 울음소리라고 말하면 사람들은 그말을 그대로 믿는다. 전문가의 권위와 명성에 대한 선입견 때문에 그 어떤 비판도 없이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어떤 권위와 명성에 대한 믿음 때문에 객관적인 판단을 하지 못하는 경우를 ‘극장의 우상’이라고 한다.

   ‘동굴의 우상’은 개인의 편견과 기울어진 시각으로 동굴 속에 갇혀 세상을 바라보는 독단적인 생각, 습관, 성격으로 판단하는 오류를 말한다. 사람마다 각자 다른 관점과 기질, 또는 교육 등에서 오는 현상을 말하는데 이것은 자신의 입장이 고착화 되어 자기만의 동굴에 갇힌 상태이기에 편견을 가질 수밖에 없다. ‘우물 안 개구리(井底之蛙)’도 마찬가지이다. 자기만의 편견과 외고집에 묶여서 아님, 자기만의 동굴 안에 갇혀서 오르지도 못한 산 정상의 세계를 재단하고, 주관적 판단으로 등산의 왜곡된 세계를 낳는 경우가 있다. 이 또한, ‘동굴의 우상’의 오류를 범하는 것이며 이것은 개인의 주관과 편견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라 할 수 있다. 한마디로 자신만의 동굴 속에 갇혀 그 밖의 것을 제대로 보지 못한 현상이다.

   ‘종족의 우상’의 예를 보자. 친구 사이인 고양이와 소가 점심때 식당에 갔다. 덩치 큰 소가 작은 고양이한테 메뉴 선택권을 줬다. 고양이는 소를 의식하지 않고 자기가 좋아한 메뉴를 주문했다. 잠시 뒤 비린내가 심한 생선회와 생선찌개 두 그릇이 식탁 위에 놓였다. 이를 본 소는 화를 내면서 당장 주문 취소하라고 했다. 소에게는 생선이 먹을 수 없는 음식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소에게는 생선찌개가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인 셈이다. 장자의 ‘제물론’를 보면 여희를 미인이라고 하지만, 물고기는 그를 보면 물속으로 숨고, 새는 하늘로 높이 날아오른다. 이처럼 선악, 미추 등등은 상대적 관점이고 견해일 뿐이다.

  ‘시장의 우상’은 시끌벅적한 시장은 많은 사람이 모이는 곳이기에 다양한 언어가 생겨난다. 시장은 한마디로 화려한 말 잔치의 선동과 속임수가 난무한 곳이다. 인간이 언어에서 생기는 편견과 능수능란한 언변이 판을 치고  없는 것도 있게 하는 장소가 시장이다. 그래서 의사 전달에 있어 언어 소통의 문제가 생기는데 그 언어가 완전하지 않고 불완전하게 소통하는 현상이 발생한다.

  뒤집어 생각하면 우리는 지금도 수많은 우상 속에서 살고 있다. 뭐든 좋아함이 지나치면 우상이 되지 않던가. 그런 우상이 무너지면 허탈감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밀려올 것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연예인이 자살한 경우 따라서 죽는 베르베르 효과의 경우에도 우상을 잃은 허탈감을 이겨내지 못한 결과이다.

  사람들은 보이는 것을 믿지만 모두가 같이 각도와 관점에서 현상을 보는 것은 아니다. 우화가 있다. 뜨거운 철판에서 물고기들이 팔딱딸딱 뛰는 것을 보고 왕이 왜 그러는 것이냐고 묻자 간신이 이렇게 답한다. 왕이 오셔서 기뻐서 뛰는 것이라고. 왕은 흡족해 하면서 구경한다는 이야기다. 물고기는 고통 받는 백성들을 의미하고 있다. 간신의 혀도 문제지만 간신의 말을 믿는 왕도 문제다. 이런 일이 우리의 주위에 없다고 할 수 있을까. 거짓의 혀로 가려진 진실이 얼마나 많던가. 

   우상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눈으로 보이는 현상의 뒤를 봐야 한다. 진실은 늘 얼마쯤 가려져 있다. 보이는 것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그 사람의 행동을 지켜봐야 한다. 말보다는 행위가 먼저 말을 하게 해야 한다. 현대 사회는 순간적인 만남이 빈번한 사회가 아닌가. 그 사람의 면면을 모두 평가하고 사귈 수가 없기 때문인지 사람을 깊게 사귀기가 쉽지 않다. 친구는 오래될수록 좋다고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현대사회의 익명성 때문이라도 우리는 진실에 가까워지기 어렵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최소한 그 사람이나 대상을 보기 위해서는 겉치레의 말보다는 속에 든 진실을 봐야 하는 것을. 성급하기 믿기보다는 한번쯤 보이는 것을 의심해 봐야 한다.

   나는 다른 우상에 빠지기로 한다. 나의 우상은 인간이 만든 우상이 아니라 자연이다. 흘러가는 구름과 봄에 돋아나는 풀과 무성한 숲과 날마다 찾아오는 노을이다. 대지를 적시는 빗방울이며 하얗게 퍼붓는 눈이 내 우상이다. 자연처럼 아름다운 우상이 어디에 있던가.  눈이 온 세상을 덮을 듯이 내린다. 나의 우상은 영원히 추락을 모르는 우상이다. 나는 우상 숭배를 멈추지 않을 작정이다. 이렇게 자연을 사랑하다보면 자연에 깃들어 함께 살아가는 이웃을 사랑하지 않을 까닭이 없을 것이다. 우상이 아닌 인간을 사랑하는 법을 자연으로부터 배운다. 자연은 우상을 거부하는 우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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