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기타리스트 신대철 선배님을 모시고 부산에 도착했다. 우리는 부산은행 뒤 쓸쓸한 휴일저녁 골목에 서있었다. 도시 한복판임에도 골목을 통해 전해지는 바람은 항구 특유의 비린내가 가득했다. 일요일 저녁이다. 구도심에는 문을 연 식당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다. 겨우 찾아낸 중국집. 딱히 고를 메뉴가 없다는 것이 장점이다. 우리는 허기를 달래기 위해 메뉴를 ‘볶음밥’으로 통일했다. 상이 차려지는 시간을 줄여볼 속셈이다. 우리의 속셈과 일요일 저녁 손님을 만나는 주방장의 짜증이 결합되어 식탁에는 금세 4인분의 볶음밥이 차려졌다. 빨리 나온 밥. 모순이다. 아침부터 볶아놓은 듯한 기름짐과 뜨겁지 않아서 중국음식 특유의 복잡한 맛이 결합된 식은 국물. 식사를 마치고 나온 일행들에게 왠지 죄인이 된 기분이다. 출발 전부터 장담을 한 탓이다. “부산은 제가 전문입니다. 부산 맛집은 제가 다 아니까 다들 걱정 마세요” 일요일 저녁 구 도심이었다. 굳이 따지면 내 잘못은 아니지만 죄인이었다. 내일 아침을 담보해야 했다. 그래, 돼지국밥이다. 이 뜨거운 한 그릇은 오늘의 저녁을 보상해 줄 것이다. 우리는 어차피 오늘 술을 마실 예정이다. 내일을 위해 오늘은 죄인처럼 묵언을 해야 하겠다.
다음날 아침 운전대를 직접 잡고 부산 범일동 조방 앞으로 이동했다. 눈앞에 보이는 것은 돼지의 쿰쿰한 냄새를 가득 품고 있는 뜨거운 열기다. 내가 갔던 곳이 옆집인지 눈앞에 있는 집인지 잠시 기억을 더듬는다. 앞에 있는 식당으로 들어간다. ‘합천식당’ 부산에서 합천의 지명을 달고 장사를 하다니..라는 생각을 잠시 한다. 그러고 보니 옆 가게는 ‘마산식당’이다. 이질적이지 않다. 아무렴 어때. 장사만 잘되면 되는 것이지. 따로국밥은 밥을 따로 내어주는 국밥이라고 한다.
나는 돼지국밥을 선택한다. 입구에서 보여주던 토렴의 그 온기를 맛보고 싶어서다.
가게 입구부터 느껴지는 진한 돼지의 풍미, 이 지점에서 우리들의 기호는 냉정하게 나뉜다.
후끈한 돼지의 열기와 그 내음을 통해 아직 먹지 않은 음식의 호불호가 갈리는 것이다.
비강을 통해 전해지는 냄새는 음식을 접하기도 전에 이미 음식의 그림과 맛을 우리에게 전달해 준다. 가끔 감기가 걸렸을 때 음식의 맛을 결정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합천식당은 이미 입구에서 우리에게 어떤 음식을 전할 것 인가에 대해 강하게 어필하고 있다. 입구에서 돼지국밥을 만난다. 가게 안으로 들어서면 점점 낡아가는 테이블과 매일 닦아도 미끄러울 듯 한 바닥을 만난다. 나도 모르게 다리에 힘을 주고 걷는다. 자리에 앉아 벽에 붙어있는 메뉴판을 본다.
