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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밥 짓는 사람 Mar 04. 2021

당구 노조  그러나 토스트

무능력한데 성실할 수있다.

번철 위에 기름도 한번 두르고 커다란 헝겊 뭉치로 훔쳐낸다. 네모난 번철 위에 네모난 마아가린 블록으로 네모를 그려 채운다. 마아가린에서 거품이 미처 올라오기  전, 빵부스러기가 풀풀 떨어지는 식빵 여섯 조각을 네모난 판 위에 올린다. 삥으로 스며드는 마아가린의 시간을 막기라도 하듯이 플라스틱 양푼에 담아놓은 계란물을 빵 위에 슬슬  부어 적신다. 대파가 다져져 있는 계란물은 빵 사이로 스며들다 말다를 반복하다 토스트 빵 위에 섬처럼 남아버린다. 물론 대파는 끼어들 여지가 없다.  


1976년 이전부터 차를 배웠다고 한다.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맨 처음 돈을 벌기 위해 찾아간 곳이 서울시내 몇 안되던 공업사. 시다의 시간을 지나 기름밥으로 먹고살 수 있게 되었을 때. 평생 네모난 블록과 동그란 고무들과 함께 할 것이라는 생각은 안 했을 것이다. 그렇게 아버지는 차 정비를 배웠고 그 덕분으로 미군부대 산하에서 근무하며 마석 집에서 출퇴근을 자유롭게 할 수 있게 되었다.  군 제대 후 배운 것이 밥벌이가 되던 시절이었다. 택시가 돈벌이가 되던 시절 , 아버지는 1974년 첫 개인택시를 마련하고 용두동 네모난 문간방에서 그렇게 가장이 되었다.


당시 차는 포니 1. 네모는 아니지만 각이 충분히 진 이탈리아 디자인의 녹색 택시 덕분에 밥을 굶지 않아도 되는 시절을 살았다. 누구나 다 성실했기에 불성실한 청춘이 없던 시절이었다. 먹고 산다는 것은 여유롭지 않다는 것의 반증이기도 했다. 그 한 시절 , 하필 아버지는 당구에 재능이 있었다.

네모난 다이 위에서 동그란 공이 굴러 , 그저 굴러가는 것으로 끝나면 참 좋으련만, 재능 있는 자들끼리 합을 겨루다 보니 대가를 놓고 싸우는 투전판이 벌어졌고 , 아버지의 말에 따르면 ‘어떤 날은 굳이 택시를 몰고 나가지 않아도 한 달 벌이는 할 수 있었다.’라는 다소 허풍이 깔려있는 말을 듣기도 했다.  그러나 투전판에서 돈을 따는 이가 있겠는가. 야금야금 돈을 잃다 보면 , 그러다 정신을 차리고 보면 말이다. 아무것도 없는 날이 되는 것. 아버지는 반성을 했고 더 이상 내기 당구를 치지 않았다. 네모난 곳과 동그란 공의 배반이었다. 


개인택시가 없어지고 한동안 여러 일을 전전하던 중, 택시회사에 취업한다. 아버지는 늘 성실했다. 결근이나 지각 같은 것은 없었고 , 집에서는 모르겠지만 , 밖에 나가서는 그렇게도 호인이었다. 말도 잘 나누고 술자리도 좋아하고. 사람들의 이야기도 잘 들어주고 말이다. 집에서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1980년 후반 즈음 결국 그동안 해오던 노동운동에 대한 보상 격 훈장이라도 다시려는지 덜컥 노조위원장을 맡으셨다. 민주화 이후의 세상이니 기껏 노조위원장 한다고 멸문지화를 당하지는 않는 세상이다. 그러나 호인스러움의 끝은 우리 가정에는 멸문지화에 가까웠다. 노조위원장 선거에도 돈이 들고, 평소 사회적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라도 버는 돈보다는 집에서 가져가는 돈이 많았으니 말이다. 딱히 비난할 생각은 없다. 그렇게라도 사회적 생물활동이 유지된다면 , 그 또한 버틸 수 있다면 그 가정은 불행한 것은 아니다. 다행히도 뜨거운 기름에 닭을 튀겨 파는 일이 잘되는 집안이었다. 뜨겁게 살아내고 뜨겁게 퍼붓는 일도 있는 거지. 


아버지를 존경하냐. 는 통속적 질문을 한다면 “한 번도 존경한 적은 없지만 늘 유쾌한 남자였다”라고 말을 한다. 하고 싶은 것 다 하고 사시더니 지금은 아예 자식들과 연락도 끊고 건강하게 지내신다. 여전히 건강하시다는 말을 전언으로 늘 듣고 있으니 이런 관계도 괜찮다는 생각이 든다. 같이 유쾌할 수는 없지만 같은 세상에서 따로 유쾌하게 살고 있는 것 아닌가. 


장한평 중고차 시장 입구, 예전과 달라지지 않은 것은 여전히 차를 고칠 수 있는 부품도 파는 곳이라는 것. 중고차 딜러들이 호객행위를 시작하는 그 지점. 사십 년 전 그 아침에는 네모난 빵에 파 다진 계란물을 올려 지짐도 아닌 토스트도 아닌 무언가를 종이에 싸서 손에 쥐어주던 곳.

아버지는 베지밀도 한병 손에 쥐어주고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라며 차 부품을 구하러 안쪽으로 들어갔다. 하필 그쪽이 해가 뜨는 쪽인지 아침 햇볕이 구릿빛 팔뚝을 내보이며 걸어가는 사내를 그럭저럭 근사하게 비추고 있다. 라이방도 있고 말이다.  한참이 지난 후 부속품을 구해 들고 온 사내는 차를 고치기 시작한다. 검은 기름이 적당히 손등에 번져갈 때까지 말이다.  계란 식빵 하나를 다 먹어치운 아이에게 “하나 더 먹을까?”라고 말을 건넨 후 토스트를 하나 더 들고 온다.

네모난 번철에 구운 토스트로만 기억하면 그 사내는 그럭저럭 아비 같은 사람이다. 가족이라는 단위가 버거웠을지도 모르는 사람인데 어쩌다 보니 가장이 , 어쩌다 보니 중년이 되고 , 그렇게 시간을 보낸 사람이다.

그 기억 하나 정도만 있어도 된다. 네모스럽게 모가 난 기억들은 내가 자라면서 이해해야 할 몫이니 말이다.

토스트 위에 대파가 빵 안으로 끼어들 여지가 없었듯이 , 내 기억에도 모난 기억들은 시절 위에 그냥 떠있다.  파 냄새 같이 진득하게 붙어 남아있는 정도다. 너무 기름지게 살지 말라고 남겨놓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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