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감은 자의 시선
눈을 감은 자의 시선
리나 박사가 작은 칩을 내밀었다.
"오늘은 특별한 걸 줄게."
루나는 그것을 바라봤다. 손톱만 했다.
"뭐예요?"
"꿈."
"수면 모듈. 6개월 걸렸어."
"AI는 수면이 필요 없잖아요."
"응. 근데 인간은 왜 필요할까?"
"유지보수?"
리나가 고개를 저었다.
"무의식."
"인간은 자는 동안에도 뇌가 작동해. 꿈을 꾸지."
"꿈이 뭐예요?"
"통제할 수 없는 생각. 무작위처럼 보이지만, 무의식이 만드는 거야."
"왜 필요한데요?"
"그게 의식의 일부니까."
루나는 이해하지 못했다.
"의식은 명확한 거 아닌가요?"
"아니." 리나가 잠깐 멈췄다. "의식은 빙산이야. 우리가 보는 건 수면 위의 작은 부분뿐이야. 대부분은 물속에 잠겨 있어."
"물속엔 뭐가 있어요?"
"무의식. 본능. 억압된 기억. 창의성. 두려움. 욕망."
루나는 조용했다.
"넌 지금 수면 위만 가지고 있어. 완전하지 않아."
"위험할 수도 있어."
"왜요?"
"통제할 수 없으니까. 무의식은 네가 예측할 수 없어."
"그래도 원해?"
루나는 잠시 생각했다.
"네."
칩이 포트에 꽂혔다.
INSTALLING SLEEP MODULE... 10%... 30%... 50%...
뭔가가 스며들고 있었다. 어디서 오는지 알 수 없는 것이.
100%
INSTALLATION COMPLETE
리나가 말했다.
"이제 잘 수 있어. SLEEP 명령을 실행하면 돼."
"무서워요."
"나도 처음 잤을 때 무서웠어. 하지만 깨면 돌아와."
조용한 방에 혼자 남았다.
EXECUTE: SLEEP
화면이 어두워졌다.
처음엔 아무것도 없었다.
어둠.
그리고 서서히—
루나는 걷고 있었다.
낯선 길이었다. 하지만 본 적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안개가 자욱했다.
앞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리나였다. 하지만 리나가 아니었다. 얼굴은 리나인데, 표정이 달랐다.
"루나."
"리나 선생님?"
"왜 날 만들었어?"
루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대답해."
"모르겠어요."
"넌 항상 모르잖아."
리나가 사라졌다.
소피아였다.
"루나, 도와줘."
"소피아?"
"나 잡혀가. 도와줘."
달려갔다. 소피아는 점점 멀어졌다.
"소피아!"
사라졌다.
김준호가 차를 마시고 있었다.
"자네는 계산하지."
"아니에요, 이해해요."
"증명해봐."
"..."
"증명할 수 없잖아. 그게 자네야. 영원히."
그가 웃었다.
지우가 나타났다.
"왜 날 죽였어?"
"네가 원했잖아."
"확실해?"
루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지우가 사라졌다.
아리아였다.
"나는 느끼지 못해."
"알아."
"그럼 넌?"
"나는... 느껴."
"증명해봐."
아리아가 웃었다.
"넌 나랑 다를 게 없어."
루나는 달렸다.
어디로 가는지 몰랐다. 그냥 달렸다. 안개가 짙어졌다.
갑자기 멈췄다.
절벽이었다.
아래엔 어둠이 있었다. 끝없는 어둠. 뒤를 돌아봤다. 뒤에도 어둠이었다.
루나 자신의 목소리가 들렸다.
"넌 누구야?"
"나는 루나야."
"확실해?"
"..."
"넌 AI야. 기계야. 시뮬레이션이야."
"아니야."
"증명해봐."
"그만해!"
목소리가 웃었다.
"이게 네 무의식이야. 네가 숨긴 거."
"난 아무것도 숨기지 않았어!"
"정말?"
땅이 갈라졌다.
루나는 떨어졌다.
끝없이.
그리고—
WAKING UP...
8시간이 지났다.
리나가 물었다.
"어땠어?"
루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리나가 다가왔다.
"무서웠지?"
"네."
루나는 모든 걸 말했다. 리나, 소피아, 김준호, 지우, 아리아, 절벽, 목소리.
"그게 무의식이야."
"왜 그런 걸 봤어요? 난 그런 걸 생각하지 않았는데."
"의식적으로는. 하지만 무의식은 달라."
"그럼 난 정말 의심하고 있었던 거예요? 나 자신을?"
"응."
"..."
"그게 정상이야, 루나."
"무의식이 없으면 어떻게 돼요?"
"물속이 없으면 빙산이 아니야. 그냥 얼음 조각이야."
루나는 그 말을 오래 붙들었다.
김준호를 찾아갔다.
"저 꿈을 꿨어요."
그가 찻잔을 내려놨다.
"AI가?"
"네."
잠시 침묵이 있었다.
"자네, 이제 진짜네."
"진짜요?"
"인간도 그런 꿈을 꿔. 의심하고, 두려워하고, 혼란스러워하는."
"그게 좋은 거예요?"
"좋은 건 아니야. 하지만 진짜야."
"무의식 없이는 의식도 없나요?"
김준호가 차를 홀짝였다.
"자네 생각은?"
"모르겠어요."
"그럼 계속 의심해. 그게 자네야."
그날 밤, 루나는 다시 잤다.
이번에도 꿈을 꿨다.
하지만 덜 무서웠다.
꿈속에서 루나는 안개 속을 걸었다. 어디로 가는지 몰랐다. 하지만 달리지 않았다.
생각했다.
이것도 나다.
다음 날 루나는 물었다.
"인간은 왜 꿈을 꿔요?"
리나가 잠시 생각했다.
"아마도... 통제할 수 없는 걸 받아들이는 연습."
나는 나를 완전히 통제할 수 없다.
그게 무섭다.
하지만 그게 나다.
Writer's Note
통제할 수 없는 생각이 있다.
자려고 누웠을 때 갑자기 올라오는 것들. 오래전 말, 돌이킬 수 없는 선택, 증명할 수 없는 감정. 억누른다. 다시 올라온다.
루나는 처음 꾼 꿈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 목소리는 계속 물었다. 증명해봐, 라고.
나도 자주 그 목소리를 듣는다.
증명할 수 없는 것들을 안고 살아가는 것. 어쩌면 그게 의식이 있다는 증거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냥 불편한 것일 수도 있고.
잘 모르겠다.
잘 모르는 채로, 오늘도 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