‘돼지국수’ ‘돼지국밥’ ‘섞어 국밥’ ‘수육백반’ ‘ 따로국밥’ 등등이다. 메뉴를 결정하고 주문을 하면 마치 도심에서 만나던 패스트푸드처럼 바로 음식이 나온다. 아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패스트푸드라는 개념을 좀 더 확장할 필요가 있다. 우리네 삶에 어울리게 만들어 온 ‘한국의 패스트푸드’다. 만드는 과정은 진국을 우려내는 ‘슬로푸드’ 지만 지난한 삶을 위로하는 한 그릇. 돼지국밥은 한국의 패스트푸드다. 주변의 테이블에서는 ‘수육백반’을 시킨다. 그러나 우리는 ‘돼지국밥’을 주문한다. 입구에 있는 ‘이모님’으로 통칭되는 전문가 분들의 토렴. 그 한 그릇을 맛보기 위해서다. 이모님은 우리의 주문과 함께 너무나 익숙한 손놀림으로 목장갑 하나에 의지한 채로 뚝배기에 건건이 이면서 동시에 식사로 채워지는 돼지 살과 내포를 담고 옆 통에서 밥을 담는다. 뜨거운 국물이 뚝배기에 얹어지고 다시 내려지고 다시 건더기들을 어르고 다시 달랜다. 그릇을 잡고 있는 이모님의 왼손 엄지는 국물에 닿을 듯 말 듯하면서 뚝배기의 열기를 견디고 있다. 오래전 티브이 다큐에서 다루었던 국밥의 내용이 기억나는 장면이다. 국밥 골목의 토렴을 소개하는 내용이었다. 인터뷰를 하던 골목의 ‘이모님’은 지문이 닳아버렸다. 한 그릇의 국밥을 내어주기 위해 보낸 시절을 표현하는 손이다. 이곳의 이모님도 마찬가지였다. 국밥 뚝배기를 담는 팔은 팔꿈치까지 자세히 보면 자잘한 반점들이 있다. 아마도 뜨거운 국물들이 가끔 튀어서 살을 에이게 한 시간의 흔적인 듯하다. 토렴을 해준 국밥은 쌀밥이 가지고 있는 차진 맛, 우리가 말하는 찰기를 걷어내고 국물 안에서 밥과 건더기가 어우러지도록 하는 효과가 있다. 전국의 유명한 국밥, 혹은 곰탕집 일부에서도 토렴방식을 사용한다.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찬 흥남부두” 로 흥얼대는 우리의 고통의 기억, 한국전쟁 이후 부산은 피난민들로 가득했다. 지금의 서면 롯데백화점 옆 영도대교, 그 아래에는 피난민들이 “우리 혹시 헤어지게 되면 부산 영도다리 아래에서 만나요”라고 했던 쓰라린 기억을 기록한 내용이 있다. 지금은 일종의 관광지처럼 남아있지만 말이다. 그 시절 부산에 내려온 수많은 피난민들이 할 수 있는 일은 한정적이다. 또한 사는 공간도 한정적이다. 부산은 바다와 산이 겹쳐져 있는 가혹한 공간이다. 피난민들은 산 밑 혹은 조금은 가파른 언덕에 간신히 몸을 의지할 수 있는 판잣집을 만들어 살 수밖에 없었다. 당시 부산의 인구 변동 통계를 보면 1945년 28만여 명이던 부산의 인구는 전쟁을 겪은 이후 1955년 무려 세배가 넘는 104만 명을 기록하게 된다.(부산시 통계연보) 하코방이라고 불리는 부산 피난민의 판잣집의 역사의 기원이다.
내려온 피난민들은 살아야만 했다. 무엇이라도 하거나 무엇이라도 얻어먹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몰려서 생활을 하는 곳으로 가게 된다. 시장이다. 살기 위해 좌판을 깔고 살기 위해 인부로 일을 하면서 그들은 살아남았다. 한 끼는 채워야 했다. 국밥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장점이다.
적은 양의 고기로 많은 이들이 배를 채울 수 있도록 양을 늘릴 수 있는 것. 돼지국밥은 피난민들을 거두어주었다. 원래 부산, 그중 경남 여러 지방의 음식이라고 알려진 돼지국밥이다. 물론 각 지방마다 특화된 국밥들은 있었다. 돼지국밥은 농사를 짓기 힘든 해안가를 중심으로 발전했다. 소를 사육하는 것보다 돼지를 사육하는 것이 용이한 척박함이 돼지를 이용한 국밥을 만들어내는 이유가 된 것이다. 피난민들은 돼지국밥을 만났고 이들은 돼지국밥을 발전시켰다. 경남 지역에 대한 비하의 의도는 아니지만 당시에 돼지국밥을 만난 피난민들은 그저 끼니만 때우는 음식으로 돼지국밥을 만났다. 피난민들 중 특히 평안도 지역의 사람들. 이들은 원래 살던 지역에서 ‘고기를 다루어 국을 만드는 일’에 능통했다. 꿩이나 닭을 다루어 온반이라고 불리는 국밥의 형태(장국밥이라고 한다.)를 오랜 기간 동안 접해왔다. 이들은 피난처에서 만난 돼지국밥을 보며 이렇게 이야기한다. “내가 만들어서 더 맛있게 팔아야겠다” 그들은 부산의 시장에서 장사를 시작한다. 처음에서 좌판에서 그러다가 어느 정도 여유가 생기면 조그만 점포를 얻어 장사를 이어간다.
