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밥 짓는 사람 Feb 25. 2021

마광수 선생님, 안녕하신지요

2021년은 사라가 즐겁게 살 수 없는 세상이다.

청계천 8가에 여전히 포목점 원단을 날라주는 날품팔이들이 있었다.

카바이드 불빛이 달려있는 포장마차에서는 서울에서 보기 드물게 가래떡을 크게 잘라 고추장에 범벅한 떡볶이가 밤새 졸여지고 있다. 오뎅도 맛이 제법 들었다. 오뎅의 맛을 끌어올리는 것은 역시 서울 중심을 지나는 도로, 그 많은 차들의 먼지다. 먼지가 얇게 국물 위를 감쌀 때 오뎅의 풍미도 살아나는 것이다. 새벽이 지나고 동대문 평화시장 육교가 덜 들썩이는 시간대가 왔다. 청계천 뒷길 황학동은 세운상가의 고급진(?) 기계들과는 등급이 다른 딱딱한 느낌의 카세트 데크들이 쌓여있었다. 인켈에서 나온 더블 카세트는 비닐에 한번 싸여서 새것 못지않은 뽐새로 팔리고 있다. 그 옆에는 커다란 숫자만 덜렁 박혀있는 전화기가 줄지어 서있다.

황학동의 블럭은 전자제품을 버리는 사람과 사는 사람이 혼재되어 있는 형태다. 그래서 한 두 번 와본 사람은 자기가 무엇을 사려하는지 종종 까먹기도 한다. 저기 지나가는 저 아저씨도 왠지 그러한듯하다. 분명히 옷 뽐새는 레코드판을 사러 온 것 같은데 옆 좌판에서 파나소닉 계산기를 사려고 흥정 중이니 말이다. 계산기 옆에는 무전기도 있다. 시간의 흐름이나 공간을 예측하기보다는 놓여 있는 좌판에 집중하는 편이 낫다.

레코드판을 이야기하니 뒷골목 마지막 블럭이 보인다. 그곳으로 가기 위해 너무 빨리 앞질러가지는 말자. 골목 잘못 들어서면 개고기 파는 좌판으로 빠져나가기 십상이다. 뭐, 붉은색 소리가 들리는 것은 매 한가 지니  사실 차이는 없다.  빽판이다. 황학동에 파는 판들은 그 비싼 태광 에로이카에서 잘못 돌다가는 다이아몬드 핀을 깨버릴 수도 있다는 빽판이 몰려있는 곳이다. 공군 점퍼를 입고 있는 레코드 빵 주인은 내가 판을 사는 놈인지 그저 구경만 하다가 지나갈 놈인지 알고 있는 듯하다. 주워들은 대로 "지미 핸드릭스" 나 그 뭐더라... 아버지가 사 왔던 판과 비슷한... 아 맞다. " 비 포더 다운" 이 삽입되어 있는 주다스 프리스트를 읊조려도 아저씨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낡은 기타도 몇 대 걸려있고 , 간간히 판을 팔러 오는 사람들 중 진짜 판을 팔러 오는 사람도 있다. 그 골목 끝에 앉아있으면 하루 종일 음악이 흐른다. 청계천은 땅속으로 흐르고 그 위에서 사람 소리가 흐르고 있다.


<춘화, 소설>

사실 버스를 타고 반나절 이 동네까지 온 목적은 다른 곳에 있음을 이제야 고백한다. 다시 한번 길을 되짚어 본다. 암사동에서 버스를 타고 화양리를 거쳐 중앙시장 다음 역에 내려 골목 사이사이로 돌아 여기까지 왔다. 황학동을 다 돌아서 말이다. 빽판 파는 골목 끝. 우측에서 각종 수입담배를 파는 아저씨 앞에서 머뭇거린다. 아니 잠시 시선을 맞추는 듯하다가 빽판 골목을 돌아 계산기 좌판을 돌아 다시 수입담배 아저씨 앞에 선다.

지루함을 이겨내는 것이 관건. 한 십여분이 지났을까. 담배를 파는 아저씨가 매우 지루한 목소리로 묻는다.

"뭐가 필요해서 왔냐?" 이때 딱히 대답하지 않는다. 나는 눈을 돌려 빽판을 파는 곳이 내 목적지 임을 분명히 한다. 아저씨는 다시 안 물어볼 것 같은 목소리로 다시 말한다 " 뭐 사러 왔냐?"

쭈삣대는 목소리가 나올 수밖에 없다. 말로만 들어봤지 사본적이 없으니 말이다. "책이요..."

