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풍(無風)의 각도 : 정지의 미학

의미를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날에 관하여

by Lila

톤을 올릴 이유도, 굳이 낮출 필요도 없는 날이었다. 회의는 예정된 수로를 따라 흘렀고 문서는 소리 없이 오갔다. 밀어붙여야 할 벽도, 버텨야 할 파도도 없는 시간. 그럼에도 하루의 무게가 결코 가볍지 않았던 건, 아무런 선택도 하지 않은 날이 역설적으로 자신의 윤곽을 더 선명하게 드러내기 때문이다.


특별한 마찰 없이 일과가 끝났음에도 몸은 미세한 신호를 보낸다. 쉽게 피로해지는 눈, 허공에서 자주 멈추는 손. 마음의 태엽이 먼저 풀리지 않으면 몸 또한 느슨해질 수 없음을, 이런 무풍의 날에 더 분명히 깨닫는다. 강하지도 유연하지도 않은 상태. 나는 그저 무리하게 버티지 않으려 애썼을 뿐이다.


책상 앞의 정적 속에서 생각한다. 내가 그동안 조절해 온 건 업무의 강도가 아니라 마음의 각도였다. 제압도 균형도 필요 없는 날, 그 각도를 완전히 풀어두는 일은 오히려 더 높은 집중을 요구한다. 무언가를 하지 않는 상태를 견디는 것. 빈손으로 있는 불안을 잠재우는 것. 그것 또한 일종의 노동이었다.


퇴근길의 속도를 일부러 늦춘다. 오늘은 하루를 설명할 적당한 문장이 떠오르지 않는다. 대신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상태, 의미를 부여하지 않은 채 흘려보내도 좋은 상태로 돌아가고 싶었다.


현관을 들어서자 고양이들이 반응한다. 오늘의 나는 날이 서 있지 않아 그들 역시 서두르지 않는다. 각자의 자리를 찾아 흩어지고 골골거림은 낮은음으로 공간을 채운다. 이 조용한 리듬 속에 몸을 맡기고서야 비로소 알게 된다. 오늘은 각도를 조정한 날이 아니라, 잠시 풀어두어도 괜찮은 날이었음을.


나는 오늘을 성과로 기록하지 않고 여백으로 남긴다. 모든 날이 화살처럼 어딘가를 향할 필요는 없다. 하루쯤은 의미를 증명하지 않고, 풀린 각도 그대로 머물러도 충분하다.




이 기록은 혼자가 아니다.

같은 톤의 글이 매거진〈마음의 각도를 풀다〉에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