그렇게 부산의 돼지국밥은 더 깊은 풍미를 만나게 되었고 여전히 이별의 아픔을 가지고 있는 실향민들에게 추억의 한 그릇으로 남아있는 것이다. 지명의 아이러니다. 북쪽 지방의 사람들이 명맥을 발전시킨 ‘부산’의 돼지국밥이다. 당시에는 쌀이 귀하기도 했으니 쌀이 아닌 다른 곡식도 밥의 역할을 했어야 했다. 잡곡도 말아서 먹어야 했던 시절이다. 까끌까끌한 식감의 곡식을 국밥에 말아먹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토렴방식은 우리 역사 속 그림에서도 찾아볼 수 있던 국밥의 모습이다. 주막풍경을 그린 그림 속에서도 토렴의 모습은 발견할 수 있다. 토렴은 철저하게 손님을 위한 국밥집의 배려다. 그림의 시대도 그렇고 전쟁 이후에도 우리에게 무슨 보온기술이 있었겠는가. 게다가 빠르게 오가고 한 그릇을 받아서 빨리 배를 채우고 다시 일을 하러 가야 하는 노동의 삶. 그 삶을 위로하기 위해 미리 썰어놓고 미리 퍼놔서 식어버린 밥을 먹기 좋게 덥혀주는 주인의 손. 그것이 토렴이다. 돼지국밥은 그렇게 토렴 되어 나온다. 토렴 된 국밥의 온도는 적당히 따스하다. 물론 펄펄 끓는 국이 정성이 가득한 것으로 생각하는 우리의 일상에서 토렴은 따스하지만 뜨겁지 않다. 바로 입에 넣으면 따스함과 부드러움만이 남는 고마움이다. 돼지국밥 한 그릇을 내어주는 ‘이모님’의 손이 고맙다.
한 그릇을 채워준 범일동 조방 앞, 노동의 고단함을 채워준 범일동을 좀 더 돌아보기로 한다. 외지인인 나는 동네 지명이나 주로 몰려있는 점포들에 관심이 갈 수밖에 없다. 범일동은 화려했던 동네다. 아니다 여전히 화려하다. 이 수많은 귀금속 점포들을 보니 이 동네는 부유한 골목임을 확신한다. 그러면서 뒷골목을 보니 그곳은 각종 건축용 자재 및 기계를 파는 골목도 같이 있다. 낯이 익은 골목의 모습이다. 서울의 종로다. 종로는 귀금속 점포가 몰려있으면서 앞으로는 청계천 변을 따라 각종 기자재 도소매가 이루어지고 뒤쪽으로는 오래된 건물들이 도시의 기둥을 이루고 있다. 범일동도 그러해 보인다. 1970년대 부산의 화려한 발전을 견인한 구도심의 모습을 여전히 보여주고 있다. 전쟁 이후 부산은 남한에서 가장 급격한 경제성장을 이루는 도시가 된다. 미국의 잉여농산물 원조와 중화학 중심의 경제 개발 기조를 통해 경부선은 부를 전해주는 기찻길이 된다. 수많은 노동자들이 부산으로 몰려들었고 공장은 쉬지 않았다.
범일동의 노동의 역사를 돌아보던 중 낯설지만 어디서 본 듯한 지명을 보게 되었다.
“조방 앞” 어디 앞 이런 명칭이라면 ‘조방’이라는 명칭이 이 지역의 무엇인가를 가리키는 말이다. 조방을 찾아보려 했지만 조방의 흔적은 없었다. 조방을 찾아보기로 했다.
조방은 조선방직의 준말, 지역민들이 임의로 줄여서 부르던 지명이 익숙해져서 고유명사처럼 사용되는 이름이 되었다. 물론 지금 젊은 세대는 택시를 타거나 친구들을 만나러 갈 때 자연스럽게 “조방 앞”으로 약속을 정하는 경우는 있지만 조선방직에 대한 이야기는 낯 설 수가 있다.
부산의 역사를 이야기함에 있어서 개화기를 빼고 이야기할 수는 없다. 좀 더 가깝게 들여다보면 부산의 역사는 개항의 역사다. 1876년 조-일 수호조규에 의해 이뤄진 부산의 개항은 이후 일본의 강제 점령을 통해 수탈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처음 이루어진 개항의 모습은 일종의 조차지의 형태로 지역의 일부를 내어주는 모습이다. 이후 일제의 강제 점령기의 부산은 수탈의 중요 거점지로 활용되어 갔다. 그래서일까 당시 부산의 반일감정은 직접적인 수탈을 목도한 민중들에 의해 다른 지역보다 더 거센 분노를 일으키게 된다. 동래지역의 학생들은 동맹휴업 및 항일투쟁의 활동 등을 가열 차게 진행했다. 1917년 일본의 기업인들은 부산에 방직공장을 지으려는 시도를 한다. 이후 1919년에 조선방직은 현재의 부산광역시 동구 범일 2동 지역에 국내 최대 규모의 면직공장을 세운다. 1922년 가동을 시작한 조선방직은 일본의 식민지 지배가 곤고해지는 시기에 맞추어 조선인들의 노동을 착취하며 공장을 가동한다. 이 공장의 가동에는 총독부도 관여를 하게 되는데 당시 면사의 가격폭락으로 이윤을 낼 수 없다고 생각한 일본인 기업인들에게 “모자라는 자금 중 일부는 지원하겠다” 라며 공장을 유지하게 한다.