아저씨 좌판에 깔려있는 중고책들은 청소년 잡지 몇 권, 바둑책 두어 권, 산야초 고르는 법 따위의 책들이다. 길 하나만 건너면 차분하게 책을 고를 수 있는 중고 책방 거리가 있으니 이 아저씨의 좌판 역시 진짜는 아닐 것이다. 대답을 삼키고 있던 , 물론 그 삼킴은 호기심과 경계심의 섞임이다. 말을 굳이 안 하고 버티는 것이 날 것 같아서다.  " 삼천 원이다" 아저씨의 말이 나오자 주머니에 있던 삼천 원을 꺼내 바로 건네준다. 아저씨는 옆에 있는 포장막에 손을 넣어 건강 다이제스트 크기의 책을 준다. 책을 받고 빨리 황학동을 벗어나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무엇을 샀는지 나중에 한강 고수부지에 가서 살펴보기로 하고 책을 가방에 넣고 그곳을 빠져나왔다.

이야기는 싱겁게 끝난다. 내가 받아온 책은 말도 안 되는 스토리로 남녀가 한방에 들어가 우리가 궁금해하는 "그 짓"을 하는 것을 묘사하면서 끝이 난다. 물론 중간중간 일본 잡지에서 칼라 복사해온듯한 수영복 사진이 있다. 그게 전부다. 이 허접한 책을 타자 치면서 제본까지 하는 사람에게도 부디 적당한 용역비가 주어졌기를 바라는 정도.   아!  직접 성기나 성행위를 묘사하지 않고 나름 일본 도색잡지를 번역했다는 것을 증빙이라도 하듯 몇 가지 표현들이 있다. '꽃잎' '꿀' '불기둥'  좋은 표현이고 편협한 성지식을 쌓는데 크게 일조했다.

진짜로 꽃이 있어야 한다는 환상. 꿀이 있으면 벌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 사제들만 가져야 옳은 높은 제단에 대한 동경, 밑도 끝도 없이 나온 불기둥 때문에 기둥을 숭상해야 할 것 같았다. 그 시절 그 정도 글자 주워 오기 위해 우리는 길을 헤매고 용기를 내어야 했다. 이율배반은 황학동 뒷골목에서만 일어나지는 않았다. 배운 먹물들은 이런 춘화 대신 헨리 밀러의 북회귀선을 읽었다는 것을 자랑삼아 떠들고 다니고, 김홍신의 소설 인간시장에서는 묘약에 빠져 성적 판타지를 채우는 주인공이 '단지 인도 갠지스강에서 죽음과 삶의 경계를 거닐었다'는 이유로 문학사적 의미를 부여받기도 했다. 최인호의 소설에서는 계급타파를 고려하지 않은 소설적 설정에 대해 '다 가진 여대생이 선택적 타락하는 것'은 낭만의 영역으로 이탈시키면서 사회에는 지켜야 할 각자의 자리가 있음을 설파하고 있었다. 조건부 타락이었으며 계급에 따른 체위 습득의 시대였다.




그때 즈음이었다. 즐거운 사라라는 글이 세상에 나온 것. 여성지 합본 부록으로 몇 번 나오다가 정지당하고 나중에 합본판이 나오고 다시 정지당하고를 반복한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여성잡지 속에 합본 부록에서 읽었다.

사라의 나이만큼도 안 되는 나이였으니 내용의 대부분을 이해하기는 어려웠다. 기억에 남는 단어 역시 별것 없었다. '여대생' '교수'  그런데 이 단어가 줄 세우기를 잘못하면 문제가 되는 사회였다. '교수'가 앞에 서고 '여대생' 이 뒤에 있어야 대상화가 낯설지 않은데, 반대로 세워놓고 보니 이게 꽤 얄궂은 내용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여대생이 선택을 , 그것도 성적 자기 결정권을 행사한다는 것에 대한 낯 섬이 사회에서는 꽤 큰 문제가 되어버린 것이다. 사라는 잡혀갔고 (삐라처럼 세상에 못 돌아다니게 되었으니 잡혀간 것 맞다) 마광수는 수식어까지 붙여가며 조리돌림을 당했다. "명문대 교수" "사회 저명인사"의 사회적 공분을 살만한 혹은 사회의 성적 안녕을 해치는 글을 써서 혼란을 야기시켰다.  당시 한국은 성공적인(?) 올림픽 개최 이후 해외여행도 좀 다니고 , 일본에서 코끼리 밥솥도 좀 자유롭게 들고 들어오고 , 먹고 살만 하니까 모터쇼도 열어볼까 하고. 잘 사는 나라 대한민국으로 막 들어서는 시기였는데 말이다. 잘살면 잘하기도 하고 자유롭게 하기도 하고 그래야 하는데  이건 뭐 통행금지 있던 시절의 로맨스보다 더 가혹하고 무식한 논리가 작동하니 말이다. 한 가지 생각이 문득 들었다. 당시 마광수가 명문대 교수가 아녔더라면. 혹은 소설에서 주어진 역에 교수가 없었다면. 그렇게까지 타락한 궁녀를 만들어서 궁에서 쫓아내려 했을까 하는 생각이다. 사회를 이루는 종축. 즉 신분에 따른  attitude를 지켰다면 그렇게까지 혼을 냈을까 하는 생각이다. 횡축에서는 얼마든지 저잣거리에서 치마를 까뒤집고 그 속으로 머리를 넣어 희롱하는 춤꾼들이 넘쳐나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합법적 도색잡지들도 생겨나는데 고작 "여대생의 모험" 같은 글 하나가 글쟁이 한 명을 매장시켰으니 말이다.


