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산책이 잦아진 이유

텅 빈 관계에 대하여

by 가을열기

부쩍 밤 산책을 나가는 일이 많아졌다. 할 일을 마치고 도서관을 나서면 으레 걷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요즘이다. 도서관에서부터 금강을 따라 걷다가 다리를 건너고, 은은한 조명들이 촘촘히 빛나는 제민천을 따라 또 걷는다. 목적지는 없다. 집으로 돌아가고픈 마음이 들 때까지 천천히, 그리고 묵묵히 걸을 뿐이다. 아니다. 걷기만 하지는 않는다. 숨도 쉰다. 선선해진 밤공기를 깊게 들이마시고 길게 내쉰다. 들숨에 네 걸음, 날 숨에 네 걸음이다. 느린 발걸음 여덟 박자에 맞추어 숨을 쉰다. 한숨에 하나씩, 머릿속의 복잡한 생각들을 정리하는 것이다.


그런데 요즘에는 이상하리만치 생각 정리가 잘 안 되었다. 복잡한 생각이 문제가 아니었다. 마음속 어딘가 텅 비어 있는 듯한 느낌, 그 느낌이 문제였다. 무작정 걷기만 해서는 내 텅 빈 마음이 채워지지는 않았다. 그래서 요즘 부쩍 밤 산책을 나가는 일이 많아졌던 것이다.


"또 가을을 타는군."


얼마 전 친구가 내게 한 말이다. 그렇다. 나는 이맘때만 되면 늘 이랬다. 고등학생 때도 가을만 되면 학교에서 나와 제민천으로 금강으로 무작정 걷곤 했었다. 그런데 그때의 밤 산책에는 요즘과 다른 점이 하나 있었다.


고등학생 때에는 밤 산책을 함께하는 ‘친구’가 있었다. 친구와 속마음을 터놓으며 대화를 나누던 그 시간은 무엇보다 소중했다. 나의 고민에 대해 친구가 명쾌한 해결책을 제시해 주어서가 아니었다. 친구에게 나의 고민을 이야기하다 보면 복잡했던 생각은 자연스럽게 정리되고 명확해졌다. 우리는 서로의 이야기를 묵묵히 들어주며 서로에게 깊이 공감했다. 때로는 서로가 서로의 자극이 되기도 했다. 그래서 밤 산책을 하고 나면 마음이 충만했었다.


대학생이 되면서 친구를 만나는 빈도가 극단적으로 줄어들었다. 멀리 떨어져 있기도 하고 일정을 맞추기도 어려워서 많아야 일 년에 두세 번이었다. 오랜만에 만나서 밀린 대화를 나누며 서로의 고민을 털어놓고 나면 마음이 충만해지는 것은 전과 다름없었지만, 그 빈도가 너무 적은 게 문제였다.


그렇기에 대학교에서도 나랑 결이 맞는 친구를 사귀고 싶었고, 자연스럽게 그런 친구가 생길 거라 기대했다. 하지만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학 생활도 일종의 사회생활이었기에 가면을 쓰지 않을 수가 없었다. 중·고등학생 때처럼 내면을 솔직하게 드러내기가 어려워졌다. 그리고 나이가 들수록 계산이 빨라졌다. 사람을 처음 만날 때 상대의 사소한 언행만 보고도 '나와 결이 맞는 사람인지 아닌지'를 빠르게 판단하게 되었다. 이런 점들 때문에 대학교에서 친구를 사귀기는 어렵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운이 좋게도 대학교 1학년 때 결이 맞는 친구들을 만났다. 그 친구들과 함께 있으면 마음이 편했다. 대화가 잘 통했다. 성장하는 속도나 고민하고 있는 내용도 비슷해서 서로에게 더 쉽게, 자연스럽게 공감할 수 있었다. 문제는 그 친구들도 이제는 내 곁에 없다는 것이었다. 한 명은 임용 시험을 준비하고 있고 다른 한 명은 다른 학교로 편입했다. 우리는 자주 연락하며 종종 만나기도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친구의 존재가 주는 충만함을 채울 수 없었다.


복학한 뒤로는 새로운 마음으로 후배들과 가까워지려고 노력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과 친해지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선후배 관계’라는 보이지 않는 틀을 극복하고 깊은 관계로 나아가기는 어려웠다. 겉으로는 많은 사람과 관계를 맺고 있었지만 그 안으로는 깊은 관계가 없었다. 어쩌면 이 괴리가, 내 마음속 공허감의 원인이자 잦아진 밤 산책의 원인인 듯했다. 깊은 관계가 필요했던 것이다. 사람은 사회적 존재로서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야 하는데, 단순히 많은 사람과 관계를 맺는다고 해서 사회적 욕구가 충족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다시금 깨달았다.


그렇지만 깊은 관계는 내가 맺고 싶다고 해서 맺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나와 결이 맞는 사람을 찾는 일이 쉽지도 않았고, 인연이 맺어지고 끊어지는 일이 내 마음대로 되는 것도 아니었다. '시절 인연'이라는 말이 있듯이, 맺어질 때는 진솔하게 다가가고 끊어질 때는 깔끔하게 보내주는 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인생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과 평생토록 관계를 유지할 수는 없었다. 그러니 인연의 맺어짐과 끊어짐에 크게 연연할 필요도 없었다. 인간관계가 점점 좁아지고 깊어지는 자연스러운 흐름 속에서 이제는 텅 빈 관계들을 추려내 정리해야 할 때인 것 같다. 그렇게 비워내고, 깊은 관계들에 더 집중해야, 내 마음이 채워질 것 같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평형대 위를 걷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