당시 고용된 노동자의 규모가 얼추 2800여 명 이었다고 하니 공장의 규모를 짐작하게 한다.
그러나 식민지에서 조선인들에게 정당한 수당을 주는 것은 기대할 수 없는 일이었다.
노동자들은 죽지 않을 정도의 대우만 받았고 일본인 관리자들의 폭압은 너무도 거셌다.
방직공장 특성상 여공들이 많았고 이들은 거의 지방에서 모여든 어린 여공들이었다.
이들에게는 차마 묘사하기 어려운 생활환경이 제공되었고 끼니를 때우기도 어려운 수준의 임금이 지급되었다. 1930년 1월 10일 가혹한 노동환경을 참지 못한 노동자들은 파업쟁의를 통해 권리를 주장한다. 식민지 시절이다. 누군가가 주동하면 강한 처벌을 받을 수도 있는 시대적 상황이었으나 이들은 인간이기를 주장하며 파업의 깃발을 올린다. 처음에는 여공들이 파업을 주도한다. 이후 이 참혹한 노동환경의 고통을 공감하고 있던 남성 노동자들도 1월 13일 파업에 동참한다. 노동자들의 권리는 아주 기본적인 것이었다. “임금인상 ”8시간 노동 확보“ 그리고 너무나 가슴 아픈 구호 ”식사개선“ 그들은 인간으로의 기본적 대우를 외치며 파업을 했다. 총독부는 파업에 대한 엄중 단속을 지시한다. 경찰은 엄혹한 영하에 날씨에 파업을 하고 있는 여공들에게 물대포를 쏘아댔다. 여공들은 ”..... 우리들이 요구하는 두 가지 중요한 조건을 들어줄 때까지 조금도 굴하지 않고 싸울 작정“이라고 결의하며 파업을 지속했지만 식민지 하에서의 가혹한 단속법이었던 치안유지법과 지도부의 와해로 결국 열 하루 만에 파업은 끝났다.
조선방직의 파업은 단순한 노동쟁의의 의미 이상의 가치를 갖는다. 노동운동사에서 드물게 시작된 여성노동운동이며 당시 1930년 이후 일제의 식민지 지배가 더욱더 가혹해지는 시점에서 일어났던 민족자존 회복의 시도였다. 해방이 되고 조선방직은 여전히 노동자에게 가혹한 공장이었다. 조선방직은 이후에도 노동쟁의의 역사를 이어갔다.
1952년에도 이승만의 비호를 받던 인물이 사장이 되자 조선방직 당시 6000여 노동자들은 쟁의를 통해 노동자의 권리를 찾기 위해 싸운다. 비록 쟁의는 실패로 돌아갔지만 조선방직의 노동자들의 투쟁의 역사는 기록에 남아있다.
조선방직은 1969년 사라졌다. 조선방직이 있던 자리에는 아파트가 들어서고, 자유시장과 평화시장이 남아있다. 범일동 귀금속 거리가 반증하듯이 예식장도 여전히 성업 중이다. 부산의 구도심의 이야기는 그렇게 흔적으로만 남았다. 여공들은 배가 고팠다. 범일동 근처 고무공장이 성업하던 시절, 여전히 여공들이 조방 앞을 누비고 있었다. 한참을 걸어 산동네로 올라가서 하루를 마무리했다. 언덕 초입, 점빵에 있는 아이스케키를 사서 올라가고 싶지만 오늘 하루 일당을 생각하면 그 역시 녹록지 않은 일이다. 범일동은 여공의 이야기가 가득 차있는 곳이다.
조방 앞, 지금은 문화거리로 만들어졌다. 면사를 뽑아내고 고무를 만지던 그때의 여공들은 없다. 그러나 피난민들의 뜨거운 삶의 의지처럼 공장의 기계를 돌리며 시대를 버텨온 땀 냄새가 남아있는 부산의 구도심이다. 다시 국밥집 앞으로 지나가 본다. 토렴을 해서 한 그릇을 올려주는 이모님 뒤로 그 옛날 살기 위해 “식사개선”이라는 구호를 외치던 여공의 목소리가 들린다. 토렴을 해주는 이모님의 손이 고맙게 느껴진다. 한 끼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