마광수는 윤동주를 읽어냈다. 윤동주의 글 속에서 그 시대를 읽어냈고 , 그가 , 혹은 그처럼 살아가고 있던 지식인들의 위선적 방어를 위로했다. 윤동주에게서 당위를 얻어내려 했고 윤동주의 소심한 외면은 "지식인이 아닌 생명이 있는 자 누구도 갈등할 수밖에 없음"을 이야기했다. 결국 세상은 사람이 살아지는 것 아닌가. 그것을 싸고 있는 모든 것들이 허상이고 뒤집어 보면 웃음밖에 안 나오는 것이라고 이야기를 한 것이다.

그래서 마광수가 아쉽고 그 유쾌함이 남아있길 바라는 것이다.


시간 속도계를 올려 2021년으로 와보자. 카바이드 불도 없고 , 개고기 좌판도 숨었다. 90년 그때에도 해결 못했던 절대적 빈곤계층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그래도 세상은 중간지대 사람들에게 좋은 문물을 가져다주었다.

그렇게 시대가 바뀌면 세상이 문란해지고 타락할 것이며 그러다가 불의 지옥에 우리 모두 빠질 것이라는 종교 원리주의자들의 우려 속에서도 우리는 그럭저럭 살아지고 있다. 고대 원생 기를 지나 공룡기가 오고 이후에 설치류가 지구를 지배하는 지난한 과정 속에서 우리가 "잘못" 알고 있던 논리는 '생명체는 우월 한쪽으로 진화한다'라는 것이다. 그 진화론이 맞다면, 설령 다 맞지는 않더라도 크게 봐서 맞다면 지금의 사회는 헐벗고 타락한 사회는 아니더라도 '나와 다른 남'에 대한 존중과 사회가 횡축으로 넓어지는 것에 대한 모든 것들(어른들이 식겁 하는 그 모든 것들 말이다)에 대해 이해가 넓어졌어야 하는데. 실상은 그렇지 않다. 정반합의 지긋지긋한 50:50 균형에 중독되었는지 여전히 "극보수주의"는 "극 반동주의"에 자석처럼 반응하고 있다.

꼴이라는 단어가 결국 붙어버리고 만 한국땅의 페미니스트. 결국 서자 이론을 잡고 분노 게이지를 높이기로 작정한 젊은 남성들(그냥 미취업자라고 하자. 분노는 예각화할 때 더 선명하니까). 티비 예능은 농담 하나 잘못하면 먹고사는 것이 사라지는 진짜 바보상자가 되어버렸고, 영화는 좀 덜하지만 나머지 영역에서 보이는 원리주의자들의 불편함. 도색잡지를 찾아보면 90년대가 더 볼만하고 "꽃"이 펴있고 "꿀"이 흐르고 "불기둥"이 불타올랐었다.  분명히 달력은 몇백 장이 찢어져 왔는데 , 까딱 잘못하면 불편하게 쭈그려야 하는 세상이 되어 버렸다. 말이 길어졌다. 어쩌다 보니 황학동 그 뒷골목 추억을 곱씹다가 마광수 생각이 났다.

아마 내일은 맛있는 식당을 찾는 글을 쓰다가 마광수가 살던 이촌동 그 도로길을 이야기할 수도 있겠다.

즐거운 사라를 처음 읽을 때 내 나이가 중1이었다. 즐거운 사라가 나에게 해를 준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다만 여대생이라는 단어가 참 좋은 단어다. 정도?  그 나이에 그 정도 배운 것이면 그 책은 명작까지는 아니더라도 가치가 있는 책이다. 여전히 내용은 잘 모른다. 나의 그 시절에는 사라 말고도 너무 많은 여대생이 있어서 사실 사라가 기억에 남지 않는다. 내가 비루하다 보니 상상하는 법은 잘 배웠다. 어차피 마광수도 상상해서 쓴 글 아닌가. 너무 현실적인 상상을 해서 문제가 되었지만 말이다.


즐거운 사라는 여성잡지 안 합본 부록으로 처음 세상에 나왔다. 물론 여성들부터 보라고 준 글이다.

작가의 이전글 반생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