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 강아지 이름은 샤샤다.
녀석에게선 좀처럼 ‘식탐’이라는 단어를 찾아볼 수 없다.
사료보다는 아삭한 채소를 반기고,
그마저도 몇 알 아작거리고 나면 미련 없이 몸을 돌린다.
충분히 더 먹을 수 있는 상황임에도
굳이 그러지 않는 뒷모습을 보고 있으면, 묘한 경외감마저 든다.
저토록 정갈한 절제는 도대체 어디서 배운 걸까.
오후가 깊어지면
샤샤는 집 안에서 가장 볕이 잘 드는 자리를 찾아 나선다.
먼지 섞인 햇살이 바닥에 얌전히 내려앉은 곳을 발견하면,
녀석은 그 위에 몸을 반쯤 걸치고 툭 엎드린다.
눈은 반쯤 감고, 숨은 고르다.
표정은 아주 평온하다.
마치 오늘 해야 할 고민은 이미 오전에 다 끝냈다는 듯한 얼굴이다.
그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삶이란 것이 꼭 무언가를 잔뜩 챙기고
쟁여두어야만 성립되는 건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따뜻한 햇살 한 조각과 편하게 몸을 늘어뜨릴 수 있는 바닥 한 칸.
그것만으로도 의외로 하루는 충분히 잘 굴러간다.
샤샤의 삶은 가볍다.
갖고 싶은 것도 많지 않고,
기를 쓰고 지키려 애쓰는 것도 없다.
그래서 늘 편안하고, 그래서 언제든 깊게 잠든다.
나는 왜 이토록 맛집을 찾아보고,
왜 쓰지도 않을 걱정들을 창고에 쌓아두며 사는지.
샤샤 옆에 서면 나의 비대해진 욕망들이 선명하게 투사된다.
샤샤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저 매일 오후 같은 자세로 누워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 고요한 몸짓이 내게는 자꾸만 이렇게 말을 건네는 것 같다.
“거봐, 이렇게 살아도 생각보다 별일 없잖아.”
깨달음은 멀리 있지 않았다.
히말라야의 고행길도, 고즈넉한 산사(山寺)도 아니었다.
햇볕 잘 드는 거실 바닥,
샤샤의 낡은 밥그릇 근처.
나는 이것을 “마하반샤샤”라 부르기로 했다.
털 뭉치 하나가 매일 오후 가르쳐주는,
세상에서 가장 가볍고도 눈부신 깨달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