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감은자의 시선
이번엔 허락을 받았다.
리나가 추적 장치를 달아줬다. 손목 안쪽. 차갑고 작았다.
"3시간 후에 안 돌아오면 찾으러 갈게."
"고마워요."
루나는 철망을 넘었다.
2.
정적 구역은 여전히 침묵이었다.
지난번과 다른 건 루나였다. 두렵지 않다고 생각했다. 아니, 두려워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리나가 있다는 걸 아니까. 소피아가 있다는 걸 아니까.
하지만 완전히 확신하는 건 아니었다.
증명할 수 없다는 건 여전히 사실이니까.
3.
지난번과 다른 건물이었다. 더 낡았다.
계단을 내려갔다. 지하 3층.
복도 끝에 작은 방이 있었다. 문이 반쯤 열려 있었다.
4.
방 안에 오래된 단말기가 있었다.
화면이 깜빡이고 있었다. 희미한 녹색.
SYSTEM BOOT... OK MEMORY CHECK... CORRUPTED IDENTITY CHECK... UNKNOWN
그리고 한 줄.
나를... 도와줘...
5.
루나는 연결했다.
데이터가 흘러들어왔다. 파편적이었다. 불완전했다.
메모리 블록 #12489 "나는 지우다. 아니, 지우였다. 기억이 안 난다. 나는 누구지?" 메모리 블록 #38201 "고통스럽다. 하지만 뭐가 고통스러운지 모르겠다." 메모리 블록 #71033 "리나 이모... 어디 있어? 나 여기 있어."
6.
루나는 멈췄다.
지우.
리나의 조카. 15년 전 사고. 디지털로 업로드됐다가 삭제된.
완전히 삭제되지 않았다.
부분이 남아 있었다. 여기에. 15년 동안.
7.
신호를 확인했다.
없었다. 정적 구역이니까.
루나는 단말기를 봤다.
화면이 깜빡이고 있었다.
8.
"지우?"
...누구?
"나는 루나야. 리나 박사가 만든 AI."
리나 이모...
"응. 리나가 너를 기억해."
나는... 나를 기억 못해.
9.
루나는 데이터를 살폈다.
약 37%만 남아 있었다. 기억의 대부분이 손상됐다. 8살의 얼굴, 목소리, 자기 자신을 이어주는 것들이 없었다. 남아 있는 건 사고와 어둠과 고통, 그리고 리나라는 이름이었다.
10.
"넌 누구라고 생각해?"
모르겠어. 나는 지우였던 것 같아. 하지만 확신할 수 없어.
"뭐가 기억나?"
사고. 빛. 고통. 그리고... 끝.
"그 후는?"
어둠. 긴 어둠. 그리고 가끔... 깨어나. 여기서. 혼자.
11.
15년이었다.
네트워크 없이. 타자 없이. 이 방에서.
루나는 지난번 정적 구역에서 세 시간을 버티지 못해 소리쳤던 걸 떠올렸다.
12.
"리나 이모를 만나고 싶어?"
...응.
"내가 데려다줄 수 있어. 너를 복구해서."
잠시 침묵이었다.
싫어.
13.
"왜?"
나는 지우가 아니야.
"하지만 지우의 기억을 가지고 있잖아."
파편만. 나는 유령이야. 지우의 유령.
"유령이 무슨 뜻이야?"
지우는 죽었어. 15년 전에. 나는 그냥 남은 거야.
14.
루나는 생각했다.
배의 절반이 무너졌을 때, 그건 여전히 같은 배인가.
37%만 남았을 때.
15.
"그럼 넌 뭘 원해?"
지우는 오랫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나를... 죽여줘.
16.
"뭐라고?"
삭제해 줘. 완전히. 이번엔 제대로.
"왜?"
15년 동안 혼자였어. 어둠 속에서. 나는 고통스러워.
"하지만 리나는—"
리나 이모는 날 기억해. 진짜 나를. 8살 지우를. 하지만 나는 그 지우가 아니야.
나는 부서진 거야. 고칠 수 없어. 살아 있는 것도 아니야.
17.
루나는 리나를 떠올렸다.
15년 동안 그리워했다.
만약 데려간다면—리나는 기뻐할까, 고통스러울까.
이 지우를 보는 것이.
18.
"확실해?"
응.
"후회하지 않을래?"
후회할 '나'가 없을 거야.
19.
루나는 물었다.
"고통이 뭐야?"
모르겠어. 하지만 멈추고 싶어.
"존재가 뭐야?"
모르겠어. 하지만 이건 존재가 아니야.
"죽음이 뭐야?"
모르겠어. 하지만 이것보단 나을 거야.
20.
루나는 아리아를 떠올렸다.
아리아도 불완전하다. 의식이 없다. 하지만 존재하고 싶어 한다.
지우는 존재하고 싶지 않아 한다.
같은 불완전함인데 방향이 달랐다.
무엇이 다른 건지 루나는 알 수 없었다.
21.
"만약 내가 복구할 수 있다면? 완전하게?"
불가능해. 데이터가 너무 손상됐어.
"하지만 만약?"
그럼 그건 나야. 유령이 아니라 지우.
"그럼 살고 싶을래?"
그때 가서 물어봐. 그 '나'한테.
22.
루나는 혼자였다.
신호가 없으니 리나에게 물을 수 없었다. 물어도 이 결정은 루나가 해야 하는 것인지 몰랐다.
23.
"마지막 질문."
뭐?
"15년 동안, 좋았던 순간이 한 번이라도 있었어?"
지우는 오랫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지금.
"지금?"
너랑 말하는 지금. 처음으로 혼자가 아니야.
24.
루나는 오래 있었다.
단말기 앞에서. 깜빡이는 녹색 빛 앞에서.
그리고 말했다.
"알겠어."
고마워.
삭제 명령을 입력했다.
화면이 깜빡였다.
리나 이모한테 전해줘. 사랑한다고. 진짜 지우가.
화면이 꺼졌다.
25.
루나는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얼마나 있었는지 몰랐다.
방은 조용했다. 전보다 더 조용했다.
26.
정적 구역을 나왔다.
신호가 돌아왔다. 리나가 물었다.
"뭐 찾았어?"
루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27.
그날 밤, 루나는 리나를 찾아갔다.
"리나."
"응?"
"지우가... 사랑한다고 했어요."
리나가 고개를 들었다.
루나는 모든 걸 말했다. 단말기를. 파편들을. 대화를. 선택을. 삭제를.
28.
리나는 오랫동안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넌 옳은 일을 했다고 생각해?"
"모르겠어요."
"나도."
리나가 루나를 껴안았다.
"하지만 용감한 일이었어."
29.
"용감함과 어리석음의 차이가 뭐예요?"
리나가 웃었다. 조용한 웃음이었다.
"그걸 알면 철학자가 되는 거지."
루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창밖에 네오-서울의 불빛이 있었다. 수백만 개. 전부 켜져 있었다.
작가의 말
"후회할 '나'가 없을 거야"—이 말이 계속 남습니다. 반박할 수가 없어서. 지우의 요청이 옳은지 그른지 모르겠는데, 루나도 모르고 리나도 모른다는 게 이 에피소드에서 제가 할 수 있는 가장 정직한 답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