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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밥 짓는 사람 Dec 31. 2020

멸치볶음

반바지가 슬픔을 이겼다

멸치볶음. 그리고 동전 묶음...

군대를 다녀오니 집은 흔적도 없이 망해서 사라졌다. 머 어릴 때부터 반복되던 일이라 딱히 놀랍지는 않았다. 나이 20살 때까지만 키워주시는 것도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사춘기 없이 그럭저럭 모나지 않게 살아왔으니 딱히 누군가에게 절망이나 분노의 감정을 내보이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군복을 입고 일주일 동안 동아리 방에서 생활하다가 친구 정수가 밥도 사주고 여관방도 잡아주었다. 그렇게 보내길 며칠. 나는 성남 상대원 산 꼭대기로 가게 되었다. 아버지와 연락이 닿은 것이다.
그곳에서 이십일 정도 어두운 지하방에서 고민을 했다. 상대원 산동네 꼭대기인데 지하라니... 모순의 방이었다. 웃음만 나오는 일이다. 피자집 알바를 시작했다. 사장은 처음에는 '일을 잘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으로 경계를 했지만 시간이 지난 어느 한날 , 주방일이 너무 밀리는 것을 결국 못 참고 직접 칼을 잡았다. 군대 가기 전에도 칼질은 배웠었지만 군대에서 중식도 다루는 법을 배웠다. 취사병이 없는 부대라 요리 잘하는 병사가 알아서 하는 구조였다. 후임 중에 중국집 주방에 있다가 많은 나이에 들어온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에게 중식도 다루는 법을 배웠다. 나는 그럭저럭 사회에 연착륙했다. 가족들은 여전히 연락이 안 되고 있지만 말이다.

그러나 열심히 살아보려던 복학생은 말라리아라는 얼토당토않은 병에 걸리고 병원비로 전부 날리고 다시 학교 근처로 돌아온다. 대학가요제 금상 출신 팀 연습실에서 청소와 빨래를 해주면서 드럼을 배우다가 6개월 만에 다시 화양리로 왔다. 동기와 같이 자취하면서 살기로 한 것이다. 여전히 가족들은 연락이 닿지 않았다.

여름 하루였다. 동생과 연락이 되었다. 동생도 친구와 자취를 하면서 어렵게 어렵게 살고 있었다. 동생으로부터 엄마의 상황을 물었다. 동생은 이미 친가 쪽 인간들로부터 차마 들을 수 없는 상소리를 듣다가 병원까지 다녀야 했다. 엄마를 찾아내라는 상소리에 말이다. 오빠인 나에게는 연락처를 알려주었다. 엄마는 평창동 고급주택 단지에 있는 먼 외가 쪽 친척집에 있다 했다. 식모살이다. 여전히 그 굴레를 벗어나지 못했다. 자기애가 강한 아버지는 가족의 안위보다는 당신의 당위만 찾았다. 같이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엄마에게 연락이 닿았다. 나는 그럭저럭 잘 살고 있었다. 아르바이트로 생계는 충분했고 저녁마다 친구들과 술을 마실 여유는 있었다. 나보다는 엄마가 문제였다. 잘 지내고 있다 하신다. 그럴 리 없다. 가족이 없는데 잘 지낼 리 없다. 걱정을 내보이진 않았다. 가뜩이나 곤죽처럼 되어버린 서로의 정신상태에 물을 부을 수는 없었다. 엄마는 모레쯤 찾아오라 했다. 밥은 잘 먹고 있는지 , 반찬은 있는지 그게 궁금하신 거 같았다. 가겠다고 했다. 거의 4년 만이다.

평창동까지 가는 길은 더웠다. 오후에 여유 있게 출발했지만 서울에 이런 곳이 있는 줄은 몰랐다. 버스만 세 번 갈아타고 두 시간이 넘는 시간이 흘렀다. 평창동은 거대했다. 버스는 동네 한참 아래 도로까지만 나를 내려놓았다. 산을 올라야 했다. 아뿔싸 , 더운 여름이라 쪼리라고 불리는 슬리퍼만 신고 왔다. 벌써 발가락 사이가 파이기 시작했다. 종이에 적은 주소를 근처 집 경비실에 물어봤다. 아직 산을 오르라 한다. 아직 멀었다고 한다. 해가 져서 밤공기가 내려오고 있다. 엄마는 먼가 초조했는지 연신 전화를 한다. 나는 거의 다 왔다고 했다. 어딘지 몰라서 시간이 걸린다고 했다. 집들은 거대했고 길을 다니는 사람은 없었다. 간간히 차가 흐르고 오르고 할 뿐이다. 이 동네 사람들은 차로만 다니는 거 같았다.
헤매다 겨우 엄마가 사신다는 집 앞에 섰다. 집은 장관이었다. 정원을 지나고 통유리를 넘어서 서울 시내가 전부 보였다. 이 집에 산다는 아주 먼 친척은 고위 공무원이라 했다. 그래 보였다.

엄마는 작은 반찬통 여러 개를 사소하지 않게 매우 무겁게 두 손 가득히 들도록 준비를 해왔다. 나는 대문 밖에 서있었다. 내 손은 두 개뿐이다. 꾸러미는 말 그대로 한 짐이었다. 안부를 물어보지도 않았다. 나는 어서 빨리 반찬 꾸러미를 들어야 했고 먼가 바쁜 기색인 엄마는 내 주머니에 무언가 무거운 비닐봉지 꾸러미를 넣는다. 어서 가라 한다. 나는 그렇게 등 떠밀려 다시 이 큰 산을 내려간다.

큰일이다. 나는 고무줄 반바지를 입었다. 바지 속에 넣은 이 무거운 것은 무엇이길래 자꾸 바지를 내려가게 하는가. 게다가 슬리퍼는 발을 내디딜수록 자꾸 벗겨져 내 걸음보다 먼저 내려간다. 나는 발이 검게 더러워지고 있었다. 중간쯤 내려오다가 바지가 거의 엉덩이골 아래로 내려가게 되었다. 신발도 이미 신발이 아니다. 나는 잠시 멈추고 몰골을 다듬어야 했다. 주머니에 있는 이 꾸러미도 봐야 했다. 둘둘 말린 봉투를 여니 그 안에는 500원짜리 동전들이 수십 개 , 아니 족히 백개 정도는 되게 들어있다. 그 이상이다.

다시 꾸러미와 옷을 추리고 반이나 남은 산동네를 내려온다.
동전을 모아서 주려했던 엄마의 모습이 생각나서 눈물이 계속 났다. 다행히도 동네에 아무도 없다.
그런데 내 몰골을 생각하니 실소도 터져 나온다. 바지는 내려가고 신발은 벗겨지고 꾸러미도 잘 들지 못하는 몰골이 너무 웃겼다.

나는 웃으면서 울면서 힘도 없어서 땀도 흘리면서 내려왔다.
평창동 아래 동네까지 말이다. 내려오고 나니 웃음도 울음도 나지 않았다. 땀만 범벅이었다. 나는 다시 버스를 타고 두 시간을 돌아가야 한다. 버스 안에서 저 꾸러미를 다리사이에 넣고 버텨야 한다.

무사히 돌아왔다. 씻고 나서 꾸러미를 열었다. 멸치볶음이 맨 위에 있다. 4년 만에 보는 그 멸치다. 멸치를 먹었다. 핑계 좋게 소주도 한병 깠다. 반찬으로 주신걸 또 안주로 먹고 있다. 이 꾸러미 안에는 얼마나 많은 시간들이 담겨 있을까. 그렇게 시간을 싸들고 왔다. 동전 꾸러미도 저 한쪽에 뒹굴고 있다. 아파서 꺼내지는 않겠지. 살아있을 때는 아픈 날도 있는 거지 머.라고 하면서 소주를 마셨다..
여전히 나는 엄마한테 반찬을 가져다 먹는다. 냉장고를 열면 가지런히 서있는 생수병 밑에 늘 그렇이 멸치볶음이 있다.
그렇게 먹어왔지만 늘 멸치볶음이다. 나도 변하고 식모살이 안 하는 엄마도 늙어갔지만 늘 멸치볶음은 그대로다. 그래서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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